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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올인’ 실용주의로 간다

집권 3년차 盧 대통령 대변신 선언 … 사회적 대타협 창출 리더십 시험대에

  • 김시관 기자 sk21@donga.com

‘경제 올인’ 실용주의로 간다

‘경제 올인’ 실용주의로 간다
노무현 대통령이 “경제 살리기에 초점을 맞춘 기자회견을 준비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은 2004년 12월20일, 청와대 여민1관에서 열린 수석보좌관회의에서였다. 즉각 청와대 정책실을 중심으로 태스크포스(TF)팀이 꾸려졌다. 당초 TF팀은 다소 관념적 용어와 추상적 어휘가 등장하는 회견문을 만들었다고 한다.

노 대통령은 TF팀과 공식, 비공식 독회(讀會)를 네댓 차례 하면서 이를 다듬었다고 한다. 노 대통령은 여론조사비서관실에서 취합한 국민 여론조사 등 생생한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하려 애썼다는 후문이다. 25일간의 산고 끝에 1월13일 공개된 노 대통령의 신년사는 실용주의에 입각한 ‘경제’로 중무장했다. 현장을 취재했던 언론들은 “90%가 경제였다”는 다소 과장된 표현으로 노 대통령의 ‘경제 올인’ 의지를 전했다.

이날 노 대통령이 국민에게 선보인 화두는 선진 경제와 양극화, 단기적 경제 활성화 대책 등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선진 경제와 이를 위한 기업 지원 서비스 개념 등은 노 대통령이 직접 만들어 참모진에게 구술했다는 후문이다. 그만큼 역점을 기울인 집권 3년차 그랜드플랜인 셈이다.

이날 노 대통령의 신년사는 성장과 분배라는 진부한 논쟁이 더 이상 의미가 없음을 일깨워주었다. 노 대통령은 신행정수도 이전이나 4대 입법 등 정치권과 국민을 양분하고 있는 정치적 이슈에 대한 의지는 확인하되, 경제와 따로 굴러가도록 하자는 운영의 묘를 등장시켜 관심을 끌었다. 경제 올인을 위한 기반 조성 차원의 전략으로 보인다. 청와대 관계자들은 “노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통해 지난 2년간 구축한 시스템을 바탕으로 집권 3년차인 올해부터 경제 살리기에 나서겠다는 화두를 던진 것”이라고 풀이했다. 경제와 관련한 노 대통령의 새로운 리더십을 기대해도 좋다는 설명이다.

그간 노 대통령의 경제 리더십은 대통령의 무한 책임론으로 일관했다. 기업과 언론들이 실물경제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면 “경제 걱정은 말라. 내가 책임지겠다”(2004년 11월13일 로스앤젤레스 동포간담회)는 식으로 대응했다. 한 방송에 출연해서는 “어떻든 열심히 할 게요. 저를 믿고 희망을 가지세요”라고 말했다.



‘선진 경제’ 등 직접 만들어 구술

그동안 노 대통령은 언론이 경제위기를 지적하면 “보수 언론의 기득권 지키기”라며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국정홍보처 관계자는 “실물경제와 관련한 혼란은 내재된 구조적 문제점을 개선하는 데 뒤따르는 과도기적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경제 올인’ 실용주의로 간다

2004년 12월2일 영국을 국빈방문 중인 노무현 대통령이 런던 힐튼 메트로폴호텔에서 열린 한영 하이테크 포럼 개막식에서 참석자들과 악수하고 있다.

대선 당시로 거슬러올라가면 노 대통령의 책임감은 더욱 똑부러진다. 그가 내세운 개혁과 빈부격차 해소 등 장밋빛 청사진에 대한 기대감은 지금도 서민들의 가슴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자신감도 상당했다.

그러나 국민들 눈에 비친 지난 2년간 참여정부의 경제정책은 미덥지 못했고, 체감경기는 너무나 차가웠다. 집권 초기,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강한 결집력을 보이던 지지층은 말과 다른 현실에 염증을 느끼고 하나 둘 그의 곁을 떠났다.

노 대통령은 실패를 인정하는 데 인색한 느낌을 준다는 지적을 곧잘 받는다. 특히 정치 현안이나 측근 비리 등의 일일수록 본질을 있는 그대로 공개하는 데 주저하는 기색을 자주 엿보였다. 최도술 청와대 총무비서관과 양길승 부속실장의 비리와 관련, 노 대통령은 ‘사과’는 했을지언정 국가 지도자로서 진정성을 보여주는 데 실패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노 대통령은 명분과 실리 사이를 수시로 오간다는 평가도 받는다. 때로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현실적 문제를 불러일으키는 경우도 많다. 경제정책에 대한 ‘스탠스’도 비슷하다. 참여정부가 설정한 가이드라인이 실물경제와 부합하지 않더라도 U턴에 필요한 명분 찾기에 골몰하는 인상을 준다.

지난해 실물경제 침체 ‘속앓이’

대표적인 예가 인위적 경기 부양론이다. 노 대통령은 취임 초 “일시적으로 어렵다고 해서 인위적 부양책을 쓰기보다는 구조와 성장동력을 탄탄히 하는 데 신경을 쓰겠다”고 기조를 잡았다. 그러나 이런 의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바뀌었다. 2004년 말 “꼭 필요한 경기조절 수단은 쓸 수 있는 것 아니냐”는 태도로 돌아섰다. 당연히 “필요할 때 국민에게 이해를 구하고 정책적 변화를 꾀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는 비판이 따른다.

