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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ㅣ2004 살인의 추억

가난·여성에 대한 피해의식이 연쇄살인 불렀다?

전문가들의 ‘유영철 연구’ … 높은 수준의 정신병질자 평가, 교화 가능 여부엔 부정적

  • 강지남 기자 layra@donga.com

가난·여성에 대한 피해의식이 연쇄살인 불렀다?

가난·여성에 대한 피해의식이 연쇄살인 불렀다?

12월4일 열린 유영철씨에 대한 연구 성과를 발표하는 학술회의.

12월4일 중앙대에서는 한국법심리학회와 한림응용심리연구소 공동 주최로 ‘연쇄 살인 범죄와 법심리학적 제문제’라는 학술회의가 열렸다. 7월 검거돼 우리 사회를 경악하게 했던 연쇄살인범 유영철씨에 대한 그간의 연구 성과를 발표하는 자리였다. 이 학술회의에는 유씨의 연쇄살인사건 수사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검·경찰과 심리학자 등이 참석했으며, 최기문 경찰청장이 기념 화환을 보냈을 정도로 수사당국 등 사회 전반의 높은 관심 속에서 성황리에 치러졌다.

왜 유씨는 뚜렷한 범행 동기도 없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갔을까. 이유섭 교수(명지대 사회복지학과)는 유씨가 살인마가 된 배경을 그의 무의식에 자리잡은 가난과 여성에 대한 피해의식에서 찾았다. 고통스런 가난의 상처와 아버지, 어머니, 계모, 아내, 애인한테서 버림받았던 충격이 공격성과 범죄행위로 표출됐다는 지적이다. 이 교수는 “아버지는 아이에게 자아정체성을 확립해주는 존재인데, 알코올 중독에다 폭력적이었던 유씨의 아버지는 그런 구실을 하지 못했다”며 “올바른 자아정체성을 획득하지 못한 성장과정이 범죄를 저지른 배경이 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유씨는 자신의 오피스텔에서 망치로 희생자를 가격한 뒤 시체를 절단하는 잔혹함을 보였다. 살해를 거듭할수록 잔혹함은 더해졌는데, 이 때문에 수사 당국은 과연 유씨가 제정신으로 범행을 저지른 것인지 의아해할 정도였다. 이에 대해 이수정 교수(경기대 범죄심리학과)는 “유씨가 앓고 있는 관자엽(측두엽) 간질이 원인일 수 있다”고 말했다. 정서를 느끼게 하는 뇌 영역인 관자엽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에 감각이 무뎌져 자신이 저지르고 있는 범행의 잔혹함을 느끼지 못했을 수 있다는 것. 이 교수는 “관자엽에 문제가 있는 살인범들의 경우 끔찍한 장면을 볼 때 맥박이 변하지 않고, 심장 박동수는 오히려 줄어든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고 덧붙였다.

유영철씨 면담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심리학자들은 그를 사이코패스(psychopath·정신병질자)로 진단하는 데 동의했다. 서울보호관찰소가 분석해 법원에 제출한 유씨의 심리평가 보고서 또한 그를 ‘높은 수준의 정신병질자’로 평가한 바 있다. 정신병질자란 독특한 선악체계와 과대망상증을 가진 반사회적 성격장애자를 일컫는 심리학 용어.

범행 잔혹성 느끼지 못한 것은 ‘관자엽 간질’ 때문일 수도





이훈구 교수(연세대 심리학과)는 법정심리학자 헤어가 작성한 분석기법으로 유씨와 부모 살해범 이은석군에 대한 반사회적 성격장애 분석을 시도했는데 유씨는 34점, 이군은 1점이 나왔다. 2000년 부모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된 이군도 엽기적인 살인수법을 보여 주었다는 점에서 유씨와 비교되는 경우였다. 이 교수는 “이군의 범행 동기는 부모의 강압적 양육방법과 ‘왕따’ 등에 있는 것으로 분석되지만, 유씨의 경우 과대망상적 자존감 죄책감 결여, 미숙한 행동 통제 등 반사회적 성격장애가 뚜렷하게 나타났다”고 말했다.

11월29일 결심 공판에서 유영철씨는 “검사님의 사형 구형에 감사한다”며 “사람 목숨을 함부로 한 잘못은 정당화될 수 없다”고 최후 진술했다. 그러나 심리학자 대다수는 유씨가 진정으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은 아니라고 여긴다. 유씨 같은 정신병질자는 순간마다 스스로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바가 바뀌기 때문에 정신병질자가 하는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

가난·여성에 대한 피해의식이 연쇄살인 불렀다?

2003년 12월 서울 혜화동 사건 현장에서 포착된 족적과 유사한 신발 및 CC TV에 찍힌 유영철씨의 뒷모습, 그리고 유씨가 사건 현장에서 입고 나간 점퍼.

