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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봉이 만난 영화, 영화인|‘가능한 변화들’ 민병국 감독

“모호한 인생…변화의 통로를 찾아서”

“모호한 인생…변화의 통로를 찾아서”

“모호한 인생…변화의 통로를 찾아서”

‘가능한 변화들’의 주인공 문호와 종규는 민병국 감독 자신의 캐릭터를 나눠갖고 있다.

배창호 감독이 ‘꼬방동네 사람들’로 감독 데뷔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왜 명문 대학 나와 대기업의 전망 좋은 부서에서 일하다가 사표를 던지고 고작 영화판으로 들어왔을까’ 의아해했다. 물론 그때보다 영화의 ‘신분이 상승’해 똑같은 격의 질문을 던질 수는 없지만, 나는 민병국 감독을 만났을 때 가장 먼저 “왜 영화를 만들 생각을 했느냐”고 물었다. 그를 배 감독과 비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성균관대 경영학과를 나와서 현대종합상사를 다니며 무역업무를 보다 갑자기 사표를 내고 영화판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제2의 배창호 감독이 나왔다고 호들갑을 떠는 것은 아니다. 민 감독은 배 감독의 데뷔 당시보다 훨씬 덜 상업적이고 색깔도 다르다. 그러나 외환위기로 인한 구조 조정기도 아니고 거품경제로 한창 잘나가던 1995년, 나이 서른넷의, 결혼해 가정도 있는 남자가 갑자기 사표를 내고 영화판으로 들어온 것은 여러모로 이상한 일임이 틀림없다. 그렇다고 대학 때 영화 동아리에서 마약 같은 영화의 맛을 보았던 것도 아니다.

대기업 다니다 충동적으로 영화판에 뛰어들어

민 감독은 그동안 직장 생활을 해서 모은 돈으로 2년만 버텨보자 생각하고 아내의 동의를 구했다. 쉽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결사반대하지도 않았다. 다만 기간이 생각보다 길어졌을 뿐이다. 그는 사표를 던지고 나온 다음 해 16mm 영화동호회인 ‘필름인’에 들어가서 처음 영화를 배우기 시작한다. 그리고 99년도부터 시나리오를 썼다. 그의 2001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나리오 ‘가능한 변화들’은 그렇게 탄생되었다.

그가 갑자기 영화를 한다고 하자 주위 사람들은 ‘걱정 반 호기심 반’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특별한 동기가 있었느냐는 상투적 질문에 그는 무표정하게, ‘충동적으로 그랬다’고 대답했다.



“특별한 계기는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참 무모했었구나 하고 생각되지만, 그때 당시는 그게 무모한 것인지조차도 몰랐다.” 그는 영화 쪽에서 일한다는 것에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는다. 직장 생활하면서 할 수도 있는 거고, 영화 하다가 다른 일 한다고 그만둘 수도 있는 거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다. 나는 그의 이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영화에 목숨 걸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쉽게 결심이 바뀌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대기업에 다닐 때보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것은 사실이지만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보다 더 편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영화 쪽과는 전혀 관계없이 30여년을 살아왔다. 주변 사람들은 다 평범한 사람들이다. 경제적으로 어려워도 지금 내가 훨씬 운 좋게 사는 것 아니겠는가. 나는 영화를 하는 일이 재미있고 만족스럽다. 먹고살기 위해 살아가시는 분들을 보면 부끄럽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일간지 신춘문예 당선 당시 심사위원은 이창동 감독과 이광모 감독. 그들은 심사평에서 ‘세속적 가치의 허구를 적나라하게 까발리고 있는 작품’이라고 평했다. 영화화를 꿈꾸던 그는 주변에서 어렵게 제작비를 조달해서 2003년 7월 중순부터 8월 말까지 50일 동안 23회차 촬영으로 영화를 찍는다. 그리고 완성된 영화를 프로듀서가 전주국제영화제 사무국으로 가져갔고, ‘가능한 변화들’은 2004년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었다.

