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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도 바람, 파도 그리고 시간마저 느림을 즐기다

  • 글·이형삼 동아일보 출판국 전문기자 hans@donga.com 사진·조영철 기자 choyc@donga.com

증도 바람, 파도 그리고 시간마저 느림을 즐기다

증도 바람, 파도 그리고 시간마저 느림을 즐기다

증도 여행은 염전에서 시작해 염전으로 끝난다. 태평염전 저수지 너머로 소금창고들이 줄지어 서 있다.

솔직히 고백하거니와 나는 여러 주일, 여러 달, 아니 사실상 여러 해 동안 상점이나 사무실에 하루 종일 틀어박혀 지내는 내 이웃 사람들의 참을성, 혹은 정신적 무감각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정신적 무감각’, 그리고 그에 못지않은 ‘육체적 무감각’을 떨쳐내려 길을 나선다. 목적지는 전남 신안군 증도. 지난해 말 아시아 최초의 ‘슬로시티(Slow City)’로 지정된 서남해 끝자락의 작은 섬(인구가 2000명 남짓 하니 ‘시티’는 좀 뭣하지만)이다.

슬로시티 증도 체험여행은 증도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도심 체증을 뚫고 고속도로-국도-지방도를 거쳐 연륙교를 건너 섬(사옥도)에 이르고 그 섬에서 다시 뱃길로 증도에 닿기까지, 예닐곱 시간에 걸친 ‘준비운동’부터가 끈덕진 체력과 인내를 요하는 ‘슬로 체험’이다. 외길 지방도에서 낡은 화물차라도 한 대 앞세우면 금쪽같은 세월 스쳐가는 소리에 속이 타들어간다.

증도와의 만남은 염전으로 시작해 염전으로 끝난다. 선착장을 벗어나면 물빛 반짝이는 염전이 끝간 데 없이 펼쳐지고, 증도를 떠날 때도 이 염전을 뒤로하고 배에 오른다. 460만㎡(140만평), 서울 여의도의 1.5배 크기라는 국내 최대 규모의 태평염전이다. 증도가 슬로시티 인증을 받은 데는 이 염전이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염전에 바닷물을 대는 수차만 펌프로 바뀌었을 뿐, 수작업 위주의 옛 방식 그대로 소금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50년 된 석조 소금창고를 소금박물관으로 개조하고 염전에 소금 만들기 체험장을 설치해 관광객을 끌어들인 홍보전략도 주효했다.



아시아 최초 슬로시티 … 아직도 수작업으로 소금 생산

증도 바람, 파도 그리고 시간마저 느림을 즐기다

차를 버리고 두 다리로 돌아보면 증도는 다양한 표정을 드러낸다.

태평염전 사람들은 자신들이 빚어내는 천일염에 신앙 차원의 애정과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들의 세계관은 ‘먹어서 약 되는 소금’과 ‘먹어서 독 되는 소금’으로 대쪽 자르듯 양분된다. 전자는 갯벌 염전에서 해수를 자연 증발시켜 얻는 천일염이고, 후자는 이온교환장치로 해수에서 염화나트륨을 분리해 만든 정제염이나 재제염, 암염을 가리킨다. 이곳 소금 장인(匠人) 이문석(71) 씨는 “천일염의 염도는 82%다. 나머지 18%는 88가지 천연 미네랄 성분이다. 그런데 정제염이나 암염은 염도가 99%에 이른다. 천일염으로 바닷물 염도를 맞춘 물에 줄돔을 넣으면 쌩쌩하게 헤엄치지만, 정제염 녹인 물에 넣으면 두 시간 안에 모두 죽는다. 정제염으로 김장을 하면 금방 물이 나서 흐물흐물해진다”며 ‘천일염 신앙간증’에 열을 올렸다.

천일염 생산은 속도전이 아니다. 햇빛, 바람과 끈질긴 싸움을 이어가는 지구전이다. 시간을 알려주는 건 오직 바다뿐, 시종일관 ‘slow but steady’다. 밀물이 가장 높은 한사리 때 저수지에 바닷물을 들이는데 이때 염도는 2∼3%. 이 물은 염도에 따라 21단계로 턱이 진 증발지를 거치며 염도를 높여간다. 비 오는 날엔 염도가 낮아지므로 증발지의 물을 함수창고로 보내 보관하다가 다시 증발지로 보내는 ‘비몰이’를 거듭한다. 염도가 22∼23%에 이른 물은 결정지로 보내 채렴을 하는데, 여기까지 꼬박 25일이 걸린다. 이렇게 얻은 소금 결정체를 짧아도 6개월, 길게는 3년 이상 소금창고에 넣어두고 간수를 빼야 떫은맛이 사라져 상품화가 가능하다.

