주간동아 690

2009.06.16

전직 대통령들의 불행 언제까지 두고 볼 것인가

권력구조 메스 대고 春秋筆法 따라 평가해야

  • 이영철 목원대 겸임교수·역사학 hanguksaok@hanmail.net

    입력2009-06-11 13: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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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직 대통령들의 불행 언제까지 두고 볼 것인가

    대통령 권력의 비극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권력구조의 근원적 점검이 필요하다. 망명길에 오르는 이승만, 5·16군사정변 당시 박정희, 법정에 나란히 선 노태우 전두환(왼쪽부터).

    지금으로부터 49년 전, 자유민권의 사수를 위해 4·19혁명이 일어났다. 그날 서울의 거리거리에서 청년학도와 시민들은 저절로 뭉쳐 스크럼을 짜고 총탄에 맞서 나아갔다. 몽둥이 하나 가진 것 없이 교문을 뛰쳐나온 학생과 시민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하나가 되어 독재정권 타도를 외쳤다.

    불만을 폭발시킨 도화선은 1960년 3월15일 제4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드러난, 이른바 ‘3인조’ ‘9인조’로 상징되는 추악한 부정이었다. 부정선거 규탄시위가 마산을 비롯해 서울 부산 등지로 확산되고, 학생을 주축으로 수많은 민중이 합세하면서 격렬하게 전개되자 경찰은 무차별 발포로 이에 대응했다.

    이 와중에 4월11일 마산 시위 도중 실종된 김주열(金朱烈·1943∼1960) 군의 시체가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바다 위로 떠오르자 전 국민은 분노에 치를 떨었고, 제2차 마산 유혈시위가 전개돼 시위는 다시 전국으로 확산됐다. 이어 4월18일에는 고려대 학생 3000여 명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데모를 한 뒤 귀교 길에 정치 깡패들의 습격을 받아 한 명이 죽고 수십 명이 부상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날 고려대생들의 시위 후 테러는 부정선거 규탄을 외치던 구호가 정권퇴진을 요구하는 독재타도로 바뀌고, 이튿날인 4월19일을 기해 서울시내 학생들이 총궐기하는 계기가 됐다.

    화요일인 4월19일 고교생, 대학생을 비롯해 10만여 명의 서울 시민이 시위에 참가, 시위대 일부가 경무대로 향했다. 다급해진 대통령 이승만(李承晩·1875∼1965)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계엄군이 진주함으로써 ‘피의 화요일’은 막을 내렸으나, 이날 하루 동안 전국적으로 186명의 사망자와 6026명의 부상자가 생겼다.

    이어 4월25일 400여 명의 대학교수단이 ‘4·19의거로 쓰러진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하자 미국이 이를 명분으로 이승만의 하야를 권고했고, 4월26일 다시 대규모의 민중 데모가 일어나 이튿날 이승만은 하야 성명을 발표, 12년 독재정권은 종말을 고했다. 28일에는 이기붕(李起鵬·1896∼1960) 일가가 자살했음이 확인됐고, 29일 이승만은 몰래 하와이로 망명길에 올랐다.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임시 대통령과 신생 대한민국의 건국 대통령이자 초대 대통령이 불행한 역사의 첫 장을 열었던 것이다.



    이승만 하야 후 박정희 5·16 정변

    4월혁명 후 1년이 지난 1961년 5월16일 새벽 한강대교에서 육군본부 헌병부대와 쿠데타군 해병여단 간에 사격전이 벌어졌고, 쿠데타군이 서울 시내 진입에 성공하면서 5·16군사정변이 일어났다.

    이 정변을 주도한 박정희(朴正熙·1917∼1979)는 당시 장도영(張都暎) 육군참모총장에게 보내는 글에서 “존경하는 참모총장 각하. 각하의 사전 승인을 얻지 않고 독단 거사하게 된 것을 죄송하게 생각하옵니다. 그러나 백척간두에 놓인 국가와 민족을 구하고자 민족적 사명감에 결사를 감행하게 된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택한 방법이 조국과 겨레에 반역이 되는 결과가 된다면 전원 자결하기를 맹세합니다”라고 거사 동기를 밝혔다.

    하여튼 쿠데타는 성공했고, 그는 3차례 개헌까지 하며 이 땅의 대통령이 되어 군정기를 포함해 무려 18년 5개월 동안이나 장기집권을 했다.