그렇다면 정신병질자는 교화가 가능한 대상일까. 최종적인 형벌에 처해지기 전에 유씨에게 자신의 잘못을 깨닫도록 하는 것이 가능할까. 이에 대해 이수정 교수는 “정신병질자에 대한 활발한 연구가 이뤄지고 있는 미국에서는 이들이 특이한 신경과적 반응을 보이고 있으며, 어떤 수단을 통해서도 치료될 수 없기에 사형이 유일한 대안이라는 절망적인 연구 결과가 나오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그럼에도 이들에 대한 교화 프로그램이 필요하며, 그것이 우리 사회가 할 일”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유씨가 우리나라 최초의 연쇄살인범이란 점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지만(고재봉, 김대두, 정두영, 지존파 등은 다중살인범으로 분류된다), 전형적인 연쇄살인범과는 다른 특성을 갖는다는 지적이 나왔다. 연쇄살인범에 대한 연구가 가장 활발한 미국이나 캐나다의 연쇄살인범은 대부분 성도착증을 갖지만 유씨의 경우 뚜렷한 성도착증적 특성을 찾기 어렵다는 것. 또 연쇄살인범은 대개 특정한 살해 대상과 수법을 선호하는데, 유씨는 부유층 주택 침입 살해에서 윤락여성 유인 살해로 중간에 대상과 수법을 바꾸었다.

이 같은 특이한 연쇄살인 행태는 유씨의 고백대로 서울 신사동 사건 유족들이 사회단체에 유산을 기부했다는 소식 때문이라는 분석이 제기됐다. 유씨는 자신이 존경하는 ‘체 게바라’처럼 사회계층 간 갈등을 혁파하기 위한 수단으로 살인을 택했는데, 탐욕스럽고 이기적이어야 할 부유층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부유층 살해’ 취향을 잃어버린 것이란 분석이다. 그러나 마지막 부유층 살인이었던 서울 혜화동 사건 때 뒷모습이 폐쇄회로 TV에 찍힌 것으로 알려지자 검거를 두려워해 범행 수법을 바꾼 것이란 지적도 나왔다.

유씨가 출소 뒤 4건의 주택 침입 노인 살해와 11명의 윤락여성 유인 살해를 저지르고 우연히 검거된 11개월 동안 수사당국은 서울에서 끔찍한 연쇄살인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낌새조차 차리지 못했다. 올해만 해도 경기 부천과 포천, 화성, 서울 강서부, 충남 천안 등에서 벌어진 주요 살인·실종 사건에 대해서도 별다른 수사 진척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실정. 이에 갈수록 지능화·흉악화하는 범죄에 대한 수사력을 높이기 위해 범죄 프로파일링(범죄자의 행동과학적 지식을 경찰 수사 분야에 적용하는 수사기법) 연구가 절실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임준태 교수(동국대 경찰행정학과)는 “유영철 사건과 마찬가지로 외국에서도 실제 연쇄살인범을 검거하는 경찰관은 범죄 프로파일러가 아닌 일반형사나 순찰경찰관인 경우가 많다”고 전제하면서도 “그러나 범죄 프로파일링은 범인의 윤곽을 1만명에서 1000명으로, 1000명에서 100명으로 좁혀준다는 점에서 효용이 매우 크다”고 지적했다.

가난·여성에 대한 피해의식이 연쇄살인 불렀다?

7월19일 현장검증을 위해 시체유기 장소에 선 유영철씨.

지능·흉악 범죄 대비 ‘범죄 프로파일링 연구’ 절실



실제로 지난해 9월부터 연속적으로 발생한 서울 신사·구기·삼성·혜화동의 살인사건에 대해 경찰 당국은 연쇄살인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지리적 범죄 프로파일링을 통한 수사를 벌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이날 학술회의에서는 이번 사건에 대한 언론 보도의 문제점도 지적됐다. 이진로 교수(영산대 매스컴학부)가 유씨 검거 사실이 알려지기 시작한 7월18일 이후 2주일 동안의 일간지 보도기사를 분석한 결과 초기 3일 동안의 보도 건수가 60%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교수는 “유씨가 검거된 당시는 수사 당국조차 사건 윤곽을 파악하기 힘든 시기인데도 보도량이 가장 많았다”며 “선정적 기사, 오보, 사생활 침해 등 문제가 있는 보도기사의 80%가 이 시기에 보도되었다”고 말했다. 권일용 경사는 “유씨에게 왜 사건 현장에 다시 나타나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인터넷과 뉴스가 아주 상세하게 알려줘서 가볼 필요가 없었다’고 답했다”면서 범죄보도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이날 학술회의에 참가한 각계 전문가들은 앞으로 유씨와 같은 흉악범이 더 많이 양산될 것이란 우려에 공감했다. 이혼과 가출 등 가정 파괴가 가속화되어 부모에게서 사랑과 보살핌을 받지 못하면서 자라는 사람들이 더욱 늘고, 범죄자에 대한 재활 프로그램이나 사회적 아량이 빈곤한 이상 우리 사회가 제2, 제3의 ‘유영철’을 맞닥뜨릴 가능성은 크다는 것. 학술회의에 참석한 한 심리학자는 “여러 가지 고민거리와 과제를 던져준 유씨에게 우리는 역설적인 고마움을 표시해야 하는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주간동아 2004.12.16 464호 (p22~23)

강지남 기자 lay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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