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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그 많던 비디오가게 “아! 옛날이여”

영상 소비 방식 바뀌며 급속한 사양길 … 자본과 노하우 갖추면 발전 가능성도 커

  • 김민경 기자 holden@donga.com

그 많던 비디오가게 “아! 옛날이여”

그 많던 비디오가게 “아! 옛날이여”

동네 골목길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비디오가게. 오늘날 한국 영화산업 르네상스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이젠 찾아보기도 쉽지 않다.

매주 주말이면 동네 비디오가게에 들러 밀렸던 영화들을 보는 것이 유일한 취미인 직장인 이정현씨(36). 그는 최근 여느 때처럼 금요일 밤 비디오가게에 갔다가 크게 낙심했다. 비디오가게 앞에 ‘폐업 특별판매 3개 1000원’이란 안내문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은 이씨 동네의 유일한 비디오가게. 한때 아파트 단지에만 5, 6개 있던 비디오가게가 1~2년 사이 하나씩 문을 닫더니 이제 완전히 사라졌다. 영화팬으로서 평소 ‘인터넷으로 불법 영화파일은 보지 않겠다’고 생각해온 이씨는 “이제 어쩔 수 없이 영화를 다운받아 볼 수밖에 없겠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폐업 전담하는 ‘찢기’ 업자 성업

어린이 만화 비디오 4000원, 일반 비디오는 말만 잘하면 1000원에 4개씩 파는 ‘폐업 특별판매’는 보름 동안 같은 가게에서 이뤄졌지만, 이상하게도 주인은 바뀌어 있었다.

이처럼 폐업한 비디오가게를 통째로 사서 일반 소비자들에게 덤핑 처리하는 일을 ‘찢기’라고 한다. 보통 일주일에서 보름 정도 가게에서 ‘특별판매’를 하는 조건으로 가게 주인에게 100여만원을 준다. 3~4년 전부터 비디오산업이 급속하게 위축되자 폐업을 전담하는 ‘찢기’ 업자들이 생겨났는데, 처음엔 문닫은 비디오가게의 물건들을 넘겨받아 개업하는 가게에 넘겼지만 요즘은 물건이 넘쳐나 일반인들에게 판매한다. ‘찢기’ 업자들은 대개 매장이 없이 전화 하나로만 옮겨다니고, 비디오 유통의 마지막 단계란 점 때문에 종종 ‘하이에나’로 비유된다.

한때 ‘찢기’를 했다는 한양유통의 진경화 사장은 “그나마 신작 비디오가 있을 때 한꺼번에 인수해준다. 구 프로는 산업쓰레기다. 요즘은 서민들도 돈이 없어서 덤핑 판매를 해도 사지 않는다”고 말한다.



한때 수백만 관객을 울리고 울렸으나 몇 달 만에 산업쓰레기가 된 비디오테이프는 운 좋으면 아프리카로 수출된다. 그곳에서 상영되기도 하고 녹화용으로 재활용되기도 한다.

비디오 대여 산업의 침체는 비디오방에서도 똑같이 나타난다. 서울 중곡동에서 DVD 비디오방을 운영하는 한 업자는 “청와대 앞에 비디오테이프를 쌓아놓고 불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라고 말했다.

“비디오가게보다 시설투자비가 컸기 때문에 어떻게든 버티려고 하고 있어요. 최대 대목인 성탄절 매출이 지난해 7분의 1로 떨어졌습니다. 이웃 비디오방들도 이제 아르바이트생을 내보내고 주인이 24시간을 지킵니다. 체력이 되는 때까지 해보자는 건데 다들 올해 2월을 넘기기 어려울 것 같아요.”

비디오 대여 사업 침체의 ‘원흉’으로 꼽히는 인터넷 불법복제에 대한 대책을 세워달라고 문화관광부를 찾은 것도 여러 차례였지만 담당부서에선 ‘예산 부족’을 들어 손을 놓고 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그 많던 비디오가게 “아! 옛날이여”

CJ가 운영하는 ‘홈 엔터테인먼트 스토어’ 개념의 비디오 DVD 대여점 CGV조이큐브.

