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70

2005.01.25

“사랑의 인술로 희망 찾았어요”

LA 슈라이너 병원과 충청도 아름다운 인연 … 선천성 기형 및 화상 아동 무료 치료 감동

  • LA=지명훈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 mhjee@donga.com

    입력2005-01-19 18: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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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의 인술로 희망 찾았어요”

    로스앤젤레스 충청향우회 회원들이 치료를 받기 위해 현지에 온 고국의 장애아동들을 한 음식점으로 초청해 함께 음식을 먹고 있다.

    가영아! 정말 미안하구나. 고통을 대신하지 못하고 그저 곁에서 지켜보며 하나님께 기도밖에 할 수 없는 엄마의 마음을 헤아려주렴. 앞으로 남은 여러 번의 수술. 부디 견뎌내 전처럼 예쁜 모습을 되찾기를….”

    2004년 11월27일 밤(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슈라이너 병원 2층 병실. 어린 딸을 수술실로 들여보내야 하는 이가영양(6)의 어머니 노미숙씨(35·충남 공주)는 ‘기도’ 같은 병상일기를 적어 내려간다.

    이따금씩 가영이의 잠든 모습이 부옇게 흐려지면서 뺨으로 뜨거운 물줄기가 흘러내린다. 웃는 모습이 유난히 예뻤던 가영이의 얼굴이 화마(火魔)의 심술로 일그러지게 된 것은 2002년 1월 말. 노씨는 가영이를 데리고 외가에 다녀오다 남편과 함께 화원에 들러 꽃을 산 뒤 잠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가영이는 승용차 뒷좌석에 잠든 채 누워 있었다.

    57명 치료 후 귀국 24명 대기 중

    그 잠깐 사이 시동을 걸어놓은 승용차에서 원인 모를 화재가 발생했다. 커피 잔을 내던지고 승용차로 달려가 불길 속에서 가영이를 끌어냈으나 이미 얼굴 등에 깊은 화상을 입은 뒤였다. 가영이는 국내 병원에서 세 번 수술해 얼굴의 기능은 정상을 되찾았으나 화상의 흔적은 지울 수 없었다.



    “자동차보험 보상비 등을 합쳐 3000만원 가까이를 수술비로 써버려 먹고살 길조차 막막했어요. ‘사랑의 인술 사업’이 없었더라면….”

    이 사업은 충남도가 도정 목표 중 하나인 ‘인본주의 행정’의 실천 과제로 발굴한 시책. 충남도는 1997년 슈라이너 병원과 협약을 맺어 도내 선천성 기형 및 화상 아동을 무료로 치료해주고 있다. 의료 기술상 국내에서 치료가 불가능하거나 막대한 경비로 수술을 엄두 내지 못하는 아동들이 대상이다.

    안상현군(18·충남 공주)은 국내에서 발목 절단이 불가피하다는 최종 진단을 받았지만 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현재 완치 단계에 있다. 이 사업은 인근 자치단체로 확대돼 지금까지 충남과 대전, 충북 지역의 아동 57명이 치료를 받고 귀국했으며 24명이 대기 중이다. 충남도 장애인복지계 김의영 계장은 “1인당 치료비가 많은 경우 2억5000만원을 넘기 때문에 그동안 충청지역 아동의 전체 치료비는 70억~80억원에 이를 것”이라고 말했다.

    “사랑의 인술로 희망 찾았어요”

    노미숙씨가 슈라이너 병원 병실에서 딸 가영이를 안은 채 의료진한테서 수술 계획에 대해 듣고 있다.

    슈라이너 병원은 미국의 성공한 사업가 등이 만든 ‘슈라인(Shrine) 재단’이 운영하는 선천성 기형 및 화상 전문 치료기관으로 무료 치료 봉사를 하고 있다. ‘사랑의 인술 사업’은 한때 위기를 맞기도 했다. 병원 측이 2002년 한국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소속 국가인 점을 들어 무료 치료를 중단하겠다고 통보해왔기 때문.

    한국인 간호사 채용 등 특별한 배려

    충남도는 류철희 당시 충남 부지사를 ‘특사’로 급파했다. 류 부지사는 궁핍한 도내 장애아동들의 실태를 담은 비디오를 틀어주면서 호소해 무료 치료 인원을 오히려 늘려 받았다. 이 사업에 처음부터 관여해온 이건휘 충남지체장애인협회장은 “당시 비디오를 보고 병원이 눈물바다를 이뤘다”며 “정부 아닌 자치단체라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슈라이너 병원의 환자에 대한 배려는 감동적이었다. 의료진은 수술 전에 가영이를 찾아와 키를 낮춰 눈높이를 맞춘 뒤 말을 걸며 친숙해지려 애썼다. 수술의 두려움을 덜어주기 위해서다. 또 수술에 쓸 플라스틱 재질의 특수 주삿바늘을 건네 만져보도록 한 뒤 “아프지 않게 만든 주삿바늘”이라며 안심시킨다.