새로운 내용이 없어 보이는 연두기자회견에 국민과 언론이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노 대통령이 이런 한계를 벗어나려는 고해성사적 의지를 피력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특히 실물경제의 어려움을 인정하고 ‘함께 개선하자’고 국민들에게 손을 내민 부분에 대해 기업인들이나 야당의 기대는 남다르다. 담론이나 이론, 이념보다는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한 것도 노 대통령이 경제에 관한 한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따지고 보면 노 대통령은 그동안 누구 못지않게 경제 문제로 속앓이를 했다. 청와대 비서진들은 “노 대통령이 기자회견장에서 ‘지난 한해 경제문제에만 매달린 것 같다’고 한 말은 빈말이 아니다”고 말했다.

‘경제 올인’ 실용주의로 간다

김우식 대통령 비서실장, 이헌재 경제부총리, 이정우 정책기획위원장, 홍석현 주미대사 내정자.(왼쪽부터)



이런 고민의 흔적은 지난해 청와대 직제를 바꾸면서 일부 드러났다. 노 대통령은 청와대에 사실상 ‘경제수석’을 신설했다. 또 국정과제회의 업무의 상당 부분을 청와대 정책실로 이관했다. 이 과정에서 ‘시장’과 항상 긴장관계를 유지했던 이정우 정책기획위원장의 위상과 기능이 눈에 띄게 줄었다. 부동산 정책 업무도 이미 지난해 8월 정책기획위원회에서 재정경제부로 넘겼다.

이런 흐름을 한마디로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바로 ‘실용주의’다. 노 대통령은 새해 참여정부의 새로운 기치로 ‘선진 한국’을 내걸었다. 중도·합리적 보수층의 중심으로 경제정책을 추진했던 김영삼(YS) 정부가 내건 ‘신한국 건설’과 어감이 비슷하다.

대통령으로서의 활동도 실용주의적 사고로 전환한 흔적이 많다. 노 대통령은 12월8일 이라크 아르빌 자이툰 부대를 방문했다. 재향군인회 등 보수우익 단체들은 위험을 무릅 쓴 노 대통령에게 곧바로 화답, “노무현 대통령, 자이툰 부대 방문 잘했다”는 전면광고를 각 신문에 실었다. 청와대 비서진들은 늘 노 대통령을 물고 늘어지던 보수 우익들의 이런 파격 행동을 예민하게 주시했다.

노 대통령의 자이툰 부대 방문 배경에는 실사구시에 입각한 실용주의적 성격이 자리잡고 있다. 자이툰 부대 파견에 반대하는 정치적 세력들이 엄존함에도 국가 지도자로서의 리더십을 선보인 것이다. 노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상생에는 진보와 보수가 따로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지난해 “별놈의 보수를 갖다놔도 보수로 바꾸지 않겠다는 것”이라고 말한 것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다. “보안법은 서두르지 말고 차근차근 가자”거나 “과거청산을 위해 우리 스스로를 너무 어둡게 평가했다”는 말도 노 대통령의 입을 통해 소개된 말이다

개혁 세력들 반발 움직임이 부담

청와대 핵심 관계자들은 노 대통령이 실용주의 노선을 추구한다는 분석에 싫지 않다는 표정이다. 한 관계자는 “최근 일련의 흐름을 실용주의적 코드로 해석한다면 노 대통령의 향후 국정운영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국정홍보처 관계자는 “올 초 여론조사에서 노 대통령 국정수행 지지도가 상승세를 타고 있는 배경에는 실용주의적 노선이 상당한 구실을 한 것 같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의 실용주의 노선은 출발부터 반발에 부닥칠 것으로 보인다. 당장 개혁 진보세력들이 실용주의적 흐름에 완강하다. 그들은 홍석현 주미대사 내정자와 이기준 전 교육부총리 임명 파동을 계기로 실용주의를 반(反)개혁으로 몰아붙이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청와대 측은 실용주의의 다른 한 축이 보수로 비치는 데에 경계하는 눈치가 역력하다.

‘경제 올인’ 실용주의로 간다

12월8일 이라크 자이툰 사단을 방문한 노대통령에게 한 사병이 달려와 포옹을 하고 있다.

실용주의 노선은 열린우리당 내부의 전선도 갈라놓을 전망이다. 더 큰 문제는 명확한 원칙이나 기준 없이 자칫 여러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불투명한 의욕 과잉이 몰고 올 혼란이다. 시장 기능은 복잡해진 반면, 갈등과 대립을 조정할 정부의 구실은 한계점에 봉착해 현실적으로 정책수단을 찾기가 쉽지 않은 상태다. 이런 현실은 새로운 경제 리더십을 선보이려는 노 대통령에게 짐이 아닐 수 없다.

실물경제를 살리려는 노 대통령 앞에는 각각의 이해관계로 무장한 대기업과 중소기업, 노조, 소비자 등 각 경제 주체들이 서 있다. 특히 사사건건 대립하는 야당의 존재는 버겁기 이를 데 없다. 노 대통령은 이들 모두가 공감하는 사회적 대타협을 유도할 수 있는 리더십을 선보여야 하는 기로에 서 있다. 노 대통령은 13일 신년사를 통해 이에 대한 의지를 밝혔다. 그러나 참여정부의 지난 2년이 던져준 교훈은 지금까지의 리더십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노 대통령은 이제 새로운 시험대에 섰다.





주간동아 2005.01.25 470호 (p26~28)

김시관 기자 sk2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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