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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독도 역사 바로 세우기 모른 체할 텐가

푯말·위령비·표석 등 시나브로 실종 … 우리 선배들 흔적 찾아야 영유권 굳건

  • 이정훈 기자 hoon@donga.com

독도 역사 바로 세우기 모른 체할 텐가

독도 역사 바로 세우기 모른 체할 텐가

1950년 6월8일 독도에서 독도조난어민위령비를 세우는 조재천 경북도지사. 현재 이 위령비는 유실된 상태다(제일 왼쪽), 홍순칠 독도의용수비대장의 생전 모습(가운데), 1953년 10월15일 독도에 영토 표석을 세우는 홍종인 한국산악회장. 이 표석도 유실됐다(오른쪽),

독도 영유권 문제를 놓고 두 달여 꽤나 시끄러웠다. 분에 못 이겨 분신한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일장기를 불태운 이도 적지 않았다. 1995년 독도 영유권 분쟁이 일어났을 때와 대체로 비슷한 모습이었다.

95년 당시 김영삼 대통령과 지금의 노무현 대통령은 ‘역사 바로 세우기’를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이 추진한 역사 바로 세우기는 한 마디로 ‘부끄러운 역사 때려 부수기’였다. 그러나 진정으로 민족의 미래를 고민하는 지도자라면 한번쯤은 ‘바람직한 역사 바로 세우기’도 추진해야 하는 것 아닌가.

독도 영유권 문제와 관련해 한국 사회가 간과하고 있는 것은 ‘독도 역사 바로 세우기’다. 광복 직후 독도를 지키기 위해 헌신한 선배들의 업적을 기리고 그들의 유적을 복원하는 노력을 펼쳐야 하는데, 유감스럽게도 여기에는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있는 것.

광복 후 네 차례 영유권 굳히기

광복 후 우리가 독도 영유권을 분명히 한 사건은 네 차례로 정리된다. 미군정 치하의 47년 6월17일 최희송 경북도지사는 과도정부의 안재홍 민정장관에게 “일본에서는 독도가 일본인 개인 소유의 섬으로 돼 있다. 그런 탓에 일본은 우리 어민의 조업을 금지하고, 국적 불명의 비행기가 날아와 독도에서 조업하던 우리 어민에게 기총소사를 한 일이 있다”며 “차제에 독도 영유권을 확실히 해달라”는 청원을 보냈다(국가기록원 문서 근거).



그러나 미군정 아래의 과도정부는 이렇다 할 행정력이 없어 유력 집안 자제들로 구성된 조선산악회에 도움을 청했다. 조선산악회 회장이었던 송석하 씨는 당대 최고의 갑부인 데다 애국자로 꼽혔으므로, 독도 영유권을 굳히는 행사를 펼칠 여력이 있다고 본 것이었다.

조선산악회는 곧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대를 구성하고 과도정부에서 나온 신석호·이봉수 씨와 함께 해안경비대의 대전호를 타고 울릉도에 들어가 성인봉 등을 탐험했다. 그리고 8월20일 독도 동도에 들어가 조사를 하고 ‘朝鮮 慶尙北道 鬱陵島 南面 獨島(조선 경상북도 울릉도 남면 독도)’라는 푯말을 설치했는데, 이는 광복 이후 한국이 독도에 설치한 최초의 영토 표지다.

51년 내무부가 작성한 문서에는 이 푯말이 있는 것으로 기록돼 있으나, 이후 문서에서는 이 푯말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표지를 봤다는 목격담도 찾을 수 없는 것으로 봐 사람들이 모르는 새 푯말이 유실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독도 역사 바로 세우기 모른 체할 텐가

독도의용수비대장 홍순칠 씨 동상의 본을 떠주겠다고 한 이두식 홍익대 미대학장.

한 달여 뒤인 9월16일 연합국 최고사령부는 지령(SCAPIN) 제1778호를 통해 독도를 미군의 사격연습장으로 지정하였다. 그리고 1년여가 지난 48년 6월8일 울릉도와 강원도의 어민들이 독도에 들어가 조업을 하고 있는데 오키나와에서 날아온 미 5공군 소속 B-29 폭격기 10여 대가 폭탄을 투하하고 기총을 쏴 14명을 숨지게 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여론은 크게 분노했으나 역시 미군정기인 탓에 과도정부는 이렇다 할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그리고 2년이 지난 50년 6월8일에야 조재천 제2대 경북도지사가 독도에 들어가 위령제를 올리고 친필로 쓴 ‘獨島遭難漁民慰靈碑(독도조난어민위령비)’를 세웠다.

