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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 무너지는 재일동포

동화정책 vs 동포정책 국적 선택 갈림길

한·일 재일교포 잡아당기기 경쟁 … 日 국적법 개정 후 태어난 사람들의 선택은

  • 이정훈 기자 hoon@donga.com

동화정책 vs 동포정책 국적 선택 갈림길

동화정책 vs 동포정책 국적 선택 갈림길

1947년 10월3일 오사카에서 열린 민단 설립 1주년 행사.

1월17일 정부가 한일협정 체결에 관한 문서를 공개하자 많은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 협정은 굴욕적이었다”고 비판했다. 한일합방부터 따지면 36년, 강화도조약(1876년)을 기점으로 하면 무려 70년간 일본 영향 아래 있었던 한국민으로서는 과거사를 털고 일본과 국교를 회복한 이 협정을 좋게 보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이 시각은 지극히 국내적이다. 재일교포 처지에서 본다면 이 협정은 만족스럽진 않지만, 그들의 숨통을 터준 매우 중요한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없었다면 민단은 지금처럼 총련을 압도하지 못했고, 재일교포의 경제활동과 그들의 대한(對韓) 투자도 가속화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 협정은 재일교포를 놓고 한국과 일본이 잡아당기기 경쟁에 들어가는, 당시엔 누구도 듣지 못한 날카로운 ‘출발신호’이기도 했다.

에서처럼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조선인) 수는 제2차 세계대전 때(1941년 12월8일~1945년 8월15일) 폭증했다가 일제가 패망하면서 급감했다. 240만명에 이르렀던 재일 조선인 중 무려 140만명이 해방과 함께 한반도로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본인과 결혼하는 등 갖가지 사연으로 90만명 이상이 일본에 남아 1세대 재일교포가 됐는데, 이중 약 28만명이 순차적으로 일본에 귀화했다. 그리고 6·25전쟁이 일어난 1950년 이후 대략 60여만명이 민단계와 총련계로 남게 되었다.

일제 시절 일본에 온 조선인은 법적으로는 일본인과 똑같은 ‘황국신민’이었으나, 실제로는 주로 3D 업종에 종사하는 하급신민 대우를 받았다. 그리고 일제가 패망하는 순간 잠시 ‘전승국인(戰勝國人)’ 대우를 받았다가 곧 패전으로 먹고살기 힘들어진 일본인으로부터 배급을 축내는 ‘군식구’ 대우를 받았다. 이 시기 다수의 일본인은 ‘군식구’의 90%를 차지한 재일 조선인을 밀어내기 위해 혈안이 됐는데, 이때 중요한 기준이 된 것이 호적이었다. 재일 조선인의 호적은 한반도에 있으니 일본에서 이들은 무호적자일 수밖에 없었다.

‘호적전쟁’으로 재일 조선인 일본 사회로 대거 흡수



그로 인해 일부 재일 조선인이 취적(就籍)신고를 함으로써 일본인이 됐다(귀화). 대표적인 사람이 역도산(본명 김신락)이었다. 역도산은 51년 2월19일 나가사키현 오무라시를 본적지로 삼아 모모타 미쓰히로(百田光浩)란 이름의 호적을 만들었다. ‘호적전쟁’은 먹고살기 힘들어진 일본인들이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는 재일 조선인들을 차별하기 위해 시작한 것이지만, 역도산 경우에서처럼 재일 조선인을 일본 사회로 강력히 빨아들이는 구실도 한 것이다.

재일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에 갈등이 커지자 49년 1월26일 일본 외무성은 ‘연합국과의 강화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재일 조선인의 국적은 일본이다’라는 해석을 내려, 재일 조선인 차별을 금하게 했다. 그러나 ‘해석상으로만’ 일본인이었기에 재일 조선인은 일본 공무원 사회는 물론이고 일반 기업체에도 진출할 수 없었다. 일본 여권을 받아 해외로 나갈 수도 없었고 그저 배급을 받아 겨우 입에 풀칠하는 문제만 해결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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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지방선거 참정권을 요구하는 민단원의 시위.

50년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으로 특수가 일어 일본 경제에 활력이 생기자, 야박했던 일본 인심이 다소 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52년 6월 샌프란시스코에서 강화협정을 맺자, 일본은 기다렸다는 듯이 ‘외국인등록법’을 공포하며 “이날부로 재일 조선인에게서는 일본 국적이 상실된다”고 선언했다. 이어 재일 조선인에게 외국인 등록을 할 것을 요구했는데, 이때 민단계는 한국을, 총련계는 조선을 기입하면서 재일동포 사회는 둘로 나뉘게 되었다.