돌아보면 비디오 산업이 한국 영화산업의 한 축인 때가 10년이 채 안 된다. 비디오 하나가 10만장씩 팔려 영화제작자가 비디오 판권 선급금을 ‘당겨’ 영화를 찍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한국 영화판 사람 중 비디오가게에서 살다시피 하지 않은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 몇몇은 직접 비디오가게를 운영하기도 했다. 영화 필자로, 영화 ‘7개의 시선’ 기획자로 유명한 이진숙씨는 아직도 안국동에서 ‘비디오카페’라는 가게를 한다.

그러나 이곳에선 이제 하이에나들도 배가 고프다. 한때 4만5000개에 이르던 가게들이 이제 6000곳을 헤아릴 뿐이다. 대박 영화 비디오테이프도 3만장 팔기가 쉽지 않다. 영화마니아들로 북적대던 대학로 ‘안방시청각’, 부암동 ‘바다비디오’도 사라졌다.

대표적인 프랜차이즈 비디오가게 브랜드인 ‘영화마을’과 ‘으뜸과 버금’ 가맹점 수 감소 폭이 그나마 완만한 정도이다. 가맹점 수 600개이던 ‘영화마을’은 500개로 줄었고 200개이던 ‘으뜸과 버금’은 150개로 줄었다.

서울 창신동에서 20년 넘게 비디오대여점을 운영해온 ‘으뜸과 버금’ 문주일 회장은 “한때 이 골목에만 17개의 비디오가게가 있었는데 2004년 봄 마지막 가게가 폐업해 이제 혼자 남았다”고 말했다.

“비디오가게가 급속히 늘어난 1996년 이후 IMF 시절, 제작사들이 테이프 판매 가격을 1만7900원에서 2만7500원으로 대폭 인상했습니다. 운영이 어려운 가게들이 많이 문을 닫고 여기서 나온 물건들을 가지고 새로 개업한 가게들이 대여료를 깎아주는 덤핑의 악순환이 시작됐습니다. 대여료가 200원까지 떨어지기도 했으니까요. DVD는 성장을 못하고 있는데 케이블TV와 인터넷이 크게 활성화된 것도 비디오가게를 어렵게 한 요인입니다.”

콘텐츠가 아닌 골동품 취급

그 역시 달라진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보다 많은 고객을 찾아나서야 했고 비디오 대여 외에 다른 수익을 내야만 했다. 그래서 임대료가 비싼 전철역 근처로 가게를 옮기고 도서 대여도 겸한다. 가게 문도 아침 10시부터 새벽 6시까지 연다. 이곳은 희귀 비디오가 많아 영화팬들은 물론이고 영화사, 방송사 관계자들이 일부러 찾는 곳으로 알려져 그나마 활성화돼 있다. 중3 때부터 드나들던 한 단골 손님은 방송사에 입사한 뒤 문 회장을 찾아와 “내 인생을 결정한 분”이라고 말하기도 했단다.

그 많던 비디오가게 “아! 옛날이여”

청계천에서 도매상을 운영하며 20곳 넘는 비디오점을 열고 닫았다는 김원식 대표.

“전에는 가게가 작아 고객들 취향을 하나하나 알았죠. 손님을 기다렸다 새 비디오를 추천해주기도 하고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영화 얘기도 했지요. 액션물만 보는 손님은 찍어두었다가 슬쩍 스릴러물을 주고, 다음엔 드라마, 예술영화를 주는 식으로 ‘영화 읽기’ 교육을 하기도 했죠. 지금은 더 많은 손님을 받아야 가게 세라도 낼 수 있으니 불가능해요.”

서울 청계천 9가 비디오 도매상들이 몰려 있던 곳도 크게 위축돼 지금은 겨우 10여곳이 명맥을 잇는다. 이곳에서 10년 동안 도매를 하며 20곳 넘는 비디오가게 문을 열었던 김원식, 문정희 사장 부부는 “요즘 비디오테이프는 누구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비디오 제작사에서도 비디오 대여점들은 신경 쓰지 않는다. 비디오가게가 문을 닫으면 업자들이 가져가는 건 책(만화책 등)뿐이다. 전에 비디오가게를 하며 자식 둘 키우고 대학생 셋을 아르바이트시켜 대학생 다섯 키운다는 뿌듯함도 있었는데 다 옛날 얘기”라고 말한다.

