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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호의 휴대폰 문화인류학

불륜의 도구 한편으론 꼬리 밟힐 단서

불륜의 도구 한편으론 꼬리 밟힐 단서

불륜의 도구 한편으론 꼬리 밟힐 단서
우스갯소리 하나. 고속도로가 꽉 막혀 자동차들이 옴짝달싹 못하고 있다. 30분 이상 움직이지 못해 답답해하며 주위를 둘러보는데, 옆 차 운전자가 휴대전화에 대고 핏대를 올리고 있다. 그가 갑자기 창문을 내리더니 휴대전화를 나에게 불쑥 내밀며 소리쳤다. “저기요, 내가 왜 늦는지 우리 마누라한테 말 좀 해줘요!”

이런 상황에서 휴대전화는 고마운 선물일까, 아니면 귀찮은 구속일까. 휴대전화가 보편화되면서 부부 관계에도 변화가 생기고 있다. 부부가 집에서 함께 쉬는데 이성에게서 전화가 걸려오면 적잖이 눈치가 보인다.

어떤 한 직장여성이 급한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남성 상사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부인에게 자신을 정중히 소개한 뒤 ‘아무개 과장님’을 바꿔달라고 하자, 부인이 남편을 부르며 하는 말이 전화선을 타고 들려왔다. “전화 받아, 여자야.”

여자?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자신을 ‘여자’라고 칭하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 말은 그 부부가 별로 사이가 좋지 않음을 보여주는 단서일 수 있다. 어쩌면 그 남성은 과거에 어떤 여성과 사귀다 발각된 ‘전과’가 있을지도 모른다.

전화는 사적인 통신 수단이다. 그리고 남녀 사이의 소중한 비밀통로다. 휴대전화의 기동성과 개별성으로 그 길은 한결 넓어졌다.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상대와 직접 연결되는 조건,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속삭이거나 문자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는 시스템 덕분에 처음 만난 남녀가 연애관계로 진입하는 장벽도 크게 낮아졌다. 예전 같으면 쉽게 접근할 수 없어 망설였겠지만, 이젠 캐주얼한 안부인사를 건네면서 상대의 마음을 탐색할 수 있다. 그러다 서로 ‘필이 꽂히기’ 시작하면 급속히 감정이 달아오를 수 있는 회로가 바로 휴대전화다.



伊 조사에선 외도 발각 90%가 휴대전화 때문

이런 이유로 휴대전화는 ‘외도’에서도 결정적 매체로 작용한다. 지난해 인기리 방송된 TV 드라마 ‘내 남자의 여자’에서 아내 친구를 사귀는 준표(김상중 분)는 서재에서 수시로 휴대전화로 통화한다. 그런데 아내 지수(배종옥 분)는 서재에 들어갈 때마다 황급히 휴대전화를 끊는 남편의 행동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가족과 함께 있으면서도 ‘살짝’ 소통할 수 있는 휴대전화는 그렇듯 불륜의 긴요한 도구가 된다. 그런 만큼 조심도 해야 한다. 언제 어떤 문자메시지가 날아들지 모르기에 그 ‘보물단지’를 잘 간수해야 하는 것이다.

상황은 늘 불안하다. 예전에 이런 상황을 소재로 한 휴대전화 광고가 있었다. 어떤 남성이 아내 몰래 만나는 연인의 휴대전화 벨소리를 따로 설정해놓았는데, 아버지에게 걸려온 전화를 착각해 첫 마디를 잘못 내뱉었다가 조심하라는 충고를 듣는 광고였다. 아닌 게 아니라, 유럽에서 휴대전화가 가장 많이 보급된 이탈리아의 한 조사에 따르면 배우자의 외도가 발각된 계기의 90%가 휴대전화라고 한다. 우리나라엔 이런 통계가 없지만 아마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따라서 요즘 같은 세상에서 바람을 피우려면 주도면밀한 자기관리가 필요하다. 아예 비밀 휴대전화를 따로 장만해 사무실이나 자동차에 보관해두는 사람도 있다. 장기 상연 중인 연극 ‘라이어’를 보면, 외도에 빠진 남성이 자동차사고 때문에 집으로 걸려온 경찰의 전화로 곤혹을 치르기 시작하는데, 자신의 불륜 행각을 아내에게 감추기 위해 둘러댄 거짓말이 또 다른 거짓말을 낳으면서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휴대전화가 보급되면서 ‘라이어’들은 좀더 안전하게, 그러나 훨씬 더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게 됐다.

혼외 관계에 대한 온갖 소문과 정보가 넘쳐나는 이 사회에서 배우자나 연인들은 상대방을 더욱더 의심하고 있다. 어떤 남성이 친구와 술 한잔 하느라 늦을 것 같다고 집에 전화했는데, 아내가 어떤 장소에서 술을 마시는지 궁금하다며 그 자리 광경을 폰카메라로 찍어 보내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그 남성은 아내의 요구대로 술자리를 촬영해 메시지 전송하는 것으로 결백을 증명했지만, 결코 아내를 안심시킬 수는 없었다. 어느 직장인은 룸살롱에서 무심코 명함을 건넸다가 며칠 뒤 ‘잘 들어가셨느냐’ ‘인상이 정말 좋으셨어요’ 등의 문자메시지를 계속 받았다고 한다. 어떤 경우에는 그런 곳에 얼씬하지 않았는데도 괴상한 스팸문자를 계속해서 받기도 한다. ‘자기야, 어제는 너무 좋았어. 오늘 밤도 부탁해. 010-5△3△-1772’ 같은 엉뚱한 문자메시지 한 통으로 부부 싸움이 벌어지기도 한다.

돌이켜보면 휴대전화가 나오기 전부터 우리나라에는 이색적인 전화 문화가 있었는데, 바로 ‘전화방’이다. 이곳은 음란한 욕망을 익명의 여성과 대화하면서 배설하는 남성들의 전용 공간이었다. 최근 전화방은 매매춘을 알선하는 접선 장소로 변질됐다. 휴대전화가 보편화되면서 ‘콜걸’들의 행동반경이 한결 넓어진 듯하다. 길거리 곳곳에 모호한 현수막이 걸려 있다. ‘대화+만남, 01△-△△△△-△△△△.’ 그런가 하면 인터넷 공간에는 가끔 이런 메시지가 뜬다. ‘귀하에게 관심을 보이는 이성이 계십니다. 연결하시겠습니까?’

우리는 통신기기는 첨단으로 갱신되지만 소통은 갈수록 어려워지는 시대를 살고 있다. 관심, 대화, 만남이 고픈 현실의 권태로움을 풀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 애틋하고 깊은 외도에서부터 심심풀이용 원 나이트 스탠드나 매매춘에 이르기까지, 남녀의 접선이 손쉽게 이뤄지는 정보 환경에서는 연인과 부부의 관계가 취약해지기 쉽다. 친밀한 감정이 차고 넘치는 사사로운 세계는 또 다른 은밀한 만남의 유혹에 늘 노출돼 있다. 휴대전화는 그 모든 밀어(密語)들을 밤낮으로 엿듣고 있다.



주간동아 2008.01.29 621호 (p7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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