“모호한 인생…변화의 통로를 찾아서”
작은 예술영화들이 생존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국제적 지명도를 획득하는 것이다. ‘가능한 변화들’은 지난 1년 동안 모스크바, 로카르노, 비엔나 국제영화제 등에 초청되었고, 도쿄 국제영화제에서는 최우수 아시아영화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영화진흥위원회의 예술영화 마케팅 지원기금 1억원이 없었다면 이 영화의 극장 개봉은 더 늦어졌을지 모른다.

‘가능한 변화들’은 두 친구의 현실과 환상에 관한 이야기다. 전업 작가를 꿈꾸는 유부남 소설가 문호(정찬 분)와 대학시절 갑자기 몸의 마비증세로 한쪽 팔,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 연구원 종규(김유석 분)의 일상과 환상이 펼쳐진다. 그들의 일상은 블루톤의 화면으로, 그들의 환상은 레드톤으로 펼쳐지지만 영화를 보는 데 그러한 구분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문호는 아내가 있지만 채팅을 통해 만난 윤정(윤지혜 분)과 섹스를 한다. 윤정 역시 유부남 지점장과 관계를 맺고 있지만 약혼자와 유학을 가려고 한다. 종규는 같은 연구실의 미스 김(옥지영 분)이 자신의 아이를 임신했지만 검사와 결혼한 첫사랑 수현(신소미 분)과 다시 만난다. 종규는 낙태 수술비를 문호에게 빌리는 처지지만 수현과 호텔에 들어갈 때는 스위트룸을 잡으려고 한다.

“세속적 가치의 허구를 까발리고 있는 작품”

이렇듯 속물적이며 위선적인 두 남자를 중심으로 등장인물들은 모두 성적 욕망에 시달린다. 그들의 욕망은 이중적이다. 대부분 복수의 성적 파트너와 관계를 맺고 있는데, 육체적 욕망을 해결하는 대상과 정신적 합일을 꿈꾸는 대상으로 분리되어 있다. 그러나 경계는 모호하다. 모호함이야말로 ‘가능한 변화들’을 내적으로, 외적으로 드러내는 가장 큰 특징이다. 2대 1 섹스를 비롯해서 대담한 섹스신이 자주 등장하지만, 그것은 자극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슬프고 처량하기까지 하다.

-영화계에는 전주국제영화제 민병록 집행위원장이 있고, ‘유령’을 찍은 민병천 감독이 있으며, ‘벌이 날다’의 민병훈 감독이 있다. 그런데 비슷한 이름을 가진 민병국 감독이 등장했다. 이름 때문에 사람들이 혼동하는 경우는 없는가?

“아직 영화가 개봉되지 않아서 그런지, 현재까지는 없다.”

“모호한 인생…변화의 통로를 찾아서”

민 감독은 데뷔작 ‘가능한 변화들’로 도쿄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 아시아영화상을 받았다.

-각본, 감독을 맡은 사람으로서 영화에 대해 설명한다면?

“ ‘가능한 변화들’은 모호함에 대한 영화다. 내용도, 형식도, 영화적 장치도 극단적으로 모호하게 가져가려고 작정했다. 사람들의 행동이나 살아가는 방식을 조롱하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인간의 관계도 기본적인 영화구성 요소로서 필요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영화의 지향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오랜 세월 동안 살아오는 과정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지난 삶이 후회스럽기도 하겠지만 보통은 잘 잊어버리고 살아왔던 것, 그러면서도 변하지 못했던 것, 그런 것을 바꿔볼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모색하는 것이다. 지독한 연애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극단적으로 죽음을 통해서 시도할 수도 있다.”

차기작 디지털리즘·아동 가족영화 준비 중

-영화를 만들고 난 뒤, 감독 스스로의 삶은 ‘가능한 변화들’을 발견했는가?

“이렇게 영화를 하나 만들고 운이 좋아서 다음에 또 작업할 수 있다면, 스스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나 영화를 만드는 것에 대해서나 조금씩 나아질 거라는 바람은 있다.”

-종규를 장애인으로 설정한 이유에 정신적 장애와 육체적 장애를 선명하게 보여주기 위한 의도도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이다. 그런 것도 있고, 또 우리가 장애인을 보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그들이 오히려 비장애인보다 극단적으로 욕망에 시달릴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주인공인 문호나 종규를 비롯해서 그들의 성적 파트너들 모두 이중적이다. 1대 1 성관계를 맺는 사람은 문호의 아내 정도에 불과하다.

