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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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인 외 100인 ‘낙하산 부대’

공기업·체육계·교육계 등 요직 속속 투하 … 일부 보은 인사 논란·전문성 시비

  • 김시관 기자 sk21@donga.com

    입력2005-07-14 14: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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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인 외 100인 ‘낙하산 부대’

    2002년 12월19일 노무현 후보의 승리가 확실시되자 측근들이 악수를 나누고 있다.

    2003년 4월 초 어느 날 저녁 청와대. 2002년 민주당 경선 당시 노무현 후보의 손발 노릇을 했던 ‘경선팀’이 한자리에 모였다. 청와대에 입성한 노 대통령이 “그들이 보고 싶다”고 해 마련된 자리였다. 노 대통령은 서너 달 만에 만나는 이들의 손을 일일이 잡고 감사를 표했다.

    “여러분들과는 이런 자리가 아니라 삼겹살과 소주를 먹는 자리여야 하는데….”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2003년 4월 노무현 정부의 1차 인사가 대략 끝난 직후. 대선 당시 이름도, 직책도 없이 음지에서 묵묵히 일했던 이들은 술잔이 돌면서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얘기를 하나 둘 꺼냈다. 경선팀 원로 K 씨가 총대를 멨다.

    “지난 대선 때 돈도 없고 자리도 없었지만, 내일에 대한 꿈과 희망이 있었다. 주변에서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주위 사람들이 우리더러 ‘팽’당했다고 말한다. 한 말씀 해달라.”

    자리 문제였다. 당시 경선팀 관계자 가운데 서갑원 씨 등 몇 명만이 대통령비서관 등으로 발탁됐을 정도로 경선팀은 인사에서 소외됐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노 대통령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참 어려운 일입니다. 같이 걱정하고 연구해봅시다. 나는 여러분을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한이헌·이철 씨 따가운 눈총 받으며 공기업 사장에

    당시 이 자리에 참석했던 영남권 경선팀 한 관계자는 “노 대통령이 그렇게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는 것을 처음 보았다”며 “그날 청와대에서 나온 뒤 몇몇 인사들은 대통령에게 인사 부담을 주지 말자는 결의까지 했다”고 말했다. 이 인사는 “그 후 인사 배려가 별로 없었지만 대통령의 고충을 이해하자는 목소리도 많았다”고 말했다.

    노무현 정부 초기 대통령의 인사원칙은 개혁성과 자질을 갖춘 인사들의 전진배치였다. 그 원칙에 따라 ‘노무현을 만든 100인’은 물론 경선팀도 청와대와 정부기관 등으로 뻗어나갔다. 그들은 의욕적으로 각 분야에서 개혁적인 색채를 드러냈다. 당시 노 대통령의 인사에 대해 여론과 언론은 크게 부정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인사에 대한 언론과 여론의 평가는 노무현 정부가 반환점 앞에 서면서 조금씩 바뀌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문제는 낙하산 인사와 관련된 비난이다. 노무현 대통령을 만든 100인의 측근 그룹과 별개로 참여정부는 100명 이상의 낙하산 부대를 새로 등장시켰다. 이들은 노무현 정부가 반환점을 돌면서 공기업이나 체육계, 교육계 등 각 분야의 요직에 속속 진출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적법한 과정을 통해 전문성을 인정받은 경우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일부 인사들은 발탁 과정에 대한 의혹이 불거지고, 이는 낙하산 논쟁으로 이어진다. 이들은 노 대통령을 만든 사람도 있지만 대선 당시 외곽에서 노 대통령을 돕거나 물밑에서 지원활동을 했던 인사들이 많아 보은인사라는 지적으로 이어진다.

    김정길 전 의원은 2월 대한체육회장으로 진출했다. 외형상 전임 이연택 회장과의 경선 모양새를 취했지만 내용은 ‘단독 질주’라는 의혹을 샀다. 김 회장은 한국 스포츠계 주류 교체라는 시대적 요구를 수행하기 위해 음양으로 움직였다. 취임 4개월 만에 김운용 전 의원을 압박, IOC 위원직을 사퇴시켰다. 체육계로서는 앓던 이가 빠진 셈. 여세를 몰아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IOC 총회에서 태권도의 올림픽 종목 유지에 성공했고, 한국인 IOC 위원 추가 확보, 2014년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김 회장은 3월 ‘주간동아’와 한 인터뷰에서 “한 번도 낙하산을 탄 경험이 없다”고 말했다.

