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73

2005.02.22

북한 ‘핵 실험’ 카드마저 꺼낼까

한-미, 핵 보유 발언 무시로 북 전략 타격 … 6자회담 표류 탓 한국 정부 입지 좁아져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입력2005-02-16 17: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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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은 이미 지난 2년간 핵무기를 갖고 있다고 여러 차례 밝힌 바 있기 때문에 특별히 새로울 것은 없다.”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으며 6자회담 참가를 무기한 중단하겠다”고 밝힌 북한 외무성의 2월10일자 성명이 설 연휴의 끝자락을 강타했으나, 한국과 미국은 북한의 핵무기 보유 선언에 대해 “새로울 게 없다”는 반응을 보이면서 무시하고 있다. 한-미 당국은 북한이 ‘레드라인’을 넘었는지에 대해서도 똑 부러진 견해를 내놓지 않는다.

    “북한은 6자회담 당사국들이 ‘큰일났다. 비싼 값 쳐서라도 빨리 포기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식의 위기의식을 갖고 있어야 북에 유리한 협상 환경이 조성될 수 있다고 보는 것 같다. 그러나 지난 2년간 아무도 북한 의도에 말려들지 않았다.”(정부 당국자)

    북한의 핵 보유 공식화는 6자회담 재개 분위기가 무르익는 가운데 나왔다. 6자회담 재개를 앞두고 답답한 쪽은 오히려 북한이었다. 6자회담은 북한을 제외한 나머지 회담 상대국들이 북한에 핵 포기를 요구하는 5대 1의 구도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가짜 유골 사태로 일본과의 관계는 최악이고, 2008년 베이징올림픽과 2010년 상하이엑스포를 계기로 도약하려는 중국 역시 동북아 안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에서 북한의 안정과 한반도의 비핵화라는 양대 목적을 놓고 고민하고 있다(상자기사 참조).

    그러나 북-미 양자대화를 원하는 북한으로선 ‘실리’를 위해서 어떤 식으로든 틀을 바꿔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북한이 원하는 실리는 미국으로부터의 체제 보장이다. 미국과 상호불가침조약을 체결해 체제를 유지한다는 것이 북한의 일관된 외교 전략으로, 북한은 클린턴 행정부 시절인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성사 후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을 불러들여 화해 분위기를 연출하는 등 북-미 관계 정상화라는 당면 목표에서 가시적 성과를 눈앞에 두기도 했다.



    미국과의 직접 대화로 판갈이 노려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미국에 의해 ‘악의 축’으로 지목되고, 2차 북핵위기가 발생하면서 북한의 전략은 여의치 않게 된다. 고려대 현인택 교수는 “북한은 수세적 대응보다 공세적 대응이 과거의 예로 보아서 이러한 난국 타개에 훨씬 효과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했다. 또 다른 북한 전문가는 “‘악의 축’으로 지목된 이라크가 미군의 군홧발에 짓밟히는 모습에 김정일 정권 역시 불안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며 “북-미 직접 대화는 위기의 북한으로서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전방위 공격을 받을 게 뻔한 6자회담 대신 미국과의 직접 대화로 판갈이를 노리고 6자회담의 무기한 중단을 선언했다고 보고 있다. 6자회담 중단이 성명의 ‘핵심’이고, 핵무기 보유 선언은 협상력을 높이기 위한 ‘장치’로서 ‘리비아식 해법(북한이 고농축우라늄을 포함한 모든 핵 프로그램을 자진신고하고 `의심되는 시설을 언제 어디서든 사찰할 수 있게 하는 것)’을 받아들이라고 미 부시행정부를 향해 펀치를 날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이러한 ‘벼랑끝 전술’이 먹힐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북한은 미국이 심각하게 받아들여주기를 기대하는 듯하지만, 미국은 “예전에 들었던 말”이라며 깎아내린다. 스콧 매클렐런 백악관 대변인을 비롯해 곤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 도널드 럼즈펠드 미 국방장관 등은 모두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미국과 북한은 전쟁 직전 상태까지 먼저 굽히고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미국이 2차 북핵위기 이후 취해온 태도는 ‘해결 노력’이라기보다 ‘관리’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대화는 하되, 협상은 하지 않으며 테러와의 전쟁 일환인 이라크전쟁에 총력을 기울인 것이다. 6자회담 역시 ‘해결’보다는 ‘관리’에 초점을 맞춰 진행돼온 측면이 적지 않다.

    북한의 핵 보유 선언 후 미국의 대응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특정 단계까지 의도적 무시를 계속하거나 대량살상무기확산방지구상(PSI·북한을 출입하는 선박을 해상에서 강제로 정지시켜 선박 내부를 검색하는 해상 봉쇄전략)을 발동해 북한을 압박하는 방법, 북핵 시설을 부수는 정밀 공습(Surgical Strike)에 나서거나 북핵을 유엔 안보리에 회부하는 것이다.

    정밀 공습은 현재로선 가능성이 가장 낮은 카드다. 유엔 안보리 회부도 상임이사국의 동의가 있어야 하는데 중국과 러시아의 찬성 여부가 불투명하다. 대신 특정 단계까지 의도적으로 무시하면서 시기를 조율해 PSI 발동을 선택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다. PSI의 발동은 미국의 단독의지로 가능하고, 이를 위한 네트워크가 완벽하게 준비돼 있다. 미국은 일본 해상에서 20개 국가가 참여하는 연습을 여러 차례 시도한 바 있다.

    반면, 핵 보유 선언이 먹혀들지 않을 경우 북한이 쓸 수 있는 카드는 제한적이다.

