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16

2005.12.27

러 “삼각 經協 다양한 카드 준비”

북한 전력 공급·사할린 가스관 한국 연결 큰 관심 … 北核 해결 땐 협력 본격화 예상

  • 모스크바=김기현/ 특파원 kimkihy@donga.com

    입력2005-12-21 15: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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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 “삼각 經協 다양한 카드 준비”

    한반도의 유력한 에너지원으로 꼽히고 있는 사할린 해상 유전, 가스전.

    “현재 6자회담에서 러시아의 역할이 제한적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회담이 마무리된 뒤에는 러시아가 한반도 문제의 키 플레이어(key player)로 떠오를 것이다.”

    러시아의 한 한국 전문가의 전망이다.

    다시 난항에 빠진 북한 핵 관련 6자회담이 이르면 1월에 재개되리라는 기대가 고개를 들고 있다. 회담의 핵심 과제 중 하나는 북한이 핵을 포기하는 대가로 에너지를 지원할 수 있는 구체적 방안을 찾는 것. 북한은 동맹국 소련이 붕괴된 뒤 국제가격보다 싼값에 원유를 공급받을 길이 막히면서 심각한 에너지난에 시달리게 됐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핵 개발에 나섰다고 주장해왔다.

    북핵 문제를 떠나서라도 앞으로 통일로 가는 과정에서 북한 경제를 재건하기 위해서는 에너지 문제부터 풀어야 한다. 러시아는 한반도와 접해 있을 뿐 아니라 가스와 석유 전력이 풍부한 에너지 대국. 러시아를 배제하고서는 북한 에너지 문제의 해결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든 러시아가 개입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 알고 있는 러시아는 이미 다양한 ‘카드’를 마련해두고 있다.

    북한 에너지 해결, 러시아 개입 준비



    러 “삼각 經協 다양한 카드 준비”

    러시아 극동 아무르 강의 부레야 수력발전소. 한반도에 대한 전력 공급원으로 유력하며 2003년 1호기가 가동한 이래 2009년까지 6개의 발전기를 완공할 예정이다.

    무엇보다도 북한에 가장 시급한 것은 전력이다. 1994년 제네바 합의는 북한이 독자적인 핵개발을 포기하는 대신 한국과 미국이 신포에 한국형 경수로 2기를 건설해주기로 했다. 하지만 경수로 건설은 2차 북핵 사태로 사실상 백지화됐다. 경수로 건설은 재개될 수도 있지만 북한의 약속 위반을 경험한 미국은 전혀 새로운 대북 전력 공급 방안을 찾을 가능성이 크다.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루미얀체프 연방원자력청 청장은 최근 몇 번이나 “대북 전력 공급에 참여하겠다”고 밝혔다. 러시아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러시아제 VVER형 경수로의 제공. 한국이나 미국형 경수로에 비해 값이 싸고 구조도 단순해 운용하기 쉽다는 점이 장점이다. 또 러시아는 1980년대 북한에 경수로를 건설해주려고 준비한 적이 있어 기술적인 정보도 많이 가지고 있다.

    러시아는 미국이 대북 경수로 제공을 끝까지 반대할 경우 북한 접경의 러시아 영내에 경수로를 건설한다는 복안도 갖고 있다. 이 발전소를 러시아가 운용하면서 북한으로 전력을 공급한다는 것. 그렇게 되면 이 경수로에 대한 국제사회의 감시와 통제가 가능해진다.

    어쨌든 경수로는 언제라도 군사적 전용이 가능하다. 러시아가 이란에 부셰르 핵발전소를 지어주는 데 대해 미국이 완강히 반대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렇다면 원전 이외의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러 “삼각 經協 다양한 카드 준비”
    최근 추미애 전 의원은 북한에 원전 대신 화력발전소를 지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화력발전소는 원전보다 건설 기간이 짧지만 중유나 무연탄 등 원료의 공급이 용이하지 않다는 문제가 있다.

    이에 러시아는 천연가스를 이용한 열병합발전소를 북한에 지어주는 대안을 세워두고 있다. 사할린-극동 러시아-북한을 잇는 가스관을 건설해 파이프천연가스(PNG)를 발전용으로 공급한다는 것. 이는 미국의 몇몇 전문가와 정치인들이 일찍부터 관심을 보인 사업이기도 하다. 특히 미국 하원의 커트 웰든 의원 등은 사할린 천연가스의 한반도 연결 구상에 ‘코러스(Korus) 사업’이라는 이름까지 붙일 만큼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세계적인 에너지 메이저 회사인 미국의 엑손모빌이 개발을 주도하고 있는 사할린 1광구 가스전 때문이다.

