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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ㅣ2004 살인의 추억

꼬리 무는 살인·실종 유가족은 피 마른다

슬픔과 분노 섞인 '고통의 나날'…건강악화·경제적 어려움 겪는 경우도 허다하다.

  • 강지남 기자 layra@donga.com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꼬리 무는 살인·실종 유가족은 피 마른다

꼬리 무는 살인·실종 유가족은 피 마른다

포천 여중생 시체가 발견된 현장을 살피는 경찰.

11월18일 김중배씨(65)는 자신도 모르게 서울 혜화동의 한 주택으로 향했다. 1년 전 오늘 김씨는 경찰관한테서 갑작스런 연락을 받고 노란색 폴리스라인이 흉흉하게 둘러쳐진 이 낯선 주택 앞에 섰다. 경찰관은 이 집에서 가정도우미로 일하던 그의 아내가 괴한이 휘두른 둔기에 맞아 사망했다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을 전했다. 14년 전 후두암으로 쓰러진 자신을 대신해 야채장사와 가정도우미 일로 생계를 도맡았던 아내였다. 가난으로 인한 갖은 고생이 힘에 부쳐도 싫은 내색 한번 하지 않던 아내였다. 수술 이후 목에 낸 숨구멍으로 거칠게 숨쉬는 김씨는 “아내 잃은 나는 죽음을 기다리는 날개 꺾인 새”라며 눈물을 떨궜다.

유영철 사건으로 전국이 충격 … 다른 사건 상당수 미제로 남아



“동대문경찰서에서 수사에 사용한다며 아내 사진을 갖고 오래요. 하루하루 벌어먹고 사느라고 어디 놀러 가서 사진 찍은 적이 있어야지. 집안을 다 뒤져서 사진 세 장을 겨우 찾아냈어요. 근데 유영철이 잡혔는데도 돌려주지 않네요. 아내 사진 가진 거라곤 아내의 주민등록증밖에 없어요. 하루에도 몇 번씩 꺼내 보곤 해요.”

유난히도 안타까운 상실이 많았던 2004년이었다. 쉴새없이 발생한 강력범죄로 아내를, 남편을, 아버지를, 딸을 잃은 사람들의 눈물이 1년 내내 우리 사회를 적셨다. 1월 경기 부천의 초등학생 2명이 인근 야산에 죽어 있는 채로 발견된 데 이어, 2월에는 포천 여중생이 실종 94일 만에 한 도로변 배수로에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됐다. 4월 서울 고척동 여대생 피살사건, 5월 서울 대림동 중국동포 피살사건과 보라매공원 여대생 피살사건 등이 발생했지만, 어느 사건 하나 속시원히 범인을 검거하지 못했다.



7월에는 21명을 살해한 연쇄살인범 유영철씨가 붙잡혀 세상을 경악케 했다. 특히 유영철 사건 피해자들의 경우 시체 훼손 상태가 다른 사건보다 끔찍해 가족들이 받은 충격은 더욱 컸다. 당시 유영철 수사를 담당했던 한 경찰관은 “난데없는 연락을 받고 경찰서를 찾아온 유족들에게 사망 사실을 알리기 위해선 매번 담배를 두 대씩 피워 물어야 했다”며 고충을 토로했다. 또 “피해 여성 대부분이 가난한 결손가정의 자녀들이었는데, 부모들 대부분이 몇 개월씩 연락이 끊겼는데도 그냥 서울에서 잘살고 있겠지라고 생각하는 상태여서 더욱 안타까웠다”고 덧붙였다.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10월과 11월, 천안에서는 같은 학교에 다니는 두 여학생이 실종되거나 살해되는 사건이 연이어 벌어졌다. 10월27일 발생한 화성 여대생 실종 사건도 미궁에 빠진 상태다.

날벼락을 맞은 듯, 어느 날 갑자기 강력범죄 피해자가 된 가족들은 2004년의 마지막 한 달을 어떻게 보내고 있을까.