김원식씨 부부는 비디오테이프 수집가로 원본이 사라진 희귀 비디오도 많이 소장하고 있다. 나훈아가 주연한 ‘우정’이란 영화의 비디오테이프는 80만원을 호가하고 ‘별들의 고향’도 15만원 넘게 거래된다고 한다. 비디오테이프가 콘텐츠가 아니라 ‘골동품’이 된 것이다.

영화를 콘텐츠로 하는 비디오 대여업(때로 DVD 대여업을 포함)이 장기적인 전망에서 사양길에 접어들었다는 것은 업계 관련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영화진흥위원회 김혜준 사무국장은 “영화로는 비디오가게를 살릴 방법이 없다. 영상을 소비하는 방식 자체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인터넷이라는 강적이 있고 영화 개봉 편수도 줄고 있다. 비디오 콘텐츠를 만화나 교육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이에 따라 비디오 제작사들도 비상이 걸렸다.

2004년 12월 2만5000원 하던 영화 DVD(2장 세트) 가격을 1만4900원으로 내려 ‘해리포터3’를 출시한 워너브라더스 홈비디오 김정효 이사는 “ 해리포터3 가격 인하는 국내 비디오시장을 대여에서 직접 판매하는 ‘셀 스루(sell through)’로 옮기겠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워너의 정책은 다른 제작사들에게도 영향을 줄 것이다.

2000년에 시작한 DVD 시장은 2004년엔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비디오 시장은 이미 매년 20%씩 줄어들고 있다. 비디오 제작사로서는 ‘뭔 짓이라도 해봐야 하는 상황’이다. 결국 2004년 워너와 브에나 비스타 등 5개 메이저 제작사들이 연합해 소비자 성향 조사를 했는데 비디오가 DVD로 넘어가지 못하는 가장 큰 장애물이 가격이란 결론을 얻었다. 사실 미국과 국민소득을 비교하면 우리나라 DVD 가격은 너무 높게 책정돼 있다.

그 많던 비디오가게 “아! 옛날이여”

20년 동안 비디오점을 운영해온 문주일 ‘으뜸과 버금’ 회장.

“대형 할인점의 경우 해리포터2에 비하면 3편이 3배 이상 판매가 늘었다. 셀스루 시장의 가능성을 본 셈이다. 판매량은 늘어도 전체 매출액은 줄었다. 그러나 소비자들이 DVD를 살 수 있다는 인식을 갖게 해 전체 파이를 키워야 한다.”

또 다른 비디오 제작사 관계자는 “비디오가게들이 사라지는 건 당연하지 않은가. 영화와 극장, 케이블TV를 보라. 5~6년간의 변화가 숨가쁠 정도다. 멀티플렉스는 97년 4000만 관객을 2004년에 1억3000만명으로 키우지 않았나. 비디오가게만 전근대적 형태를 답습하고 있다”고 말했다.

영화제작사 ‘청어람’에서 판권을 담당하는 채상병 이사 역시 “영화가 벌어들이는 수익에서 비디오 판권(편당 약 1만5000원) 비율은 크게 줄었다. 그러나 스크린 수가 크게 늘어 극장 수입이 늘었고 케이블TV와 인터넷 VOD 판권료 수익이 새롭게 생겨났다”고 말한다.

프랜차이즈 비디오점들조차 POS 시스템을 갖추지 않고 ‘아르바이트생들이 인터넷을 많이 한다’며 컴퓨터를 쓰지 않는 비디오 가게들도 있다. 비디오 대여가 전체 영화산업에서 어느 정도 비중을 차지하는가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도 없다.