2003년 태풍 후 기단부 찾아내

조 도지사는 희생자의 넋을 기리고 독도 영유권을 분명히 하기 위해 이런 행사를 한 것이다. 이는 경북도가 내무부와 외무부 등에 보낸 공문에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고 독도 영유권을 분명히 하기 위해 이 비를 세운다’는 내용이 도처에 나와 있는 사실로 뒷받침된다.

52년 4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되면서 일본은 미군정을 벗어나 독자적인 자치에 들어갔다. 그리고 바로 독도 영유권을 주장했는데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되기 전 이승만 대통령은 평화선을 선포해 독도 영유권을 더욱 확실히 했으므로, 52년 내내 한국과 일본은 치열한 외교전을 펼쳤다.

이듬해 봄 일본은 ‘말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한 듯 실력행사에 들어갔다. 수산청과 경찰청, 법무성 공무원 등을 독도로 보내 조업을 하고 있던 우리 어민을 내쫓고 ‘島根縣隱地郡五箇村竹島(시마네켄 오치군 고카무라 다케시마)’라는 푯말을 세운 것이다.

쫓겨나온 어민들은 이들이 돌아간 뒤 독도에 들어가 이 푯말을 뽑아들고 울릉군청과 울릉경찰서로 달려가 “일본인 때문에 못살겠다. 안전조업을 보장하라”는 시위를 벌였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국회는 조선산악회의 후신인 한국산악회에 독도 영유권을 굳히는 행사를 부탁했다.

그해 10월15일 한국산악회는 독도에 들어가 다케시마 푯말을 뽑고 독도 표석을 세웠다. 그러나 일주일 후인 10월22일 일본 해상보안청 요원들이 독도에 들어와 이 표석을 뽑고 네 번째로 다케시마 말뚝을 박았다(당시 일본 아사히신문 보도 근거). 이 말뚝 박기 전쟁은 54년 4월 홍순칠 씨를 중심으로 한 울릉도 청년들이 의용수비대를 구성해 독도에 들어감으로써 막을 내리고 독도에 대한 한국의 실효 지배가 시작되었다.

홍순칠 씨의 아내이자 의용수비대원으로 활동했던 박영희 여사에 따르면, 당시 독도에 들어간 의용수비대원들은 한국산악회가 설치했던 독도 표석이 바다 속에 가라앉아 있는 것을 보았으나 이를 건져올리지는 않았다고 한다. 또 다른 독도의용수비대원이었던 서기종 씨는 조재천 도지사가 만든 위령비는 1959년 사라 태풍이 몰아친 후 유실되었다고 말했다.

이들의 기억이 맞다면 한국산악회의 표석과 독도조난어민위령비는 독도 주변 바닷속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독도 주변 바다를 탐색해 이를 복원해내야 하는 것 아닌가.

54년 독도에 들어간 의용수비대는 그해 8월 동도에 초사(막사)를 짓고 ‘慶尙北道 鬱陵郡 南面 獨島’라고 새긴 비석을 세웠다. 그런데 그 후 태풍으로 이 비석이 쓰러지면서 기단부와 비석부가 분리되었다(시기 불명). 그러자 관계자들은 비석부만 찾아내 콘크리트로 기단을 만들고 다시 세워놓았다. 임시로 복원해놓은 것.

2003년 한반도는 태풍 매미로 인해 큰 해를 입었다. 그 직후 독도를 방문한 한송본·김점구 씨 등은 동도의 자갈해안에서 우연히 이 비석의 기단부를 찾아냈다. 그러나 관계 당국은 아직도 둘을 연결시키지 않고 있다.

최근 정부는 NSC 주도로 독도 영유권 등을 분명히 하기 위해 ‘바른 역사 기획단’을 만들었다. 독도 지키기에 앞장서온 사람들은 “독도 영유권을 지키려면 독도 영유권이 가장 위태롭던 시기, 우리 선배들이 독도 영유권을 분명히 하기 위해 설치한 유물부터 바로 세워야 하는 것 아니냐”고 강조한다.





주간동아 2005.05.03 483호 (p46~47)

이정훈 기자 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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