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간동아 로고

  • Magazine dongA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이나리의 ‘사람 사는 세상’

우리 시대의 藝人김성녀

恨과 情 곰삭혀낸‘무대 위 큰 누님’

  • 이나리 기자 byeme@donga.com

우리 시대의 藝人김성녀

우리 시대의 藝人김성녀
그의 눈이 금세 붉어진다. 순식간이다. 막 ‘존경받는 스승의 요건’에 대해 이야기하던 참이다. 그가 대학교수가 된다 하자 두 아이는 그에게 “학생을 사랑하라, 스킨십을 많이 해줘라, 실력을 키우라”는 조언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중 두 번째 덕목, ‘스킨십’이란 단어를 입 밖에 내자마자 그 큰 눈에 바로 눈물이 맺혀버린다. 그는 이런 표현을 썼다. “아이들이 ‘우리한테 못한 스킨십’ 많이 해주라고 했다”고. 그는 “아이고, 나이를 먹으니 눈조리개가 야물지 않아서…” 하며 얼른 말머리를 돌려버린다.

국악인이자 교육자(중앙대 국악극과), 우리 연극계를 대표하는 배우인 김성녀(55)는 알고 보면 참 잘도 우는 사람이다. 강단과 독기, 불패의 낙천성을 지닌 일 중독자. 그래서 ‘독사’로도 불리고 ‘철녀’로도 불리는 그는 또 이렇게 ‘눈물의 여왕’이다.

어머니와 닮았지만 전혀 다른 삶

‘눈물의 여왕’은 그가 평생 결코 닮지 않기를 염원했던 여인,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고 사랑한 여인인 어머니의 젊을 적 별명이기도 하다. 채 철이 들기 전부터 김성녀는 ‘어머니처럼 살지 않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그 결심은 때때로, 두서없이,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운명에 의해 번번이 좌절당했다. 하지만 ‘세상에 나를 다 내주진 않겠다’는 독한 다짐 덕분에 그는 ‘어머니와 꼭 닮은 삶’을 살면서도 마침내 ‘어머니와 전혀 다른 삶’을 일구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 값으로 그는 눈물 많은 여인이 됐다.

요즘 그는 새 학기 강의 준비로 무척 바쁘다. 음악극과 학과장이기도 해 처리해야 할 행정 업무 또한 만만치 않다. 한편으로는 학생들 이끌고 갈 미국 공연 준비에 몰두하며, 또 한편으로는 11월 시작할 마당놀이 공연 연습으로 날밤을 샌다. 최근 성황리에 마무리한 모노드라마 ‘벽 속의 요정’ 공연 재개도 머지않았다.



그는 ‘벽 속의 요정’에서 보여준, 다섯 살 소녀부터 백발노인까지 32개 캐릭터를 넘나드는 신들린 연기로 “마침내 접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평단의 찬사를 받았다. 그는 이미 정극, 마당놀이, 뮤지컬, 영화 등을 넘나들며 백상예술대상 연기상 2회(1986, 1991), 서울연극제 여자연기상 2회(1991, 1992), 한국뮤지컬대상 여우주연상(1996), 춘사영화제 여우조연상(2000), 김동훈 연극상(1993) 등을 받은 국내 최정상급 배우다. 모두 중요무형문화재인 박귀희, 오정숙, 김소희, 성창순, 한농선, 신영희 명창에게서 사사한 빼어난 소리꾼으로서의 면모다. 그의 이런 종합예술인으로서의 피와 근성은 고스란히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우리 시대의 藝人김성녀

제자들과 마당극 연습에 몰두하고 있는 김성녀 씨.

그의 어머니 박옥진(1935~2004) 여사는 1950~60년대를 주름잡은 국극 스타였다. 그가 그저 무대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객석에선 후르르 눈물바람이 일었다 한다. 그래서 ‘비극의 여왕’으로도 불렸던 그는 만 열다섯에 열세 살 연상의 연출가 겸 극작가 김향(1922~1999) 선생과 결혼해 첫딸 성녀를 낳았다.