증도 바람, 파도 그리고 시간마저 느림을 즐기다

1. 바닷길 ‘노두’ 밟고 화도(花島) 가는 길. 2. 청정 갯벌의 짱뚱어와 농게. 3. 해안도로변의 초분(草墳).

시간이 더디 간다고 소금밭을 목가적인 ‘만만디’ 일터로 여긴다면 오산이다. 온몸의 근육과 감각을 풀가동해야 하는 치열한 생업의 현장이다. 채렴을 앞둔 노련한 염부는 기온, 바람, 별빛, 하늘색을 두루 살펴 날씨를 점친다. 매뉴얼은 ‘육감’이다. 예컨대 바람은 ‘오뉴월 여인네들 치맛자락이 살랑살랑 들릴 만큼’불어야 한다.

증도 바람, 파도 그리고 시간마저 느림을 즐기다

태평염전 체험장.

날씨가 좋을 듯하면 이튿날 새벽 4시쯤 결정지 물청소를 한다. 결정지가 깨끗하지 않으면 소금색이 거무튀튀해진다. 8시쯤 다시 나와 함수창고에서 뻘덩어리를 제거한 물을 결정지에 내보내면 정오쯤 하얀 막이 형성되는데, 염부들은 이를 ‘꽃피었다’고 한다. 소금꽃들이 엉켜 가라앉으면서 결정체가 되면(‘소금이 살찐다’고 한다) 저녁 6시 무렵부터 묵직한 고무래를 힘겹게 끌고 밀며 채렴에 들어간다. 상품(上品) 천일염은 우윳빛에 가까운 흰색을 띠며, 손으로 으깨면 잘 부서진다. 또 짠맛 외에 약간 단맛이 느껴진다. 이렇듯 소금 고르는 데만도 시각, 촉각, 미각을 총동원해야 한다.

증도 여행은 그렇게 몸으로, 감각으로 세상을 체험하는 기회다. 일상적으로 수동적으로 반복하는 행동 말고, 전적으로 내 의지에 따라 자연과 조응하며 몸을 사용해본 기억이 있는가. 자동차로 여행하기에 증도는 너무 작고 볼거리도 별로 없다. 그러나 두 다리로 돌아보면 곳곳에서 다양한 얼굴들이 객을 맞는다. 잠들어 있던 감각과 사물의 떨림이 되살아난다. “걷기는 세계를 느끼는 관능에로의 초대다. 걷는다는 것은 세계를 온전하게 경험한다는 것이다. 이때 경험의 주도권은 인간에게 돌아온다.”(다비드 르 브르통, ‘걷기 예찬’)

걷다가 속도감이 탐나면 자전거를 탄다. 증도는 ‘자전거의 섬’이다. 섬 이곳저곳에 400대의 노란색 공용 자전거를 비치해 무료로 이용할 수 있게 했다. 높은 언덕이 드물고 대부분 평탄한 지형이라 자전거로 섬을 일주하는 데 무리가 없다.

염전과 갯벌 끝내주는 풍광 … 독살 체험장도 둘러볼 만

증도 바람, 파도 그리고 시간마저 느림을 즐기다

1. 우전해수욕장의 해송림 산책로. ‘철학의 길’로 명명됐다. 2. 황혼의 염전.

우전해수욕장을 따라 4km에 걸쳐 조성된 해송림 산책로엔 높지도 낮지도, 굵지도 가늘지도 않은 고만고만한 해송들이 양편으로 띄엄띄엄 늘어서 있다. 꽉 막혀 있지 않은 숲이기에 오솔길 해송 사이로 언제든 푸른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고 90여 개의 섬이 점점이 떠 있는 바다와 은빛 모래 카펫으로 눈을 돌릴 수 있다. 모든 감각기관을 열어놓고 이 길을 걸으면 걷기는 곧 동적(動的) 명상이 된다. 이 산책로에 ‘철학의 길’이란 이름이 붙은 까닭을 짐작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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갯벌에서 바라본 짱뚱어다리.