얼마 남지 않은 테이프 운명

이 같은 전근대성 때문에 오히려 비디오가게의 발전 가능성을 말하는 이들도 있다. 즉 구멍가게 스타일의 비디오가게는 더 이상 살아남을 수 없지만, 자본과 노하우를 갖고 현대화한 비디오가게는 오히려 성장 전망이 크다는 것이다.

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 정윤경 박사는 “비디오가 장기적으로 사양산업이긴 하지만, VOD 현실화에 난제가 많고 최근 인터넷 영화가 특정 장르로만 몰리는 경향을 보여 저작권이 엄격해지고 비디오가게가 근대화된다면 꽤 오랫동안 성장할 가능성이 있다. 미국의 비디오업체인 블록버스터나 일본의 CCC가 모델이다. 미국에서 비디오 수입이 영화가 벌어들이는 돈의 20%로 큰 비중을 차지한다. 한국 영화가 산업화한 것처럼 대자본이 투입되면 영세업체는 정리되는 과정을 밟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 많던 비디오가게 “아! 옛날이여”

전형적인 동네 비디오가게.

정 박사의 전망을 정확히 보여주는 것이 CJ가 2003년 6월에 시작한 CGV조이큐브다. CGV조이큐브는 비디오가게라기보다 비디오와 DVD를 빌려주는 ‘홈 엔터테인먼트 전문스토어’다. 일본 CCC를 모델로 했다. 분당, 일산, 목동 등에서 4개 직영 대여매장을 운영하는데 올해 5월부터 프랜차이즈로 확대할 계획이다. 프랜차이즈 비디오가게라도 2억5000만원은 투자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CGV조이큐브(일산)는 100평에 가까운 매장에 비디오와 DVD 대여와 판매점, 커피전문점, 미니편의점, 서점, 음반과 캐릭터 판매 등을 모두 갖춰 백화점을 옮겨놓은 듯한 쾌적한 분위기다. 비디오를 빌리면 ‘검은 비닐’ 대신 파란색 로고백에 넣어준다. 전 점이 POS로 연결돼 생선과 마찬가지로 신선도가 중요한 영화와 음반, 서적 재고를 관리한다.

송기선 CGV조이큐브 영업마케팅 실장은 “CJ에서 보면 영화 제작에서 극장, 대여업까지 수직계열화한다는 차원이 있다. CGV가 최초의 멀티플렉스로 극장의 개념을 완전히 바꿔놨듯이 조이큐브도 새로운 영화 대여점의 컨셉트를 보여줄 것이다. 조이큐브의 핵심은 데이터베이스에 의한 시스템을 갖고 있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조이큐브에선 인기 개봉작으로 최근 출시된 ‘스파이더맨’의 경우 비디오 25개, DVD 25개를 비치해놓았으며 ‘살인의 추억’은 분당점에서 비디오 100개를 비치했다. 비디오나 DVD가 없어서 그냥 가는 손님은 만들지 않겠다는 것이다.

조이큐브의 수익은 영화 대여가 50%, 기타 문화상품 판매가 50%로 비디오는 차지하는 공간에 비해 기여하는 바가 적은 편이다. 비디오대여점은 성장해도 산업 차원에서 비디오테이프의 운명은 얼마 남지 않은 듯하다.

한국 영화에 산업 자본이 들어와 근대화하면서 발전했듯이 콘텐츠의 한 ‘윈도’로 비디오가게도 현대화하는 것이 당연할지 모른다. 모두가 속도와 효율을 숭상하며 뛰어도 일류만 살아남는다는 세계화 시대에 비디오가게 주인만 앉아서 연체료 받고 영화감상하며 돈을 번다는 것도 부당한 말이다.

그러나 그 많던 비디오 가게가 모두 사라진 지금, 할 일 없는 사람들이 모여 시간을 잊고 영화 이야기를 하던 옛날 비디오가게가 가끔은 그리워질 것 같다. 손님이 오건 말건 작은 TV로 자기가 좋아하는 비디오 영화에 몰두하던 그 무표정한 비디오가게 아저씨도.



주간동아 2005.01.25 470호 (p70~72)

김민경 기자 holde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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