꼬리 무는 살인·실종 유가족은 피 마른다

1월 숨진 채 발견된 경기 부천 초등학생 윤모군의 아버지가 아들 졸업식에 참석해 졸업장을 대신 받았다.

“꿈에 자꾸 아들이 나타나요 … 너무너무 괴롭습니다”



11월10일 새벽 아파트 앞 골목에서 피살된 채 발견된 이모양(17)의 부모 이광건씨와 김애순씨는 일주일 간 닫았던 식당 문을 다시 열었다. 그러나 이들 가족의 일상은 아직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둘째 딸은 언니와 함께 쓰던 방에서 책과 옷을 챙겨 나왔고, 초등학교 3학년인 막내는 “큰누나 죽인 범인 잡으면 똑같이 동맥을 끊어서 죽여버릴 거야”라고 되뇌인다. 김씨는 딸아이 생각이 날 적마다 눈물 바람이다. 김씨는 “전기장판을 재산목록 1호로 꼽았을 정도로 추위를 싫어했던 딸이 카디건 하나만 걸친 채 추운 새벽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죽어갔을 생각을 하면 너무 미안해서 가슴이 미어진다”며 눈시울을 닦았다. 이씨는 “아내가 샘낼 정도로 다정하게 내 팔짱을 끼고 조잘거리던 큰딸 모습이 사무치게 그립다”고 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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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10일 피살된 이모양의 어머니는 아직 딸의 옷가지를 정리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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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진 딸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털어놓는 이광건씨 부부.

“우리 딸 죽인 유력한 용의자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허무함이 밀려왔습니다. 범인에 대한 미움도 원망도 없었습니다. 다만 아무 잘못 없는 우리 딸을 왜 죽였는지, 그것 하나만 묻고 싶었는데….”

서울 혜화동 단독주택 살인사건으로 아내를 잃은 김중배씨는 아내와 단둘이 살던 아파트를 처분하고 큰아들 집으로 옮겨왔다. 아파트 돌담길이나 벤치에 앉아 아내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이 요즘 그의 주요 일과다. 가장 그리운 것은 저녁 어스름이 깔릴 무렵 가정도우미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던 아내의 모습이다. 후두암 수술 후 무기력해진 자신의 두 손을 꼭 잡고 “아들들 결혼식 때 내 옆에 앉아만 있어달라”고 했던 지극한 아내였다. 김씨는 “죽어야 할 사람은 나였는데…”라며 가슴을 쳤다.

“세상 떠나기 사흘 전 늦은 밤에 평생 주전부리라고는 몰랐던 사람이 꽃빵을 사다 쪄먹자고 하더라고요. 날도 춥고 어둔 밤인데 갑자기 무슨 꽃빵 타령이냐면서 나가기 싫다고 했어요. 아내에게 그게 제일 미안해요. 이렇게 먼저 떠날 줄 알았더라면 같이 나갔다 왔을 텐데….”

살인사건 피해자 유족들은 심각한 정신적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11월20일에는 4월 유영철에게 살해돼 인천 월미도 해변에서 불태워진 채 발견된 노점상의 동생 안모씨(43)가 스스로 목을 매 숨지는 일이 발생했다. 경찰에 따르면 안씨는 형의 죽음이 가져다준 정신적 스트레스로 한 달간 정신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은 적이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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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이문동 살인사건의 유족 정모씨는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2월 서울 이문동의 한 골목길에서 유영철에게 살해된 전모씨(25)의 어머니 정모씨 또한 여전히 심각한 정신적 스트레스에 휩싸여 있었다. 12월2일 서울 사당동 주택가에서 기자와 만난 정씨는 “오늘도 시장에서 몇 천원을 잃어버렸다”고 했다. 딸을 잃은 이후 자주 길도 잃고 돈도 잃고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증세에 시달리고 있는 것. 그는 요즘 매일 밤낮 TV 뉴스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데, “유영철이 사형됐다는 뉴스가 나올 때까지는 TV에서 눈을 떼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정씨는 하루에도 몇 번씩 가슴이 답답하고 미칠 지경일 때마다 정신병원에서 타온 안정제를 삼킨다. 딸이 사무치게 그리울 때면 정씨는 딸을 화장한 벽제화장터를 찾는다.