염전과 더불어 여행객을 압도하는 또 하나의 풍광은 갯벌이다. 특히 해수욕장 북서쪽에는 430만㎡(130만평)의 드넓은 갯벌이 펼쳐지는데, 이 갯벌을 가로질러 나무와 철재로 470m의 날렵한 ‘짱뚱어다리’를 놓았다. 해질 무렵 다리 위에선 갯벌 수평선 너머 붉게 사위어가는 짤막한 황혼의 장관(壯觀)을 놓치지 않으려 카메라 셔터음이 끊이지 않는다. 이 순간만큼은 ‘슬로시티’임을 잊는다. 그 아래 육상과 해양의 두 생태계가 만나는 청정 갯벌엔 미꾸라지보다 조금 굵은 짱뚱어, 농게, 칠게들이 제 세상을 만나 뻘을 헤집고 다닌다. 두 손 가득 뻘을 퍼올리면, 마그네슘 성분이 많아 최초의 머드 축제가 탄생한 ‘원조 갯벌’답게 탱탱하고 매끄러운 미세 입자들이 살갗을 부드럽게 핥으며 흘러내린다.

섬 서쪽 검산항 부근엔 전통 어로법인 독살(석방렴) 체험장이 있다. 굴곡진 해안에 돌담을 쌓아두면 밀물 때 들어온 숭어 전어 새우 멸치 등이 썰물 때 못 빠져나가고 돌담 안 얕은 물에 갇힌다. 그야말로 그물 대신 시간을 던져놓고 하릴없이 고기를 기다리는 방법인데, 그나마 요즘은 고기가 많이 줄어 물때가 몇 번이나 바뀌어도 뜰망으로 건져낼 만한 게 없다. 염전에 필적하는 ‘인내 체험장’이다.

물때를 잘 맞추면 ‘노두’라는 옛 바닷길 1.2km를 걸어 증도의 부속섬 화도(花島, 해당화가 많이 피어 만조 때 멀리서 보면 꽃봉오리 같다 해서 그리 부른다)로 건너갈 수 있다. 노두는 간조 때 나룻배가 있는 곳까지 가기 위해 갯벌 위에 돌을 쌓아 만든 길. 지금은 차량 통행을 위해 노두 위에 콘크리트 포장도를 깔아 옛 풍취가 퇴색했지만, 걸어서 혹은 자전거로 하루에도 몇 번씩 바닷길을 오가는 기분은 그때마다 새롭다.

포장길과 비포장길이 뒤섞인 해안 일주도로를 걷다 보면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항월포 근처 산기슭에서 초분(草墳)이 눈에 띈다. 초분은 시신을 바로 매장하지 않고 짚이나 풀로 덮어두는 장례 방식. 몇 년이 지난 뒤 뼈만 추려 묻는다. 멀쩡한 청장년이 뱃일하다 횡사하는 일이 잦던 해안지방이나 섬에서 행해지던 습속이다. 망자에 대한 그리움이 얼마나 사무쳤으면 그렇게라도 옆에 두고 싶었을까. 비록 항월포 초분은 관광객을 의식해 만들어둔 것이지만 증도엔 최근까지도 실제로 초분을 쓴 경우가 있다고 한다. 슬로시티 증도에선 죽음마저 느렸다.

슬로시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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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를 그려 넣은 슬로시티 깃발.

슬로시티 운동은 패스트푸드의 속도지향주의, 효율지상주의에서 벗어나자며 주창한 슬로푸드 운동의 정신을 지역 차원으로 확대한 개념이다. 1999년 이탈리아 중부의 그레베 인 키안티 등 4개 도시에서 시작되어 지금까지 11개국 97개 도시가 슬로시티에 가입했다. 슬로시티로 지정되려면 △인구 5만명 이하 △전통 수공업과 문화유산 보존 △패스트푸드와 유전자 변형 음식, 1회용품 사용 거부 △자연친화적 농법 및 에너지 사용 등의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이탈리아에 본부를 둔 슬로시티국제연맹은 지난해 12월 아시아에선 처음으로 신안군 증도, 완도군 청산도, 담양군 창평면 삼지천마을, 장흥군 유치면 반월마을 등 전라남도 4개 지역을 슬로시티로 지정했다. 영화 ‘서편제’의 무대가 된 청산도는 구들논과 갯돌해변, 문화재로 등록된 돌담길 등 옛 섬의 자취를 고스란히 간직한 곳.

16세기 초에 형성된 삼지천마을은 전통가옥과 그 사이를 굽이굽이 돌아가는 돌담길, 죽염된장·간장 등 전통장(醬), 수제 꿀초 산지로 잘 알려졌다. 호남 5대 명산의 하나인 천관산과 다도해 쪽빛 바다를 낀 반월마을은 때묻지 않은 자연에서만 자란다는 장수풍뎅이와 무공해 표고버섯이 자랑거리다.




주간동아 2008.09.09 652호 (p46~49)

글·이형삼 동아일보 출판국 전문기자 hans@donga.com 사진·조영철 기자 choy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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