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75

2005.03.08

재일교포 애국 자본 한국에서 북한으로

60~70년 對韓 제조업 투자 활발 … 요즘 3, 4세들 북한 생산기지 건설 시선 돌려

  • 강지남 기자 layra@donga.com

    입력2005-03-03 14: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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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일교포 애국 자본 한국에서 북한으로

    재일교포 자본으로 설립된 대표적 기업인 신한은행(왼쪽)과 롯데 사옥 전경.

    제주 감귤나무는 ‘대학나무’로 불린다. 가난했던 시절, 서너 그루만 심으면 자식 대학 공부까지 시킬 수 있다고 해서 붙은 애칭이다. 제주가 감귤 재배를 시작한 것은 1960년대 후반부터. 제주 출신의 재일교포들이 일본에서 고향 땅으로 감귤 묘목을 조금씩 가져다주면서 감귤 재배가 제주도 전역으로 확산됐다. 지금은 제주 경지면적의 38%(2만2048ha), 전체 농가의 82%(3만1000여 농가)가 감귤을 재배해 연간 5000억원의 소득을 올릴 정도로 감귤은 제주의 대표 생산물로 자리잡았다.

    65년 한일협정을 맺으면서 일본 정부로부터 받은 5억 달러의 청구권은 우리나라 경제성장의 밑거름이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한일국교 정상화 이후 재일교포들이 고국을 왕래하며 가져온 ‘엔화’는 청구권 이상으로 우리나라 경제성장의 원동력이 됐다. 제주 감귤은 재일교포가 고향 땅에 가져다준 경제성장의 씨앗들 중 가장 화려한 꽃을 피운 사례라 할 수 있다. 국내로 유입된 재일교포의 전체 투자 액수는 정확한 수치로 산출하기 어렵다. 다만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이하 민단)을 통한 투자 액수만 해도 대략 3조2600억원으로 추산된다.

    65년부터 시작된 40년 동안의 재일교포의 본국 투자 형태는 네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친척방문 투자(65∼80년) △제조업 투자(65∼88년) △서비스업 투자(88∼2000년) △첨단산업 투자(2000년∼)가 그것이다.

    “아버지 세대에게 일본은 영원히 살 땅이 아니었다. 누구든 돈을 벌어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65년 이후 고국 방문이 자유로워지면서 고향 갈 때마다 다들 최소 2000달러씩 호주머니에 넣어갔다. 조카들 용돈 나눠주고, 소 사주고, 집 고쳐주면 금세 없어졌다.”

    41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재일교포 2세 신해일 재일한국인본국투자협회(이하 투자협회) 부회장은 60년대를 이렇게 회상한다. 60년대 농촌 마을은 일본에 거주하는 친척들이 가져오는 ‘보따리’에 경제적으로 많은 부분을 의지했다. 이들은 고향 마을에 도로나 전기, 전화 시설을 놓아주거나 마을회관이나 학교를 건립해주는 등 고향 마을의 발전에 이바지했다.



    대표적인 지역으로 꼽을 수 있는 곳이 제주도다. 전체 재일교포 65여만명 중 12만여명이 제주 출신으로 추산될 정도로 제주인 재일교포가 많은데, 제주도청에 따르면 해방 후부터 99년까지 재일교포가 고향에 보내온 ‘공식’ 성금만 해도 278억원에 이른다. 이는 물론 단순 합계액으로 현재 화폐가치로 환산한다면 규모는 훨씬 커진다. 제주도청 유종성 재외도민계장은 “도로, 전기, 전화, 마을회관, 학교 등 재일교포들이 지어준 시설이 없는 마을이 없을 정도”라고 말했다.

    재일교포 애국 자본 한국에서 북한으로

    재일교포 1세 서갑호 회장이 세운 방림방적 공장.

    한일국교정상화 이후부터는 재일교포 상공인들의 국내 진출이 급속도로 확산됐다. 제조업 분야에 대한 투자가 활발하게 이뤄져 일본의 선진 기술 도입, 공장 설비 구축 등으로 인해 산업 전반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교포 1세대들의 애국심에서 발로한 투자란 측면도 있었지만, 싸고 질 좋은 노동력이 풍부하다는 점 등 한국 시장의 매력도 컸다. 이들 대다수는 한국에서 생산한 제품을 일본에서 판매하는 식으로 한국을 ‘생산기지’로 적극 활용했다.