    2002년 11월24일 노무현-정몽준 후보단일화를 앞두고 이재정 전 의원은 당직자들 앞에서 ‘눈물의 기도’를 올려 노무현 후보 캠프를 눈물바다로 만들었다. 그 직후 이 전 의원은 교육부 장관 후보로 거론됐으나 대선 후 그는 의왕구치소로 향하는 비운과 맞닥뜨렸다. 정치자금을 만진 것이 화근이었다. 그 후 그는 정계일선에서 은퇴, 사제의 길로 복귀했다 민주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부의장으로 부활했다. 그는 국내는 물론 해외 평통위원의 대대적인 물갈이를 시도, 야당으로부터 선거에 대비한다는 비난을 사고 있다. 그 이전에는 신상우 전 국회부의장이 이 자리를 맡아 변혁을 시도한 바 있다.

    2005년 6월 기술신용보증기금 이사장에 취임한 한이헌 전 의원의 경우도 마찬가지. 2002년 부산시장 선거에 출마해 낙선했던 한이헌 전 의원은 선거가 끝난 뒤 아내와 함께 경기 구리에서 갈빗집을 개업했다. 직접 주차를 해가며 장사에 재미를 느끼던 그를 여권 핵심부가 불러 올렸다. 그 이후 대한주택공사 사장, 한국전력 사장, 통합 증권거래소 초대 이사장 등 공기업 사장직에 차례로 공모, 취업 재수생으로 나섰다. 그는 2005년 6월 4전5기 끝에 기술신용보증기금 이사장에 취임했다. 그러나 합격의 기쁨도 잠시, 주변에서 ‘낙하산 부대’라는 따가운 눈총을 보내 심기가 불편하다. 러시아 유전개발 의혹으로 물러난 신광순 전임 사장의 후임으로 한국철도공사 수장에 취임한 이철 전 의원도 낙하산 부대란 언론의 지적을 받았다. 이 사장은 17대 총선 때 부산(북·강서갑)에서 출마해 낙선한 우리당 출신.

    대선 캠프·대통령직 인수위 출신들 곳곳에 포진

    허운나 전 의원은 대선 당시 노무현 대통령에게서 “여성 정치인 중 가장 순수하고 깨끗한 사람”이라는 극찬을 들은 100인 가운데 한 사람. 그도 한국정보통신대 총장으로 자리 잡았다. 91년 한국일보 노조파업 때 노조위원장으로 있던 남영진 씨는 노동 관계를 잘 아는 변호사 출신 국회의원을 찾았다. 수소문 끝에 만난 사람이 노무현 의원. 이후 두 사람의 연은 이어졌고, 그는 대선 때 언론특보를 맡았다. 이후 한국광고공사 감사로 발탁됐다. 김재규 전 부산민주공원관장과 정순균 전 국정홍보처장도 있다. 그외 100인의 명단에 이름이 오르지 않은 인물 가운데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에 전력투구한 ‘대선공신(大選功臣)’도 많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이른바 ‘낙하산’ 인사라는 오해를 받으며 공직자의 길로 나섰다. 열린우리당 울산시당위원장을 지낸 송철호 변호사가 국민고충처리위원장에, 이우재 전 의원이 한국마사회장에 임명됐다. 최근엔 학계 요직으로의 진출도 눈에 띈다(상자기사 참조).

    영남 지역 총선 낙선자들도 한 자리씩 차지

    공기업의 감사·이사는 역대 어느 정권이나 여당 정치인들의 낙하산이 단골로 차지하는 자리다. 노무현 대통령 후보 선거 캠프,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여권 출신 인사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다. 시민사회특보 출신의 이치범 씨는 한국환경자원공사 사장이 됐다. 정책특보를 지낸 여익구 씨는 한국전력의 자회사인 한국남동발전 감사로 활동했다.

    외교특보였던 이충렬 씨는 한국보훈복지의료공단 감사, 인수위 자문위원 출신도 공기업 감사에 많이 임용됐다. 각종 선거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출마했다 낙선한 인사들의 재기용도 두드러진다.

    특히 최근에는 영남 지역 총선 낙선자가 대거 공기업에 진출, 낙하산 논쟁에 불을 붙였다. 이와 관련해 노 대통령은 7월7일 언론사 편집·보도국장단과의 간담회에서 영남 지역 낙선자 배려에 대해 “열린우리당은 전국당이 되는 게 목표다. 제도를 바꿔 지역 구도를 해소하지 못한다면 열린우리당이라도 인물을 키워 영남에서 한 사람이라도 더 당선시키고 일보라도 전진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국정에 지장 없이 할 테니 그거 하나는 봐달라”고 말했다.

    참여정부 출범 후 정부 산하기관이나 유관기관의 임원으로 취업한 사람은 총 145명. 정치권 출신 인사가 61명, 공무원 출신이 84명이다. 정치권 인사 61명은 모두 청와대와 대통령선거대책위원회,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열린우리당 출신으로 알려졌다. 이들의 연봉은 대략 5000만원대에서 2억원대 전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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