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52

2008.09.09

가슴 따뜻한 피에로 닮은 웃음

  • 현수정 공연 칼럼니스트

    입력2008-09-01 15: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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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슴 따뜻한 피에로 닮은 웃음

    ‘휴먼 코메디’의 첫 번째 에피소드 ‘가족’. 움직임이 갖는 리듬감을 독특한 상황극으로 풀어냈다.

    관객을 웃기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희극에서는 말장난, 슬랩스틱, 상황의 비약, 블랙유머 등이 자주 쓰인다. 그런데 지난해 10월 리바이벌의 막을 올린 뒤 롱런하고 있는 연극 ‘휴먼 코메디’(사다리움직임연구소 작, 임도완 연출)는 이 같은 요소들과는 또 다른 독특한 웃음의 코드가 담겨 있다. 이 작품에서 배우들의 리드미컬한 움직임과 절묘한 타이밍으로 전개되는 상황은 독특한 질감의 웃음을 유발한다.

    극은 세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옴니버스 형식이다. 첫 번째 에피소드인 ‘가족’은 어업으로 먹고사는 어느 가난한 가족의 이야기다. 아버지와 아들들이 모두 어선을 타고 나갔다가 죽음을 맞았지만 남은 아들마저 뱃길을 떠나야 하는 안타까운 상황에서, 식구들은 출항을 앞둔 아들과 가족사진을 찍고 밥을 먹는다. 행동이 ‘아주 아주 아주’ 느린 큰아버지, 사진을 찍으려는 찰나 자꾸만 매무새를 가다듬는 어머니, 큰 감자를 놓고 서로 눈치 보며 실랑이를 벌이는 식구들의 모습이 유머러스하면서도 안타깝게 묘사된다.

    두 번째 에피소드인 ‘냉면’의 내용은 간단하다. 다섯 명이 열심히 퍼포먼스를 곁들여 5중창을 하는 것이다. “맛 좋은 냉면이 여기 있소. 값싸고 달콤한 냉면이요. …한 오라기 콧구멍에 나오는 것 손으로 빼냈네. 또 나온다. 줄줄줄 또 빼낸다. 아직도 빼낸다.” 마임으로 상황을 표현하며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애교 있는 퍼포먼스인 ‘냉면’은 일종의 막간극과 같은 느낌을 준다.

    마지막 에피소드는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하다. 제목은 ‘추격’. 한 여관을 배경으로 복잡하게 펼쳐지는 추격전을 보여준다. 아내와 함께 여관을 털기 위해 들어온 강도, 강도를 잡기 위해 온 형사, 밀애를 즐기러 들어온 여배우와 대통령 후보, 특종을 위해 두 사람의 사진을 찍고자 애쓰는 정치부의 ‘주기자와 배끼자(백기자)’, 느끼하다 못해 몸 전체가 기름을 바른 듯 미끄러운 춤선생한테 홀딱 빠진 여관집 딸, 딸을 잡아 혼내주려는 여관집 주인, 월세를 받으러 온 건물주인 등이 간발의 차로 들어왔다 나가면서 시끌벅적한 상황을 연출한다.

    세 개의 에피소드는 주제에서 통일성을 지니고 있지는 않으나, 극의 진행 방식에서 일치된 콘셉트를 보인다. 모두 스토리텔링과 대사보다는 특정한 상황에서 인물들의 심리를 강조하거나 마임을 활용해 양식화된 몸짓을 보여준다. 10년 전 마임극단에서 시작해 텍스트 이외의 무대언어에 대해 연구해온 극단 사다리움직임연구소의 독특한 색깔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가족’은 움직임이 갖는 리듬감을 중심으로 풀어낸 상황극이다. 답답함에 가슴을 쥐어짜며 바라봐야 하는 큰아버지의 달팽이처럼 느린 걸음걸이와 서커스하듯 리드미컬하게 감자를 주고받는 가족들의 몸짓이 반복되면서 극적 긴장감을 형성하고 웃음을 유발한다. 배우들이 코에 달고 나온 빨간 공은 피에로처럼 희극적이면서도 애수 어린 이미지를 형성한다.

    또 ‘냉면’은 노래와 마임 동작을 곁들인 짧은 상황극인데, 인물들은 비일상적이고 익살스러운 캐릭터를 보여준다. ‘추격’의 경우 상황이 엉뚱하게 전개되면서 왁자지껄한 웃음을 선사하는 소극(笑劇)의 성격을 띤다. 이 부분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여러 플롯이 절묘한 타이밍으로 짜여 있다는 점과 배우들이 1초 혹은 2초 만에 옷을 갈아입으면서 일인다역을 소화한다는 점이다.