    정확한 수치 어려워 … 민단 통해서만 3조2600억원 투자

    제조업에 투자한 대표적 기업은 방림방적(현 ㈜방림)과 대한합성화학공업㈜. 일본 오사카 사카모토 방직의 서갑호 사장은 63년 100만 달러를 가지고 들어와 방림방적을 창립하고, 구미공업단지에 당시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방직공장을 세웠다. 대한합성화학공업㈜은 일본에서 유기화학공업㈜ 등 5개 기업을 운영하던 안재우 회장이 67년 설립한 회사로, 한국 화학공업의 기초를 다진 기업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업체 최영기 이사는 “안 회장은 일본에서 화학회사를 운영하면서 터득한 노하우, 마케팅, 기술, 일본인 직원을 데리고 들어왔을 뿐만 아니라 한국 종업원들을 일본에 파견해 기술 연수를 받도록 했다”고 회고했다.

    82년 신한은행 창립은 재일교포의 활발한 국내 투자 활동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주민등록증이 없는 재일 상공인들이 시중은행으로부터 단기 자금을 빌리는 일이 여간 어렵지 않았기 때문에, 좀더 사업을 원활하게 해줄 수 있는 은행 설립을 숙원해왔다. 투자협회를 중심으로 79년부터 시중은행 설립을 추진한 재일 상공인들은 전두환 당시 대통령으로부터 인가를 받아 자본금 250억원으로 신한은행을 창립했다. 지금도 신한은행의 주주인 신한금융지주회사의 지분 20%를 재일교포가 보유하고 있다. 신한금융지주회사 관계자는 “재일교포 주주들은 모두 소액 주주들로 이들이 가진 지분을 시가로 환산하면 대략 1조7000억원에 달한다”고 말했다.

    88년 서울올림픽을 전후한 시점에 이르자 한국은 더 이상 ‘값싼 생산기지’가 아니었다. 인건비가 급등하고 기술 발전이 진척되면서 재일교포의 국내 투자는 제조업에서 탈피해 호텔, 골프장, 빌딩 임대 등 서비스업으로 전환됐다. 이미 60년대에 신격호 회장이 롯데호텔을 설립한 바 있으나, 이 시기부터 서비스업에 대한 투자는 더욱 활발해졌다. 속리산관광호텔, 서울로얄호텔, 신라컨트리클럽, 한성컨트리클럽 등은 모두 재일교포가 투자한 업체들이다.

    재일교포 애국 자본 한국에서 북한으로

    방림방적이 1963년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방직공장을 세웠던 구미공업단지 전경.

    “생산시장보다 내수시장으로서 매력”

    그러나 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많은 수의 재일교포 사업체가 문을 닫았다. 재일 상공인의 본국 투자 유치와 경영정보 교류를 목적으로 74년 설립된 투자협회는 한동안 ‘개점휴업’ 상태가 됐다. 외환위기 직전 208개였던 회원사가 현재는 92개에 불과한데, 이는 재일 상공인들의 국내 투자가 뜸해진 탓이기도 하지만 외국 자본에 대한 장애가 없어 협회 가입 필요성을 못 느끼는 시장 환경 변화 때문이기도 하다.

    최근 들어서는 재일 상공인들의 국내 투자가 조금씩 활성화되고 있는 조짐이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투자환경개선팀 최창성 차장은 “재일교포들은 한국을 생산기지가 아닌 내수시장으로서 매력을 느끼고 있다”면서 “액정화면, 휴대전화, 반도체 등 우리가 이끌고 있는 산업계에서 부품이나 소재를 납품하기 위해 국내 진출한 사례가 많다”고 전했다.

    재일교포 애국 자본 한국에서 북한으로

    모국투자협회(재일 한국인 본국투자협회의 전신)의 회의 모습.

    60∼70년대 자본과 기술 유입 등 한국 경제발전의 견인차 구실을 했던 재일교포의 자본력은 통일시대 북한 경제발전에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에 대해 신해일 부회장은 “재일교포 3, 4세에게 1세처럼 애국심에서 발로한 투자를 요구하는 것은 무리”라고 전제하면서 “이들이 북한시장에 관심을 갖는 것은 일본과 가까우며, 언어소통이 가능하고, 노동력이 싸 생산기지로서 중국보다 우월하다는 판단 때문이다”고 말했다. 또 “재일교포 자본을 끌어들이길 원한다면 남북 당국은 이런 경제적 장점을 잘 살려주는 방향으로 재일교포의 관심을 불러일으켜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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