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76

2009.03.10

우리가 지켜보는 우리 동네, 범죄 꼼짝 마!

서울 뉴타운 등 건축 설계부터 ‘범죄예방 환경’ 조성

  • 강지남 기자 layra@donga.com

    입력2009-03-04 18: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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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지켜보는 우리 동네, 범죄 꼼짝 마!

    은평뉴타운 1지구 롯데캐슬 단지 내 어린이 놀이터는 사방에서 관찰하기 쉬운 위치에 자리해 있다.

    연쇄살인범 강호순 사건을 계기로 ‘범죄로부터 안전한 환경’에 대한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강호순이 범죄를 저지른 현장이 주로 경기 화성, 군포, 수원 등 도시와 농촌이 혼재해 정리가 잘 되지 않고 차량통행과 인적이 드문 지역인 탓이다. 강호순이 여대생을 납치한 군포의 버스정류장은 오가는 차량이 드물고 폐쇄회로TV(CCTV)는커녕 인도를 비추는 보행자 조명조차 없는 어둑한 장소였다.

    그렇다면 도로, 상가, 사무실, 주택, 공원 등 우리가 생활하는 환경 자체가 범죄를 예방하도록 설계될 수는 없을까. 아파트 비상계단을 통유리로 만든다면 미관에도 좋고, 이상행동이 모두 밖으로 노출돼 범죄예방 효과도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시도를 하는 것이 CPTED

    (Crime Prevention through Environmental Design·이하 셉테드)다. 셉테드란 범죄 실행이 어렵게 환경을 조성하고, 거주자에겐 자신이 생활하는 환경이 안전하다고 느끼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범죄예방 기법 중 하나.

    지하주차장엔 25m 간격 비상벨

    1970년대 초반 미국에서 처음으로 개념이 정립된 셉테드는 미국 정부가 발주한 연구보고서가 계기가 됐다. 당시 미국 사회는 복지와 교육 서비스를 확대하고 낙후지역을 개발해 범죄 원인으로 지목되는 빈곤, 실업, 사회적 불평등 등을 어느 정도 해소했다. 그럼에도 범죄는 줄지 않았다. 특히 폭력 범죄가 눈에 띄게 증가했고, 과거에는 없던 연쇄살인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경찰대 표창원 교수는 “이에 따라 범죄 발생 원인을 찾는 실증적 연구가 진행됐고, 그 결과 인적이 드물거나 외진 장소 등 환경 요인이 범죄를 유발한다는 결과가 도출됐다”고 설명했다.



    이후 셉테드는 유럽, 일본 등지에서 범죄예방 기법으로 발전했다(상자기사 참조). 우리나라에서도 2004년 유영철 연쇄살인사건 이후 환경적 범죄예방에 대한 필요성이 부각되면서 셉테드 개념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셉테드 관련 연구를 중점적으로 하는 용인대 박현호 교수(경찰행정학)는 “현재 우리나라는 셉테드 도입 초기 단계를 막 벗어난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지난해 12월 지식경제부 기술표준원은 경찰청과 함께 셉테드 인증시스템 구축을 위해 한국산업규격을 제정했다. 이는 기반규격(해당 기술에 사용되는 용어 및 품질 등에 대한 개념 정리)으로 유럽의 셉테드 표준을 국내 사정에 맞게 각색한 수준이지만, 본격적인 셉테드 제도화의 신호탄이란 의의를 갖는다. 기술표준원 박정우 연구관은 “올해 안에 주거지역 및 상가지역 셉테드 설계기준을 국가 표준으로 개발해 건축가들이 실제 설계에서 활용할 수 있게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우리가 지켜보는 우리 동네, 범죄 꼼짝 마!

    1 도로보다 인도가 더 넓은 보행자 중심의 거리 조성은 납치 등의 범죄 예방에 효과적이다. 2 지하주차장에 설치된 비상벨(모두 은평뉴타운).

    한편 서울시는 셉테드를 뉴타운(재정비촉진지구)에 의무적으로 도입할 방침이다. 3월1일 이후 뉴타운사업 시행 인가를 받으려면 서울시가 마련한 셉테드 규정을 따라야 한다. 서울시는 지난해 3월 셉테드 태스크포스 팀을 꾸려 경찰청과 국내외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아 뉴타운에 맞는 셉테드 규정을 개발했다.