    사할린 1광구의 유전은 올해 말부터 본격적인 상업 생산을 시작할 예정이지만 가스는 2008년부터 생산이 가능하다. 그러나 생산을 해도 팔 곳이 마땅치 않다. 그래서 사할린 1광구 유전의 본격적인 생산이 시작되기 전 판매처를 찾다 보니 북한에까지 생각이 미친 것이다. 가스의 판매처도 확보하고 북한 핵문제 해결에도 기여할 수 있는, 정치와 경제를 연계한 방안인 셈. 궁극적으로 가스관을 한국까지 연결해 가스를 공급할 수도 있다. 사할린에서 한국까지 2400km의 한반도 종단 가스관을 건설한다는 것. 러시아는 이 가스관 건설이 정치적인 이유로 어렵다면 북한을 통과하지 않고 동해를 통해 한국으로 바로 연결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이 경우 휴전선 부근 한국 영내에 발전소를 지어 북한에 전력을 공급할 수도 있다.

    하지만 원전이든 화력발전소든 열병합발전소든 건설하려면 시간이 걸린다. 더욱이 가스관 건설까지 연계하면 당장 북한에 전력을 공급하기 어렵다. 직접 전력을 공급하는 것이 더 빠른 방법이다. 그래서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북한에 대한 전력공급 방안을 들고 나온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 전문가들은 이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북한에 200만kW의 전력을 제공할 정도로 한국의 전력 사정이 충분치 못하다는 것.

    대신 러시아는 극동지역의 잉여 전력을 북한에 보내줄 수 있다고 나섰다. 이 지역은 3~4년 전만 해도 만성적인 전력난에 시달렸다. 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로프스크 등 대도시들도 하루에 몇 번씩 정전이 될 정도. 그러나 2003년 아무르 강의 부레야 수력발전소 1호기가 가동되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부레야 발전소는 현재 3기의 발전기가 가동 중이고, 2009년 6호기가 완공되면 모두 450만kW의 발전용량을 갖추게 된다.

    낙후된 극동지역 개발 의도도 한몫

    북한의 2003년 공식 발전용량이 770만kW인 것과 비교하면 부레야 발전소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더욱이 러시아 정부는 아무르 강에 추가로 수력발전소를 지을 예정이다. 러시아 극동지역의 인구는 1000만여명에 지나지 않는다. 수력발전소 건설이 국내 전력 수요만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러시아는 이미 중국에 전력 수출을 추진하고 있고, 대북 공급도 가능하다. 가스처럼 전력도 북한을 거쳐 한국까지 보내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하고 있다. 러시아는 부레야에서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까지 1600km의 고압송전선을 완성했다. 이를 북한과 한국에 연결하면 되는 것이다.

    러시아과학아카데미(RAN)의 세계경제및국제관계연구소(IMEMO) 부설 코리아연구센터 이영채 소장은 “송전선이 한국까지 연결되면 단순한 전력 수출이 아니라 전력 교환도 가능하다”고 전망했다. 기후적 특성상 러시아는 겨울에 전력이 많이 필요하지만 한국은 여름에 전력이 더 필요하기 때문에 잉여 전력을 교환할 수 있다는 것. 이 소장은 “안정적인 전기 협력을 위해 한국전력이 러시아국영전력공사(UES)의 극동지역 자회사인 보스토크에네르고의 일부 지분을 인수하는 방안도 생각해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러시아는 이처럼 북한과 한국을 잇는 ‘남북러 삼각 경제협력’에 관심이 많다. 여기에는 한반도와 연계해 낙후된 러시아 극동지역을 개발하려는 의도도 있다. 가장 먼저 눈길을 끌었던 것은 철도 연결이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취임 직후부터 시베리아횡단철도(TSR)와 한반도종단철도(TKR)의 연결에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북한이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 지난해 4월 제1차 3국 철도전문가 회의를 끝으로 이 사업은 더 이상 진전되지 않고 있다. 한반도 내 구간으로 러시아는 경원선을 원하고 있지만 북한은 동해선을 고집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일부 러시아 전문가들은 철도와 가스관 송전선을 연계해 같은 노선으로 묶어서 동시에 건설하는 ‘패키지 방안’까지 내놓고 있다.

    이러한 러시아의 다양한 구상은 현재 북핵 문제라는 정치적 걸림돌에 막혀 있다. 러시아로서는 답답한 노릇이다. 하지만 앞으로 러시아와 한반도를 잇는 에너지와 물류 분야 협력의 밑그림은 이미 여러 장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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