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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 무너지는 재일동포

“조센징도 싫다 쪽발이는 더 싫다”

정체성 고민 ‘민단’ 제3의 길 모색 … 민족단체 성격 유지하며 사회단체로 변모 추구

  • 도쿄=이정훈 기자 hoon@donga.com

“조센징도 싫다 쪽발이는 더 싫다”

“조센징도 싫다 쪽발이는 더 싫다”

영화 \'피와 뼈\'의 한 장면.

“선생님, 우리 같은 사람은 한국적을 갖고 있긴 하지만 한국에 가면 모든 것이 서툴고 어색합니다. 한국 사람들과는 공감할 수 있는 분야가 적어요. 이런 우리가 한국적을 가진 재일교포로 살아가는 게 좋겠습니까, 아니면 일본적을 취득하는 게 낫겠습니까?”

민단을 중심으로 한 재일동포 사회의 변화를 취재하기 위해 도쿄에 온 기자가 길 안내를 해주던 젊은 동포에게서 거꾸로 질문을 받았다.

“글쎄…. 당신이 남자로, 재일 한국인으로, 대학을 다닐 수 있는 중류 가정에서 태어나게 된 것은 당신이 선택한 것이 아니겠지. 하지만 그 조건이 이미 당신 운명의 95% 이상을 결정해놓은 것은 사실 아닌가. 그것을 팔자라고 해야 할지 운명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피할 수 없는 것만은 분명하오. 그렇다면 이미 주어진 운명을 놓고 ‘내 운명은 왜 이런가’ 탓하기보다는 어떻게 잘 운영해나갈지 고민하는 게 현명한 선택 아닌가.

한국적을 유지한다고만 해서 더 행복해질 리 없을 것이고, 일본적을 취득한다고 해서 성공이 보장돼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비교하기 힘든 문제를 놓고 고민하기보다는 빨리 적절한 결정을 내리고, 그 결정 위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고서 일관성 있게 살아가야 하는 것 아니오?”

취재 초입부터 재일 한국인 사회가 흔들리고 있는 게 느껴졌다. 일본의 행정기관에 외국인으로 등록할 때 올리는 일본식 이름인 ‘통명(通名)’을 쓰지 않고, 명함에도 한국의 본명을 쓴 뒤 이를 한국 발음으로 읽을 수 있도록 가타가나까지 써놓은 또 다른 민단 청년은 “한국 여성은 너무 거세서 결혼 상대자로 삼기 싫다”는 말을 던졌다.



일본 학교에서 일본 여학생을 겪으며 성장한 이들은 한국 여학생한테서 이질감을 느끼는 것이 분명했다. 일본에서 성장했지만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이질감을 느끼고, 조국을 찾아갔을 때도 또다시 문화적 이질감을 느끼는 이 현상을 또 다른 동포는 ‘조센징과 쪽발이’ 현상이 아니겠냐고 자조했다.

한국영사관이 입주해 있는 도쿄의 재일본대한민국민단 중앙본부 정몽주 사무총장 방 칠판에는 ‘광복 60년(8월15일), 한일국교 정상화 40년(6월22일), 을사조약 100년(11월17일), 모국사업 30년(총련계 동포 모국 방문, 9월11일), 망향제 30년(10월), 일본 최고재판소의 재일동포 지방참정권 용인 10년(2월29일), 고베 대지진 10년(1월17일)’이라는 메모가 적혀 있었다. 내년의 일이라 써놓진 않았지만 그 밑엔 더욱 중요한 메모가 이어져 있을 듯했다. ‘민단 창설 60주년(2006년 10월3일)’.

“조센징도 싫다 쪽발이는 더 싫다”

어린이 서울 잼버리에 참여한 민단 어린이들.

민단은 한국 국적을 갖고 일본에서 살아가는 재일 한국인의 집합체다. 이 단체는 제1번 강령을 ‘우리는 대한민국의 국시를 준수한다’라고 할 정도로 지극히 한국적이다. 이들은 총련과의 험한 싸움을 이겨냈을 뿐만 아니라, 주일 한국대사관을 비롯해 일본에 있는 10개 한국 공관 중 9개 공관의 터를 제공할 정도로 한국을 사랑해왔다.

그러나 이들은 한국인들이 비난의 목소리를 던진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당신네들은 대한민국 국민이라지만 병역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 한국 정부에 세금을 내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는 등의 비난이 있다는 것을.