    병원 측은 한국 어린이들을 위해 한국인 간호사 6명을 채용했고, 도서실에는 한국어 서적과 인터넷도 갖춰놓았다. 얼마 전까지는 영어와 스페인어 교사를 불러 공부도 시켰다.

    수술이 끝나도 시선을 떼지 않는다. 프랑크 라봉테 원장(57)은 2002년과 2004년 두 차례에 걸쳐 한국을 방문해, 치료받고 귀국한 아동들의 사후관리와 재활치료 과정을 확인했다.

    이런 일련의 배려는 ‘인술 철학’에서 나오고 있었다. 라봉테 원장은 한국 방문 당시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자신을 부둥켜안고 고마워하는 장애아동의 부모들에게 이렇게 위로했다.

    “우리는 몸이 불편하지 않으니 빚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장애아동의 무료 치료는 ‘배려가 아닌 의무’인 셈이죠.”

    “사랑의 인술로 희망 찾았어요”

    프랑크 라봉테 슈라이너 병원장(오른쪽)이 병원 후원금 기탁자들의 메달을 소개하고 있다.

    그는 또 명예도민증을 수여한 심대평 충남지사에게는 “불편하고 어려운 어린이들이 치료받을 수 있도록 찾아내고 주선해준 데 감사한다”고 도리어 고마움을 전했다.

    미국 자선계 대부 라이언 오코넬은 자선문화의 확산을 위해 ‘Give Five(5% 기부)’와 ‘Lend a Hand(손 빌려주기)’를 제창했다고 한다. 슈라이너 병원이 전자의 전형이라면, LA충청향우회는 후자를 실천하고 있었다.

    “미경이 잘 지냈니? 영현이도….” “네가 가영이인 모양이구나.”

    2004년 11월26일 오후 LA공항. 이번에도 어김없이 LA충청향우회 회원들이 나와 취재진과 장애아동 및 부모, 충남도 공무원, 충남지체장애인협회장 등을 반갑게 얼싸안는다. 2차 수술을 위해 다시 방문한 석미경(16) 영현(15) 자매는 물론, 처음 방문한 가영이도 활짝 웃는다.

    향우회 회원들은 이들이 LA에 체류하는 동안 수족이 된다. 공항 영접과 배웅은 기본. 슈라이너 병원에 함께 가 입원과 수술 과정을 통역해준다. 충남도와 대전시, 충북도가 장애아동과 부모를 위해 공동으로 마련한 아파트를 찾아 같이 시장도 보고 놀아준다. 주말이면 아이들을 유원지나 영화관에 데려가기도 한다.

    충청향우회 회원들 헌신적 뒷바라지

    전경구 충청향우회 사무총장(44)은 슈라이너 병원에서 ‘충청 아동 보호자’로 통한다. 재정 컨설팅 일로 바쁘지만 장애아동이나 병원이 찾으면 곧바로 달려간다. LA에서 약국을 운영하는 이상주 전 충청향우회 회장은 자신이 회장 시절 수술을 받은 안상현군과 관절염으로 고생하는 안군의 할머니에게 전해달라며 이번 LA방문단에 약을 한아름 안겨주었다.

    이창건 충청향우회 회장(61)은 ‘시간이 돈’인 미국에서 많게는 한 해 수십명씩 오가는 장애아동들 수발들기가 번거롭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아이들에게서 고향을 본다”고 했다. 봉사 열정의 원천이 ‘향수(鄕愁)’임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사랑의 인술로 희망 찾았어요”
    충청향우회는 이 ‘나눔’에서 또 다른 기쁨을 얻고 있다. 서로 반목하던 단체가 똘똘 뭉치게 됐기 때문. 이창건 회장은 “특히 충청향우회의 활동이 LA 현지 언론에 대서특필되면서 회원들의 가입도 늘고 다른 향우회로부터도 부러움을 사고 있다”고 말했다. 슈라이너 병원 담당의 노먼 오스카(44)는 “충청향우회 회원들의 정성 어린 보살핌 때문에 한국 어린이들이라면 더 관심을 갖게 된다”고 털어놨다.

    얼음이 얼지 않는다는 LA이지만 취재기간 기온이 영하 3℃까지 내려갔다. 현지 언론들은 “50년 만의 추위”라고 놀라워했지만 교민사회를 잔잔히 흐르는 나눔의 온정 덕분인지 추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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