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16

2005.12.27

한상범 부사장의 아주 특별한 효도

돌아가신 아버님 친구분들과 8년째 송년 모임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입력2005-12-26 10: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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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상범 부사장의 아주 특별한 효도

    한상범 대한항공 부사장(작은 사진)은 아버지를 잃었지만 더 많은 아버지를 얻었다고 말한다.

    12월14일 서울 서대문구 신촌동의 밤은 즐겁게 휘청거렸다.상점의 영롱한 빛은 밤을 수놓았고, 크리스마스캐럴은 거리를 들썩이게 했다.

    송년회를 찾는 행인들의 발걸음은 하나같이 들떠 있었다. 연세대 앞의 한 한식당에서 꾸려진 색다른 송년 모임은 휘청거리는 밤을 따뜻하고 향기롭게 만들었다.

    한식당 ‘석란’으로 6시30분께부터 여든을 넘긴 노(老)신사들이 모여든다. 일제강점기에 휘문고를 다닌 32회 교우들이다.

    한상범 부사장의 아주 특별한 효도
    최영희(84) 전 국방부 장관, 성악가 조주호(84) 씨, 곽복록(83) 전 서강대 교수, 손보기(83) 전 연세대 교수, 이순재(83) 전 민주평통자문위원, 교장을 지낸 이덕수(83) 씨….

    70년 지기들은 어느새 까까머리 학생 시절로 되돌아간다.



    “자네들 정지용(시인) 선생님이 우리들 영어 가르친 거 기억 나? 시험 감독으로 들어와서는 감시는 안 하고 신문만 보셔서 너도나도 커닝을 했었잖아. 그때가 그립구먼.”

    조주호 씨가 옛이야기를 꺼내놓자, 까르르 웃음꽃이 방 안 가득 퍼진다.

    “동수도 참석했어야 하는데, 자네들 동수가 보고 싶지 않아?”

    이순재 씨가 세상을 떠난 한동수(97년 작고) 씨를 떠올린다. 그러자 곽복록 씨가 “동수가 학교 다닐 때 응원단장이었지. 우리들 구심점이었는데…”라고 말을 받았다.

    노신사들이 먼저 떠난 친구를 기릴 때 대한항공 한상범(59) 부사장의 눈망울이 촉촉해진다. 한 부사장의 아버지가 70년 지기들의 입에 오르내린 바로 그 ‘동수’. 이날 모임은 한 부사장이 꾸린 ‘아버지를 기리는 밤’이다. 그는 8년째 아버지의 기일이 낀 12월에 송년 모임을 겸해 아버지 친구들을 모아 고인을 기려왔다.

    “살아 계신 부친을 뵙는 것 같아”

    子欲孝而親不待(자욕효이친부대·자식이 효를 다하고자 하나 부모는 기다려주지 않는다)라는 옛말은 한 부사장에게는 마땅치 않은 듯싶다. 아버지는 떠났으되 그는 현생에서 효를 실천하고 있었다.

    “살아 계실 때 효자 노릇을 못했습니다”라고 그가 말하자, 노신사들은 “이렇게 아름다운 아들은 없다. 동수가 복이 많다”고 맞받는다.

    그는 아버지의 유언대로 시신을 화장해 북악산에 놓아드린 게 마음에 걸려 모임을 시작했다고 한다. 아버지 친구들이 덕담 나누고 옛얘기 하는 걸 보면 아버지 모습이 절로 떠오른다.

    “12월 모임이 1년 내내 기다려집니다. 어르신들을 만나면 꼭 살아 계신 부친을 뵙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를 잃고, 더 많은 아버지를 얻은 셈이지요.”

    그는 “선배님 건강하시죠”(한 부사장도 휘문고를 나왔다)라고 물으며 아버지 친구들의 건강을 꼼꼼히 챙겼다. 행여 내년 모임에 나오지 못할까 걱정해서다. 그 역시 건강을 신경 써야 하는 초로의 나이. 그는 2003년 임파선암 수술을 받았다.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의 도움으로 미국에서 치료를 받아 새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

    초로의 신사가 돌아가신 아버지 친구들을 챙기는 모습은 따뜻했고, 향기로웠다. 조주호 씨는 “시대의 귀감이 되는 행동”이라며 친구 아들을 치켜세웠다. 모임에 동석한 장용이(60) 휘문교우회 부회장은 “세상을 떠나서도 옛 친구들에게 기려지니 한 부사장 아버님은 행복한 분이다. 많은 사람들이 한 부사장을 따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모임은 9시가 넘어서 파했다. 식당을 떠나면서 한 부사장이 농담을 꺼낸다. “아버지 여자 관계는 어떠셨습니까?” 노신사들이 정색하고 답한다. “없었어.”

    노신사들은 한 부사장이 들려준 선물꾸러미를 들고 하나둘씩 차에 올랐다. 신촌의 밤은 여전히 휘청거렸고, 한 부사장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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