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73

2005.02.22

유행 제조기 TV 드라마 ‘PPL의 힘’

  • 이인성/ 이화여대 의류직물학과 교수

    입력2005-02-18 10:22: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유행 제조기 TV 드라마 ‘PPL의 힘’

    드라마 ‘파리의 연인’과 ‘러브스토리 인 하버드’,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남녀 주인공들의 의상이 의류 시장과 마케팅에 큰 영향을 주었다.

    어느덧 ‘드라마 속 패션’이 ‘머스트 해브’(must have·꼭 구비해야 할 아이템) 트렌드로 자리잡고 있다. 물론 요즘 드라마들은 그 자체가 매우 트렌디하다. 특히 최고의 스폰서들과 스타일리스트들을 제공받는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액세서리 등이 유행의 첨단을 걸을 수밖에 없다.

    지난해 최고의 드라마로 50%의 시청률을 자랑했던 ‘파리의 연인’에서 김정은이 입고 나온 볼레로는 곧바로 온 백화점 매장에 깔렸고, 박신양의 클래식하면서도 기품 있던 슈트는 그가 광고 모델이던 브랜드의 매출을 엄청 뛰어오르게 했다고 한다. 이처럼 상품을 영화나 드라마의 소품으로 등장시켜 홍보하는 마케팅을 PPL(products in placement·간접광고)이라고 한다. PPL은 드라마나 영화에 사용되는 소품을 특정 회사의 제품으로 함으로써 회사로서는 브랜드 이미지를 높일 수 있고, 제작사 측에서는 제작에 들어가는 상품을 제공받을 수 있어 드라마나 영화의 질을 높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1982년 영화 ‘ET’에 M&M 초콜릿이 등장하면서 PPL 역사는 시작되었고, 이때 M&M은 65%의 매출 신장이라는 예상을 뛰어넘는 성과를 거두었다. ‘용사마 열풍’을 불러일으킨 드라마 ‘겨울연가’에서 배용준이 탄 포드 자동차는 아시아 시장 판매 상승효과를 가져왔고, 삼성전자 휴대전화가 중화권에서 매출 신장을 기록한 바탕에도 몇몇 드라마의 PPL 광고가 주효했다는 것이 업계 분석이다. 하지만 PPL이 최근 지나치게 많이 등장하면서 ‘영화를 본 건지 상품 광고를 본 건지 모르겠다’는 비판을 낳기도 한다.

    이 같은 PPL 덕분에 우리의 드라마 속 주인공들의 의상은 날로 패셔너블해져 10대를 위한 잡지에서 여성지까지 그들의 옷이 화제를 모으며 ‘쭛쭛쭛식 핫 스타일’ ‘쭛쭛쭛 따라잡기’ 같은 제목이 패션 화보를 도배하고 있다.

    최근 최고의 인기 드라마였던 ‘미안하다, 사랑한다’와 ‘러브스토리 인 하버드’를 보자. ‘미사 폐인’이라는 말과 숱한 명대사를 유행시켰음은 물론 새로운 패션 아이콘으로 떠오른 임수정은 만화에서 금방 나온 듯한 깜찍하고 발랄한 스타일의 ‘로맨틱 빈티지룩’을 보여준다. 폭신폭신한 느낌의 니트 풀오버, 두꺼운 코트 대신 귀여운 판초와 케이프로 깜찍한 이미지를 연출하였고, 롤업 진·미니 스커트에 어그부츠 등으로 올겨울의 초강력 패션 선풍을 일으켰다.



    그녀가 입고 나온 무지개 니트는 온 시장에 ‘짝퉁’을 만들어내며 유례없는 인기를 누렸다. 보헤미안풍의 폭탄머리에 헤어밴드를 두른 소지섭의 히피 스타일은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캐릭터를 만들면서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다.

    ‘러브스토리 인 하버드’는 시청률 면에서는 ‘미안하다, 사랑한다’에 조금 밀렸지만, 패션에서는 제목에 걸맞게 미국 동부 명문대 학생들이 입는 의상에서 유래된 ‘프레피룩(Preppy Look)’이라는 캠퍼스 복장으로 친근감 있게 다가왔다. 유행을 타지 않고 꾸준히 사랑을 받아오던 프레피룩은 하버드 로스쿨 신입생인 김래원이 심플한 화이트나 줄무늬 셔츠, 청바지나 면바지, 베이직한 컬러의 브이(V) 넥 니트나 카디건, 하버드 로고가 찍힌 티셔츠, 뿔테 안경 등으로 명문대생의 깔끔하면서도 엘리트다운 느낌을 주는 스타일을 보여줬고, 의대생 김태희 역시 지적이며 학구적인 이미지를 연출해 새로운 유행을 만들어냈다.

    이제 드라마는 내용뿐 아니라 주인공의 대사, 말투, 패션 스타일까지 화제를 만들어내면서 패션 피플들의 관심을 끌어모으고 있다. 올겨울 자유로운 ‘로맨틱 빈티지룩’을 선호하느냐, 지성미가 드러나는 고급스런 ‘프레피룩’을 선호하느냐는 드라마를 본 시청자의 선택이다.

    그러니 TV가 ‘바보상자’이고 대화의 단절을 가져오기에 ‘TV 안 보기 운동’을 하는 이 시점에서 나 같은 사람은 직업상 TV를 봐야 하는 좋은 핑곗거리가 생긴 셈이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