    서울시가 도입한 셉테드 설계지침의 예는 다음과 같다. 우선 지하주차장에는 비상벨을 최대 25m 간격으로 설치하게 했다. 또 보통 차도를 따라 설치하는 지하주차장 조명을 주차구역 벽면에 설치하도록 의무화했다. 이는 지하주차장에서 발생 빈도가 높은 강도, 납치 등의 범죄를 예방하기 위한 조처. 또 단지 출입구 보행동선에 CCTV를 설치하게 했으며, 각 동 출입구 도로 주변에 키가 작은 관목을 심어 출입자가 쉽게 관찰되도록 했다. 경비실 창문은 시야 확보에 지장이 없는 구조로 계획하며, 담은 반드시 투시형으로 설치해야 한다. 담 안쪽과 바깥쪽에서 드나드는 사람을 자연스럽게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복도식 아파트의 경우 각 층 복도에 반경 15m마다 비상벨을 설치해야 한다. 조명은 밤에 10m 거리에서 상대방 얼굴을 인식할 수 있는 밝기여야 한다. 어린이 놀이터는 후미진 장소가 아니라 각 세대에서 내려다볼 수 있고, 시야가 탁 트인 공간에 설치하도록 했다.

    놀이터는 아파트 단지 한가운데

    지난해 6월부터 입주를 시작한 은평뉴타운 1지구는 시범적인 셉테드 주거지역이라 할 만하다. 본격적으로 셉테드 개념이 도입된 것은 아니지만, 설계 단계부터 범죄예방적 환경 구축을 염두했기 때문. 이 지역은 △고립지역을 피하고 자연 감시가 가능한 공간에 자리한 어린이 놀이터 △지하주차장 비상벨 △차량통제를 최소화한 보행자 중심의 상가거리 등 셉테드적 요소를 갖춘 것으로 평가받는다.

    앞으로는 행정중심 복합도시 및 혁신도시에도 셉테드가 적용될 예정이다. 박현호 교수는 “관건은 비용”이라고 강조했다. 원가가 지나치게 상승하지 않아야 사업 시행자들이 셉테드를 수월하게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범죄로 인한 경제·사회적 비용은 2000년 19조76000억원에서 2006년 25조2400억원으로 해마다 상승하는 추세다. 강호순 연쇄살인사건을 비롯해 제주도 여교사 피살사건, 어린이를 상대로 한 성범죄 등 강력사건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다. 표창원 교수는 “이미 범죄 발생 가능성이 높고, 잠재적 범죄자는 서구 이상으로 높아진 상태”라며 “빈곤, 실업, 불평등 해소를 통한 범죄 예방이나 경찰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환경적 예방을 도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해외 셉테드 사례는?

    英, 건축이나 도로개설 전 범죄예방 자문


    미국과 유럽은 30여 년 전부터 셉테드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일본 호주 등도 1990년대부터 셉테드 도입을 본격화했으며, 최근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칠레 등도 셉테드 도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미국 애리조나주 템페시는 아예 건축 및 소방 공무원들로 구성된 셉테드 전문부서를 두고 있다. 이들은 새로운 건축이 있을 때마다 해당 건물이 범죄예방 설계에 적합한지 일일이 점검한다. 플로리다주 게인스빌에는 80년대 중반 ‘편의점 조례’를 도입했다. 저녁 8시부터 새벽 4시까지는 반드시 2명 이상의 점원을 둬야 하며, 계산대는 편의점 밖에서도 잘 보이는 곳에 설치해야 한다.

    영국은 셉테드를 도시계획과 설계에 도입하도록 법적으로 규정했다. 브리스틀시에서는 건축이나 주요 도로 개설 이전에 경찰에 사전 통보해 범죄예방 자문을 구해야 한다. 네덜란드는 2004년 셉테드를 도시계획 정책 가이드라인으로 채택, 모든 신축건물에 셉테드를 적용하고 있다. 셉테드 인증을 받은 주택은 보험료를 10~30% 할인받는 등의 혜택도 있다.

    일본 도쿄의 미드타운과 롯폰기힐스 등도 도시계획 단계에서부터 셉테드가 도입된 사례. 주차장에는 비상벨이, 보행자 통로에는 조명이 5m 간격으로 설치됐다. 호주는 2000년 시드니올림픽 때 경기장, 숙소, 교통시설 설계에 셉테드 개념을 채택해 실행했다.

    셉테드는 범죄 감소 효과를 낳고 있는 것으로 보고된다. 미국에서는 셉테드 채택으로 편의점 절도로 인한 손실이 50%, 강도로 인한 손실이 60% 감소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영국의 경우 셉테드 도입 주택지구는 인근지역에 비해 주거침입 절도는 50%, 차량범죄는 40% 감소했다. 암스테르담 신규 개발지의 98%, 기존 지역의 80%는 셉테드 도입 이후 범죄 감소 효과를 거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일본에는 가로등 불빛을 주황색에서 푸른색으로 바꿔 범죄발생률을 20% 낮췄다는 보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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