    그러던 1979년 10월26일 저녁 청와대에서 불과 800m 떨어진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安家)에서 날카로운 총성이 늦가을의 하늘을 가로지르며 울려 퍼졌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金載圭·1926∼1980)가 쏜 2발의 총탄에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는 10·26사태가 발발해, 국가원수의 만찬이 진행되던 2층 양옥의 궁정동 안가 일대는 한순간 20여 발의 총성과 함께 피비린내 나는 아수라장으로 돌변하고 말았다. 격동의 한 시대가 처참하게 마감되는 순간이었다.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1978년 12월12일 실시된 제10대 총선에서 집권여당인 공화당은 관권, 금권선거를 했음에도 제1야당인 신민당에게 득표에서 1.1% 뒤지고 말았다. 이는 박정희 정권의 장기독재와 개발독재에 반대하는 민심의 반영이었다. 신민당의 김영삼계는 1.1%의 승리를 ‘수권(受權)의 명령’으로 내걸고 79년 벽두부터 정치공세를 퍼붓고 있었다.

    더구나 1978년 세계적 경제불황에다 79년 제2차 오일쇼크가 겹치면서 수출 중심의 한국경제는 심각한 영향을 받게 됐고, 인플레이션 속에서 실업률이 늘면서 경제성장률이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제위기에서 79년 8월 YH무역노조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들을 강제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여성근로자 김경숙(金景淑·1958~1979)이 사망하고 신민당 소속 국회의원들이 경찰관에게 구타당했다.

    그 후 10월4일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총재직 정지 가처분과 의원직 제명 파동, 10월16일 부마항쟁 발발, 10월18일 부산지역 비상계엄령 선포 등은 유신체제의 몰락을 재촉했다. 특히 부마항쟁은 민주화 문제를 놓고서 유신 지지 세력과 학생, 시민, 야당 등의 민주세력이 첨예하게 충돌한 사건이다. 반면 유신체제의 붕괴를 극복하려는 방안을 놓고서 박정희 측근 김재규와 차지철(車智澈·1934∼1979)은 대립했는데 이것이 급기야 대통령 암살이라는 10·26으로 치닫고 말았다.

    흥미로운 것은 5·16군사정변 후 육사생도들의 5·16 지지행진이 있었는데, 이를 주도한 인물이 전두환(全斗煥)이라는 사실이다. 이후 박정희의 특별한 배려를 받아 10·26사태 당시 보안사령관으로 재직했다.

    5·16군사정변이 4·19혁명을 미완의 혁명으로 만들었듯 그의 후예인 전두환, 노태우(盧泰愚) 등 신군부세력은 10·26사태 후 12·12 항명쿠데타를 단행해 정권을 장악하고 광주민주화항쟁을 무참하게 진압했다. 박정희가 민정 이양 과정에서 한 “나 같은 불행한 군인이 이 땅에 다시는 없어야 한다”라는 유명한 말을 반복하고 만 것이다.

    그 후 전두환에 이어 노태우가 대통령이 됐으나 이 두 친구는 30년 우정을 뒤로한 채 갈라섰고 퇴임 후 법정에 나란히 섰다가 감옥에 가는 또 다른 불행한 역사를 만들었다.

    제퍼슨 “대통령은 화려한 불행”

    그런데 우리 시대 불행한 대통령의 역사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지난 5월23일 새벽, 노무현(盧武鉉·1946~2009) 전 대통령이 고향 봉하마을 부엉이바위에서 투신자살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10·26의 총소리가 30년 만에 또 다른 불행한 모습으로 재현된 것이다. 그는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라는 짧은 유서를 남긴 채 63년의 삶을 마감하고 말았다. 재임기간 중 소탈한 서민 대통령의 이미지로 권위주의를 타파하고 소외계층을 배려하는 정책을 펼쳤으나, 죽기 직전은 검찰의 조사를 받는 힘든 상태였다.

    미국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제3대 대통령을 역임한 토머스 제퍼슨(1743~1826)은 “대통령이란 화려한 불행이다”라고 정의했는데, 해방 후 대한민국의 국가원수인 대통령의 초상이 하나같이 이처럼 성공한 대통령보다는 불행과 비극의 주인공으로 끝난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

    하야, 암살, 법정 출두, 감옥행, 가족비리, 뇌물수수, 자살 등으로 점철된 것은 대통령 본인만의 비극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의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대통령 권력의 비극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권력구조의 근원적 점검이 필요하다. 수술할 부분은 과감하게 메스를 대야 한다. 그리고 이들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유보적일 수밖에 없지만, 통치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작업이 선행된 뒤 결과를 도출해 춘추필법(春秋筆法·‘춘추’처럼 엄정한 필법)에 따라 역사적 평가를 내려야 할 것이다.

    독일 고전 철학의 최고봉인 헤겔(1770~1831)은 자신의 ‘법철학’에서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석양이 돼야 나래를 편다”라고 갈파했는데, 우리 한국 사회도 노 전 대통령의 부엉이바위의 죽음을 승화시켜 진보와 보수가 갈등과 반목을 뛰어넘어 하나가 되는 시대정신을 창출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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