1번 강령 “한국 국시 준수” … 한국 문화 더욱 강화

이러한 변화가 한국 일변도로 기울어 있던 민단을, 한국도 아니고 일본도 아닌 제3의 길로 향하게 하고 있다. 지금까지 민단은 한국적을 가진 재일동포의 연합체였지만, 앞으로는 귀화한 한국인을 포함한 한국계 단체가 되겠다는 것이다. 한국인과 한국계를 불문하고 일본으로부터 차별을 받으면 이에 대해 항의하는 사회단체가 되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시를 준수한다는 1번 강령을 수정할 의사는 없어 보인다. 민단은 오히려 한국 문화에 대한 의식의 고양을 강화한다는 생각이다. 이를 위해 청년회를 중심으로 1세대 민단원들이 어떻게 일본에 뿌리내렸는지를 취재해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두 번째로는 매년 여름방학 때마다 3, 4세 동포 어린이들을 한국에 데려가는 ‘어린이 서울 잼버리’ 행사를 열고 있다.

이 행사에는 일본 각지에서 일본 학교를 다니고 있는 민단계 어린이들이 참여한다. 그리고 일본 각지의 대학교를 다니는 청년들이 가이드로 참여한다. 이들은 서울의 각급 학교를 찾아가 함께 놀고 공부한다. 민단 아이들은 한국어를 전혀 못하고, 한국 학생들은 일본어를 전혀 몰라도 공감하는 게 있는지 금방 친해진다. 이어 놀이시설도 가보고, 한국 가정에서 자보기도 한다.

이 행사가 끝나면 아이들은 눈에 띄게 조국을 의식한다. 일본인들에게서 차별을 받아본 부모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학교에서 통명을 쓰지 않겠다. 본명을 쓰겠다”고 고집하는 등 확연한 민족의식을 갖게 된다. 민단은 이런 식으로 아이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 단체에서 한국계 단체로의 변화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왜 민단은 제3의 길로 들어선 것일까. 첫째 이유로는 김영삼 대통령 이후 한국 정부의 무관심을 든다. 군인 출신 대통령이 있을 때만 해도 남북 대결 때문에 한국은 민단을 적극적으로 잡아끌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냉전이 끝나고 남북관계가 호전되고 한국에서는 민주화가 정착되면서 한국 정부는 더 이상 민단을 적극적으로 유인하지 않았다. 민단으로서는 홀로서기를 모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조센징도 싫다 쪽발이는 더 싫다”

민단의 정몽주 사무총장.

두 번째로는 이들의 법적 지위 문제가 풀린 것이다. 재일교포들은 오랫동안 법적 근거 없이 일본에 살아왔다. 그러다 65년 한일협정이 체결되면서 한국적을 취득한 사람에 한해 일본 정부로부터 25년짜리 영주권을 받게 되었다(협정영주권). 한국적을 가져야만 영주권을 주었기 때문에 이 시기 재일동포 사회는 민단을 중심으로 강하게 뭉쳤고 한국 정부가 하는 일에도 적극 협조했다.

91년은 이 협정영주권이 만료되는 해였다. 이때 한일 양국은 다시 ‘일본 정부는 협정영주권자에 한해서는 자자손손 일본 영주를 허가한다’는 합의를 도출해냈다. 이로써 민단계 동포들은 일본에 영원히 거주할 수 있는 권리(특별영주권)를 확보하게 되었다.

민단은 오랫동안 ‘거류민단’으로 약칭돼왔다. 94년 민단은 일본을 계속해서 생활무대로 삼겠다는 단원들의 의지를 반영해, ‘일시적으로 거주한다’는 뜻을 갖고 있는 ‘거류’를 떼어내고 그냥 민단으로 결정했다. 91년의 한일 합의가 거류민단을 민단으로 변모케 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이 결정이, 민단원들에게 ‘영원히 일본 속 한국인으로 남을 것’인지를 묻는 질문이 되고 있다.

법적 문제가 풀린 뒤 민단은 민족단체 성격을 유지한 사회단체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민단원이 될 수 있는 자격을 한국적자는 물론이고 한국계 일본인도 포함하는 쪽으로 변화시켰다. 그리고 일본사회에서 이들의 권익을 지키는 운동을 점화시켰다.

대표적인 사례가 일본 최고재판소(대법원)로부터 지방선거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판결을 받아내고 이를 허용하는 법률을 만들라고 촉구하는 것. 그리고 91년엔 외국인 등록증에 지문을 찍지 않아도 된다는 결정도 받아냈다. 이러한 승리는 형식상으로는 일본인에게서 받아오던 차별을 종식시킨 것이기에, 민단은 더 이상 일본과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우기 힘들어졌다.

총련과의 힘겨웠던 싸움도 일방적인 승리로 귀결되었다. 그러니 민단은 변화를 맞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재일동포 사회의 소멸로 이어질지, 아니면 또 다른 길을 찾아낼지는 아직은 불분명하다. 분명한 것은 재일동포 청년들은 고민을 하고 있고, 한국인과 정부는 이 문제에 아무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주간동아 2005.03.08 475호 (p14~16)

도쿄=이정훈 기자 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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