그리고 연이어 태어난 다섯 아이. 바로 밑 성애 씨는 동초제 판소리의 맥을 잇는 명창이 됐다. 6남매 중 넷째인 남동생 성일 씨는 국내 정상급 뮤지컬 안무가다. 다섯째 성자 씨는 중앙관현악단 거문고 주자이고, 막내 성아 씨는 국립국악원 민속음악단 해금 연주자다. 거기다 김성녀의 남편이 극단 ‘미추’ 손진책(58) 대표이고, 영국 웨스트엔드에서 활약 중인 뮤지컬 배우 손지원(29) 씨가 그 딸이고 보면, 참으로 그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예인 가계의 핵심임을 알 수 있다.

극장을 놀이터로 … 가난한 6남매 맏이 ‘온갖 고생’

“집안 분위기가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저만 해도 극장을 놀이터, 의상 바구니를 잠자리 삼아 자랐으니까.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는 저나 동생들이나, 어머니가 일하는 극단에서 아역 배우 노릇을 했어요.”

어린 시절 그는 어머니를 맘껏 “엄마”라 불러보지 못했다. 열여섯 살 차이밖에 안 나는 엄마는 늘 “한 걸음 떨어져 걸어라, 이모라 부르라”고 시켰다. 너무 어려 엄마가 된 사실이 창피하기도 했을 뿐더러, 스타로서의 자의식이 발동한 측면도 있었으리라. 그렇게 어머니는 늘 그에겐 저 멀리 빛나는 존재, 범접 못할 자기 세계를 지닌 ‘무대 위 선녀’였다.

인물 좋고 재기 넘치던 아버지는 그러나 불행히도 가정에 충실하지 못했다. 1957년에는 국극에서 번 돈을 몽땅 영화 ‘대춘향전’에 투자했다 실패했다. 6남매의 생명 줄은 고스란히 어머니 손으로 넘어갔다.

“어머니는 한 푼이라도 더 벌 양으로 지방순회공연에 나서곤 했어요. 생활은 모두 셀프, 밥하고 청소하고 어린 동생 돌보는 모든 일이 저와 바로 밑 동생 성애에게 맡겨졌죠. 자잘한 집안 살림은 마음 약한 성애가 다 했어요. 저는 일단 책을 읽어야겠다 그러면, 막내가 옆에서 막 울어도 돌아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큰일, 중요한 일은 모두 그의 몫이었다. 국민학교 5학년 때 처음 혼자 부산행 야간열차를 탔다. 어머니 곁에서 아역 배우 노릇을 하고 있는 동생의 취학통지서가 나온 때문이었다. 그는 그렇게 데려온 동생을 그의 손으로 학교에 입학시켰다. 아버지가 장롱을 뒤져 돈을 꺼내가면 눈 똑바로 뜨고 덤비는 것도 그였다. 화가 난 아버지가 후려쳐도 그는 결코 울거나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강하고 의지가 되는, 아들처럼 듬직한 맏딸이었다.

우리 시대의 藝人김성녀

남편이자 동지이자 친구인 극단 ‘미추’ 손진책 대표와 함께.

“어머니는 극단에서 주는 점심 값을 버선 속에 모아두었다 6남매 학비로 내놓곤 했죠. 예인으로서의 자존심도 강해, 굶기를 밥 먹듯 하면서도 무대에서 혼신의 힘을 다하다 결국 큰 병을 얻고 말았어요.”

어머니는 쌍칼춤의 일인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영양실조에 40kg도 채 나가지 않는 몸으로 10kg짜리 쌍칼을 휘두르며 춤을 춘다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다. 늑막염에 걸리고도 고집스레 무대에 오르다 결국 폐병까지 얻어 서른여섯 젊은 나이에 은퇴를 하고 말았다.

“여고 3학년 때 졸지에 소녀가장이 됐죠. 공부를 제법 잘했고, 그래서 선생님이 꿈이던 전 대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어요. 실을 산만큼 쌓아놓고는 집안에 틀어박혀 뜨개질 부업만 했지요.”

그렇게 2년, 친지의 권유로 작은 무대에 서기 위해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올 때쯤 그는 이미 이전의 김성녀가 아니었다. 그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차돌처럼 단단한 처녀가 돼 있었다.

“우선 먹고 살아야겠기에 동생 성애랑 ‘비둘기자매’라는 듀엣을 결성했어요. 민요 ‘까투리사냥’을 현대화해 불렀는데 그게 제법 히트를 쳤죠.”