    통상 핵을 보유하고 있는 국가는 2개의 문턱을 넘는다. ‘기술적 문턱’과 ‘정치적 문턱’이다. 기술적 문턱은 핵을 만들어놓고 공개하지 않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이에 해당한다. 국제사회에서 문제를 제기하면 증거를 대라고 반박하면서 핵 보유 냄새를 풍기며 안보적 경제적 효과를 노린다. 이를 핵 모호성 전략이라고 한다.

    북한은 핵 보유 선언을 통해 모호성 전략을 버리고 핵 보유를 선언했다. 정치적 문턱의 초입에 들어선 것. 국제사회 핵 보유 제재를 감수하면서 핵을 가졌으니 함부로 다루지 말라고 압박 전략을 구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이 정치적 문턱을 성공적으로 넘어설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핵무기를 개발하려면 핵물질인 우라늄이나 플루토늄의 확보, 이를 폭파하는 고폭장치 개발, 최종 핵 실험을 통한 ‘확인’이 필요하다. 북한은 94년 제네바합의 이전에 이미 고폭실험을 한 것으로 파악됐다. 북한이 가진 마지막 카드는 ‘핵실험’이다. 핵실험 이후엔 북한의 핵 보유를 기정사실화하지 않을 수 없다. 적극적인 제재가 불가피해지는 것. 북한의 마지막 카드인 핵실험은 파국을 부를 수밖에 없다.

    한국은 그동안 미국의 ‘의도적 무시’와 ‘6자회담’에 정책 기조를 맞추면서도 ‘나름의 해법’을 찾고자 노력했다. “중단된 남-북 당국대화를 6자회담과 병행해 추진하겠다”고 말한 정부의 의도는 ‘남북 당국대화’가 바로 북핵 문제의 두 주역인 미국과 북한의 틈바구니에서 한국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한국 주도의 해법’이라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지난해 11월 칠레 산티아고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부시 미 대통령과 “6자회담 재개만이 해법”이라고 한목소리를 내면서 무게 추는 6자회담 쪽으로 기울었다.

    그럼에도 6자회담과는 별도로 직접 대화를 통해 중단된 남-북 간의 관계 개선에 나서야 한다는 통일부 중심의 견해 역시 ‘죽은 카드’는 아니다. 한국 처지에서는 북핵 문제 해결 이후를 고려할 때 남-북 대화를 통해 북핵 문제 해결과 한반도 평화의 주도권을 쥐자는 카드를 버려둘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이 원하는 것은 한반도가 한국 주도로 통일되는 것이 아니라, 북핵을 제거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한국이 관전자로 머무르는 것은 통일을 요원하게 만들 수 있다.

    한국 정부 ‘고수’와 ‘변화’의 갈림길

    “앞으로 북한 주민을 놓고 한국, 미국, 중국 사이에 경쟁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 현재로선 우리가 승산이 있다고 볼 수 있지만, 북한이 중국을 선택하거나(친중 정권) 미국 주도의 정권이 들어설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정부 당국자)

    그러나 대미 설득에 공을 들이는 동시에 북한을 자극하지 않으려 노력해온 정부도 이번 북한의 성명으로 입지가 좁아지게 됐다. 남-북 회담 외엔 독자적인 구실을 찾기 어려운 상황에서 6자회담의 표류로 운신의 폭이 더욱 좁아든 것이다. 북한의 핵 보유 선언은 남-북 간 직접 대화의 가능성을 줄였을 뿐 아니라 결과적으로 잘못된 것으로 드러난 정부의 낙관론과 대북 정보망의 무력함을 탓하는 분위기도 적지 않다.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을 계승한 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은 표면적으로 포용과 민족화해가 우선 목표다. 북한 핵 문제도 그 맥락에서 접근해왔다. 안보 전문가들은 정부가 북한 핵을 평가절하하며 의도적으로 무시해온 것에 일리가 있다고 말하면서도 수위 조절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빠뜨리지 않는다. 북한 핵문제가 심각한데 관계 악화를 우려해 무한정 미소만 지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상당수 전문가들은 한국 정부가 ‘고수’와 ‘변화’의 갈림길에 서 있다고 본다. ‘고수’는 말 그대로 종전의 태도를 그대로 갖고 가는 것이다. 북한이 핵 보유 선언을 했더라도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평가절하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민족화해 스펙트럼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이 정책의 가장 큰 단점은 실패할 경우 대안이 없다는 점이다. 북한은 계속 위기를 고조시키는 전략을 펼 가능성이 높아, 정부는 북한 측 전략에 끌려다닐 공산이 크다.

    또 다른 대안은 지금부터 정책적 변화를 꾀하는 것이다. ‘레드라인’의 막바지에 이른 북한에 최후통첩을 하고, 국제사회가 PSI를 발동할 경우 소극적으로 참여한다.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한 문제 제기가 나올 경우에도 소극적으로 동참 의사를 비치는 것이다. 이러한 전략적 변화의 장점은 국제사회와 공조체제를 형성해 한미동맹에 도움이 된다는 점이다. 반대로 대북정책의 핵심인 민족화해 전략은 뒷걸음질칠 가능성이 높다.

    이와 관련해 한 안보 전문가는 제3의 길을 제안한다. 북한 핵 보유 선언과 관련해 현실적 사태의 심각성을 인정하는 대신 ‘액션’을 유보하는 것이다. 그런 한편으로 외교력을 동원해 핵 폐기 등과 관련해 북한 측에 가시적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다. 미국엔 “북한이 핵 보유를 선언했다고 우리의 민족화해 전략을 포기하란 말이냐”고 읍소하고, 북한에는 “당신들이 그런 선언을 했는데 우리가 어떻게 이런 중간적 또는 강경 태도를 안 취할 수 있느냐”고 설득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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