당시 남북한은 일본과 수교하지 않았다(북한은 지금도 수교하지 않았다). 그러니 외국인 등록을 해도 여권이나 주민등록 같은 국적을 증명한 자료가 없어 여전히 해외로는 나가지 못했다. 어찌어찌해서 나갔더라도 다시는 일본에 돌아올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이런 가운데 한국에서 5·16정변으로 등장한 박정희 정부가 일본과 국교정상화를 위한 회담을 가속화하자 민단계 재일교포들이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당시 한국인들은 6·3한일회담반대운동을 통해 이 회담에 반대했지만, 국적 없이 살아온 재일 한국인들은 박정희 정부에 ‘이 회담을 조기 타결하라’는 요망서를 보내고, 협상지지 시위를 벌였다. 65년 6월 마침내 타결된 한일협정에는 ‘일본 정부는 재일 한국인들에게 25년짜리 영주권을 준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동포끼리 결혼보다 일본인과 혼인 비율 훨씬 높아

당시 재일교포 중에는 한국에 아내와 자녀를 두고 일본에 건너와 돈을 벌다가 눌러앉아 일본에서 만난 여성과 결혼해 자녀를 낳은 남성이 적지 않았다. 이들은 새로 얻은 아내와 자녀를 호적에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남성은 대개 한국에 있는 아내가 사망한 다음에야 호적을 정리할 수 있었는데 이 일을 민단이 대행해주었다. 이로써 한국적을 얻으려는 사람은 자동으로 민단원이 됨으로써, ‘회색’ 지대에 있던 사람들이 대거 찾아와 일약 민단은 2대 1의 비율로 총련을 누르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영주권은 5년짜리인데, 일본은 왜 협정영주권의 시한을 25년으로 인정해주었던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몇 가지 속설이 있는데, 다수설은 ‘당시 일본 정부는 25년이 지나면 재일교포들이 일본으로 귀화하거나 한국으로 돌아가 그 존재가 미미해질 것으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민단계에 협정영주권을 준 일본은 그 후 5년마다 갱신하는 일반영주권제를 도입해 총련계에도 영주권을 주게 되었다.

이 시기 일본은 부계(父系) 중심의 국적법을 갖고 있었다. 이 법에 따르면 한국적의 남성이 일본적 여성과 결혼해 낳은 자녀는 자동으로 한국적을 갖도록 돼 있었다. 그런데 80년대 들어 세계적으로 여권이 신장되면서 남녀차별을 금지하는 국제협정이 만들어졌다. 85년 그에 따라 일본은 ‘아버지와 어머니 중 어느 한 명을 일본인으로 하고 일본에서 태어난 아이의 국적은 일본으로 한다. 그리고 이 아이는 21세 때 일본 국적과 타 국적 중 어느 하나를 선택케 한다’는 쪽으로 국적법을 개정했다.

동화정책 vs 동포정책 국적 선택 갈림길
80년대 이후 재일교포 사회에서는 동포끼리의 결혼보다 일본인과의 혼인 비율이 월등히 높아졌다(80% 이상). 그런데 새로운 일본 국적법이 등장했으니, 한국적을 갖고 태어나는 2세들이 현저히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가운데 협정영주권의 만료 시한(91년)이 다가왔다. 이 문제를 놓고 한일 양국은 다시 협상을 벌여 협정영주권을 받은 재일교포에 한해서는 대대손손 영주를 허가한다는 합의를 도출해냈다(특별영주권).

이로써 재일동포는, 동포끼리만 혼인해 대대손손 재일교포 사회를 유지할 것이냐, 아니면 일본인과 결혼하여 한국적을 없앨 것이냐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민단 창립 60주년이 되는 내년은 신국적법 제정 직후 태어난 아이가 21세가 돼 국적을 선택하는 해가 된다. 과연 얼마나 많은 젊은이가 한국적을 선택할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 민단 측은 크게 자신 있어하지 않는다. 민단을 한국적을 가진 사람들 단체에서 한국계 사람 조직으로 변모시키려고 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주간동아 2005.03.08 475호 (p18~19)

이정훈 기자 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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