하지만 그는 가수 생활이 싫었다. 밤무대에 서기 싫었고, 여기저기 고개 조아리며 인사 다니기도 싫었다. 1년 만에 그만두고 본격적인 연기자의 길로 들어섰다. 한편으로는 ‘무대에서 판소리를 대충 흉내만 내는’ 배우가 되기 싫어 명창 박귀희 선생을 찾아갔다. 박 선생은 “니가 박옥진이 딸이냐” 한마디 하더니 그를 바로 후계자 명단에 올렸다.

박 선생은 그에게 후견인을 붙여주려 동분서주했다. 당시만 해도 재력 든든한 후견인이 없으면 입에 풀칠하기조차 힘든 것이 국악인의 삶이었다. 그 역시 김성녀는 싫었다. 연극에 더 열심히 매달렸고, 1976년 ‘한네의 승천’ 여주인공 오디션을 보러 갔다 남편 손진책 씨를 만났다. 평생 독신을 고수하리라 결심했던 그는 거짓말처럼 사랑에 빠졌다. 고작 뒷머리를 잡아당기는 것이 귀엽다는 표시일 만큼 ‘원단 경상도 남자’인 그에게 일생을 걸기로 했다. 무엇보다 그 남자는 그를 여자로만 보지 않고, 배우로 예술가로 아끼고 존중해주었다. 일과 삶의 동반자로 손색이 없었다.

“어머니께 연극 연출가랑 결혼하겠다 하니 아무 말씀도 안 하시데요. 현실적 능력은 없는 남자다, 하지만 그를 너무 사랑하고, 평생 콩나물죽을 끓여먹더라도 그와 살고 싶다…. 그러고는 어머니 앞에 엎드려 난생 처음 펑펑 울었어요.”

어머니처럼 안 살겠다 해놓고 그는 배우가 됐고 소리를 배웠고 가난한 연출가의 아내가 됐다. 하지만 다른 게 하나 있었다. 그는 무조건 희생하는 삶, 입 꼭 다물고 꾹꾹 눌러 참는 삶만큼은 죽어도 살지 않을 참이었다. “말이 그렇지 8남매의 맏며느리, 그것도 가풍 엄하기로 소문난 경상도 양반댁 맏며느리가 그게 되나요. 10년 시집살이에 얼굴은 온통 기미투성이가 됐죠.”

오직 예술, 오직 연극뿐인 남편을 대신해 그는 돈을 벌어야 했다. 밤새 제사 음식을 마련해놓고 정작 당일엔 극장으로 방송국으로 뛰어나가야 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러니까 사당패지!” 하는 시어머니 말씀 한마디가 뼈에 사무쳤다. 또한 남편네는 딸들까지 모두 명문대를 나온 엘리트 집안이었다. 그의 손위 셋째 시누이가 손봉숙 국회의원이다. 은근한 무시에 무수히 맘을 다친 그는 뒤늦은 대학입시 공부에 매달렸다. 서른여섯 살, 단국대 국악과 학생이 됐고 마흔 넘은 나이에 중앙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래도 버틸 수 있었던 건 남편 덕분이었어요. 남편은 제가 좋은 주부가 되기보다는 좋은 배우가 되길 바랐어요. 밥해라 빨래해라 소리 한번 한 적 없고, 아이들한테도 알아서 챙겨 먹고 알아서 공부하도록 본을 보였지요.”

하지만 현실적 문제에 짓눌려 사는 그에게 남편의 남다른 기대와 연기에 대한 높은 기준치는 오히려 무거운 짐이 되지 않았을까.

“물론 힘겨웠죠. 하지만 남편은 순수한 사람이에요. 타협할 줄 모르고 예술가 연 할 줄도 모르고요. 냉수 먹고 이 쑤시는 선비 정신에 우직한 심성을 지닌 진짜 예술가지요. 그런 그를 내가 지켜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거의 사명감에 가까웠죠.”

“사람을 위로하고 즐겁게 하는 예술가의 길 갈 것”

그렇다고 그가 ‘안 참겠다, 내 좋아하는 일을 하겠다’는 결심을 아주 잊은 것은 아니었다. 시어머니와의 관계만 해도 그가 마침내 입 열어 “어머니, 저도 딸처럼 대해주세요” 절절히 호소한 그 순간 눈 녹듯 풀려버렸다. 시댁 식구들도 이제는 그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존중한다. 그 역시 “억울하단 생각에 속을 끓이면 결국 내 손해”라는 이치를 어렵게 깨닫게 됐다.