    결코 가볍지 않은 내용 … 관객들과 정서 교류

    그러나 논리적이기보다는 감각적으로 접근하는 이 작품은 말로 설명하는 연극보다 더 직접적인 반응을 이끌어낸다. 때문에 이 작품의 관객은 유치원생부터 중년 부부까지 다양하다. 마치 어린아이가 ‘유희’하듯 자연스럽게 웃음을 유발하며 관객과 정서적 교류를 이룬다. 한편 난해하지 않고 웃으면서 관람할 수 있는 작품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다. 감자 하나로 한 끼를 해결해야 하는 ‘찌들게 가난한’ 가족의 모습과 아들의 출항이 죽음의 길이라는 직감으로 사진을 찍자고 하는 어머니의 부탁은 슬프기까지 하다. 그리고 섬세한 심리묘사는 인간에 대한 연민과 따뜻한 시선을 느끼게 한다.

    아쉬운 점은 순간순간 터뜨리는 관객들의 웃음에서 좀더 깊은 맛이 느껴졌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관객들로 하여금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게 하기 위해선 앞뒤 맥락에서 상황에 대한 명료한 해석과 표현이 요구된다. 예를 들면 가족들이 아쉬움에 아들의 출항을 지연시키는 것인지, 그저 소소한 일들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인지에 따라 같은 상황도 전혀 다른 느낌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인간 정서에 대한 공감대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휴먼 코메디’의 웃음 코드는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그리고 배우들의 캐릭터 변신과 신체 움직임에서 오랜 기간 훈련한 노고를 느낄 수 있었다.

    피에로의 매력

    웃음 뒤 감춰진 눈물에 공감


    가슴 따뜻한 피에로 닮은 웃음

    피에로 분장을 한 희극배우.

    웃긴 듯 슬픈 듯 오묘한 표정의 ‘피에로(Pierrot)’ 이미지는 현대인에게 매우 익숙하다. ‘슬픈 피에로’ ‘도시의 피에로’ 등 대중가요에만도 셀 수 없이 등장해온 이 어릿광대는 보통 ‘상처를 감추고 미소를 짓는’ 모습으로 사람들의 공감대를 얻어왔다.

    19세기 이후 많은 예술가들이 피에로의 매력에 관심을 가졌고, 20세기 대중문화에도 피에로는 수시로 등장했다. 장 뤽 고다르를 비롯한 유명 영화감독들이 피에로를 주인공으로 작품을 만들었으며, 찰리 채플린은 피에로 캐릭터를 활용해 페이소스 가득한 희극들을 펼쳐 보였다.

    또한 브리티시 팝의 대표적 가수인 데이비드 보위는 자신의 앨범과 비디오 재킷에 피에로 의상을 입고 등장하기도 했다.피에로는 16세기에 성행한 희극 코메디아 델 아르테의 어릿광대에서 발전했다고 알려져 있다. 입은 귀에 걸린 듯 웃고 있고 눈에는 눈물이 번진 피에로의 복합적인 캐릭터가 만들어진 것은 장 밥티스트 드뷔로(Jean-Baptiste Deburau, 1796~1846) 이후부터다. 드뷔로는 이전의 단순하고 얼간이 같은 피에로 캐릭터를 지금처럼 슬픔이 서린 인간적인 형태로 바꿨다. 그리고 왕에게 혼쭐이 나면서도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해대는 어릿광대의 캐릭터는 점점 사회에 대해 신랄하게 풍자하며 서민의 한을 드러내는 깊이를 갖게 됐다.

    드뷔로가 만든 피에로 캐릭터는 팬터마임에서 사랑에 상처 입고 우는 듯 웃는 표정의 캐릭터로 유형화되기도 했다. 이후 그의 피에로는 마임계의 거장 마르셸 마르소, 장 루이 바로 같은 대배우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어린이극에 단골손님으로 등장하거나 캐릭터 상품으로 판매되는 피에로는 밝은 면이 강조된다. 그러나 피에로의 눈에 검게 얼룩진 눈물자국은 유랑극단 배우들에게서 발전된 피에로의 복합적 정서를 보여주고 있다.

    현수정 공연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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