“인물에 대해 혐오하는 마음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실제 현실이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묘사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잘 극복하지 못하는 부분이 몇 가지 있겠지만, 그중에서 가장 큰 것이 성욕이 아닌가 생각한다. 성적인 욕망은 적당히 극복해나가기가 매우 어려운 문제다. 그것 때문에 사람들이 겪게 되는 고통은 무척 상투적이면서도 반복적이고 지속적이어서, 그것이 보편적으로 사람들에게 쉽게 와 닿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2대 1 섹스를 비롯해서 섹스신이 자주 등장한다. 등장인물 대부분이 복수의 성적 파트너를 갖고 있는 것은 너무 작위적이지 않은가.

“살인사건의 90%는 치정에 얽힌 살인이다. 그리고 그중 90%는 남자가 여자를 죽이거나 그 정부를 죽이는 것이다. 지금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규장각에 있는 재판기록을 봐도 그렇다. 성적인 욕망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수백 년 동안 인간의 삶에서 반복되는 것이다. 우리의 현실에서 차지하는 성적 욕망의 비중이 가장 압도적이다. 심각한 문제다.”

-스타일 면에서 홍상수나 김기덕 감독과 유사한 듯하면서도 다르다. 일상에 대한 세부묘사가 부족한 대신, 환상을 자극하는 힘이 있다.

“영화를 만들 때 사전에 계산하지 않는다. 관객들이 이 영화를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하는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영화를 만들었다. ‘그 장면은 이렇게 만들면 좋겠다’는 내 개인적 판단 아래서 전적으로 영화가 완성되었다. 영화를 만드는 것 이외에 살아가는 방식에서도 마찬가지다. 여자와 연애하는 방식이라든가, 일상을 살아가면서도 그렇게 한다. 그런 스타일이 나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감독이 망설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더 극단적으로 밀어붙일 수도 있었을 텐데, 주춤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야기를 조금 끌고 가다 보면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든다. 어느 선에서는 더 가기 싫어서 슬쩍 발을 뺀다. 너무 상업적인 계산을 하지 않아서 그런지 배급하는 사람들은 장삿거리를 못 만들었다고 말한다. 배우가 유명하지도 않고, 감정이 올라가려면 내려가고, 내려가는 것도 김기덕처럼 극단적으로 가는 것도 아니고, 이러려다 말고 저러려다 말고. 그러나 그게 나다.”

-다음 계획은?

“디지털 영화를 준비하고 있다. ‘디지털의 목표’라는 디지털리즘에 관한 영화다. 지난 2~3년 사이에 우리 사회는 빠른 속도로 디지털화되어 가고 있다. 그것 때문에 사람들의 살아가는 방식이 큰 영향을 받고 있는데 디지털 문명에 대해서 받아들이는 게 피상적이다. 환상 같은 것도 가지고 있고. 그런 것들을 영화적 사건을 통해서 보여주면서 디지털리즘이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 왜곡되게 받아들이는 디지털리즘은 어떤 것인지. 목표가 되는 디지털리즘은 어떻게 펼쳐지는지 그런 것을 말하고 싶다. 또 하나는 아동 가족영화를 준비하고 있는데 상업적인 영화가 될 것 같다.”

민병국 감독이 준비하고 있다는 ‘디지털의 목표’ 역시 그의 설명을 들으면 알겠지만, 철저하게 비상업적이다. 나는 이런 감독이 꾸준히 생존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공공적 차원에서 유익한 일이라고 믿는다. 강제규나 강우석 감독 같은 상업영화를 만드는 감독들도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비상업적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지는 못하지만 독특한 개성을 가진 감독들이 활동할 수 있어야만 한국 영화의 토대가 튼튼해지고 다양해질 수 있다. 이것을 냉엄한 시장경제에만 맡기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다. ‘가능한 변화들’은 변화를 꿈꾸는 개인들에게, 그리고 한국 영화에 모두 그것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주간동아 2005.03.15 476호 (p5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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