그는 자식들에게도 뻔뻔하고 잔정 없는 엄마였다. 오죽하면 딸 지원 씨한테서 “엄마는 왜 모성본능이란 게 없느냐”는 타박까지 들었을까.

“그래서 애들이 아빠는 동네 아저씨 같고 엄마는 꼭 아빠 같다, 그런 말을 하곤 했어요. 엄마는 바깥일에 바쁘고 아빠는 무뚝뚝하기 그지없다는 거죠.”

그는 아이들의 손을 잡고 등을 쓸어주는 일에도 인색하기만 했다. 돈을 벌어야 했고 최고가 돼야 했기에 그에겐 아이들의 외로움을 돌볼 시간이 없었다. 그 점에서도 그는 자신의 어머니와 너무도 닮아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딸은 딸대로 섭섭함에 사무쳐 있고, 아들은 아들대로 심각한 마음의 병에 시달리고 있었어요.”

부모의 뒤를 이어 연극인이 된 딸 지원 씨는 오직 날카로운 비평뿐인 부모의 다그침에 어느 날 “제발 한 번만이라도 따뜻하게 보아달라”며 애끓는 절규를 내뱉었다. 스스로 “나 좀 병원에 데려가 달라”고 한 아들에게는 우울증이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의사가 그러더군요. 그냥 아이 얘기를 좀 들어주라고. ‘우리에 비하면 너희는 호강하며 사는 것’이라는 말 말고, 바른 소리만 하지 말고 그냥 좀 들어주라고요.”

아들과 갈빗집에 마주 앉았다. 길게 들을 것도 없었다. 무조건 잘못했다고 했다. 엄마 열심히 산 것만 생각하고 너의 아픔, 너의 고민에는 미처 눈 돌리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갈비를 물고 있던 아들의 입가가 실룩실룩하더니 으어헝 울음이 터져나왔다. 덩치가 산 만한 아들과 유명짜한 어머니는 고기를 굽는 내내 대성통곡을 했다.

그런 아픔과 성숙의 시간을 거치며 그와 남매는 더욱 가깝고 뜨거운 사이가 됐다. 아들은 카투사에 입대해 선임 병장으로 군 생활을 무사히 마친 뒤 지금 대학 복학을 앞두고 있다. 하지만 자녀들에 대한 부채감과 죄책감은 아직도 그의 가슴을 옥죄는 가장 큰 아픔이다.

“남편한테도 그래요. 평생 좋은 동료였을 뿐 좋은 아내는 아니었죠. 미안하고, 정말 안타깝고. 부모님한테는 또 어땠나. 아버지는 평생 제 원망만 받다 돌아가셨고, 어머니랑도 어디 좋은 데 여행 한 번 못 갔어요. 부귀영화, 명예가 다 뭐냐고. 아이들한테나 부모님께나 사람 구실을 못했는데….”

회한도 깊고 아픔도 크지만 이제 그는 비로소 자신의 삶에 대해 “행복하다”고 말한다. “무대에 설 수 있고, 노래를 할 수 있고, 무엇보다 남편과 손잡고 시작해 이끌어온 음악극 분야에서 확실히 자리 매김하게 됐으니까요. 또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잖아요. 제 소녀 적 꿈이 선생님이었으니 마침내 그 꿈마저 이룬 거죠.”

그는 앞으로도 사람 냄새나는 연기자가 되겠다 한다. 고고한 척, 우아한 척, 달나라에서 온 선녀라도 되는 양 말하고 행동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 한다.

“예술은 사람이 하는 거거든요. 사람을 위로하고 사람을 즐겁게 하려고. 예술가가 별 건가요. 자기 재능을 한껏 발휘해 뭔가 세상에 보탬이 되면 되는 거지. 춤·노래·연기, 그런 건 또 하나의 재능일 뿐이에요. 앞으로도 겸손하게, 그저 한결같이 갈 겁니다.”



주간동아 2005.09.13 502호 (p86~87)

이나리 기자 byeme@donga.com
다른호 더보기 목록 닫기
1218

제 1218호

2019.12.13

“긴 터널 빠져나오자 우울의 고장”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