“사람들이 화장터 주변에 뼛가루를 뿌렸다는데, 어디다 뿌린 건지 말 좀 해줬으면 좋겠어요. 이 꽃나무인지, 저 풀숲인지 알아야 우리 딸한테 잘 지내느냐고 말이라도 걸어보지요. 근데 다른 시체들과 섞여서 자기들도 모르겠다는 거예요. 정말 잘못했어요. 정신 차리고 납골당에 넣어두는 거였는데…. 우리 딸을 두 번 잃은 것 같아요.”

1월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 부천 초등학생 임모군의 아버지는 “아들이 죽은 뒤 아내는 심장병을 얻었다”고 말했다. 자주 가슴이 아프고 답답하며 특히 아침에 일어날 때 많이 힘들어한다고 했다.

“꿈에 자꾸 아들이 찾아오니까요. 제 꿈에도 자주 나와요. 그런데 이리 오라고 아무리 불러도 오질 않아요. 그런 날은 하루 종일 마음이 괴롭습니다. 가끔은 재미나게 노는 꿈, 함께 여행 가는 꿈도 꿔요. 그러고 나면 허탈함이 밀려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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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철이 저지른 혜화동 살인사건으로 아내를 잃은 김중배씨.

피해 유가족, 정신적 충격·가족 부양 부담에 자살하기도



건강 악화와 경제적인 어려움은 남은 가족들을 괴롭히는 또 하나의 복병이다. 검찰 관계자는 “유영철의 오피스텔에서 목숨을 잃은 출장마사지 여성들의 가족 대부분이 기본적인 생활조차 어려운 형편이었다”고 전했다.

6월 유영철 오피스텔에서 살해된 우모양(28)의 아버지는 다소 호전됐던 건강이 도로 악화됐다. 6년 전 뇌경색으로 쓰러진 뒤 거동조차 불편해졌는데, 외동딸의 살해 사실을 안 이후 충격으로 그동안의 약물치료 효과가 수포로 돌아간 것. 우씨는 “월남전에 참전해서 주검들을 숱하게 봤지만 우리 딸 같은 주검은 없었다”며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죽은 딸의 몸뚱어리를 봤는데, 고왔던 딸아이 얼굴조차 알아보기 힘들었다”며 울먹였다. 딸이 윤락여성으로 일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충격은 더 컸다. 그는 “3년 전 고향을 떠나 서울의 한 학원에서 일한다며 약간씩 생활비를 보내줬기 때문에 윤락여성으로 일한다는 것은 금시초문이었다”고 말했다. 올 3월 아내도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낸 우씨는 현재 혼자 지내면서 병원을 오가고 있다.

유영철에 의해 살해된 서울 황학동 노점상 안모씨 유족들도 경제적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담당 경찰관은 “자살한 동생도 남은 가족들의 부양 책임에 큰 스트레스를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현재 안씨의 아내와 자녀들은 지낼 곳이 마땅치 않아 여관에 기거하고 있으며 정신적 충격으로 장사도 그만둔 상태. 안씨의 막내 여동생은 “가족들 모두 큰 충격을 받은 상태”라며 “시간이 꽤 많이 흐를 때까지 정상적인 생활은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자식을 앞세운 부모의 마음은 8할이 죄책감과 미안함이다. 아이가 극도의 공포에 시달리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는 점, 혹시나 아이 교육을 잘못해 범죄에 노출된 것은 아닌가 하는 자책, 그리고 범인 검거에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는 현실이 부모 가슴을 더욱 찢어놓는다.

“평생 아픔 간직하겠지만 남은 자식 위해 힘내야죠”



11월10일 숨진 채 발견된 천안 여고생 이모양의 아버지는 “아이들을 대담하게 키운 게 잘못이었나”라며 말끝을 흐렸다. 구김살 없이 명랑한 아들딸들에게 ‘밤길 다니지 마라, 남자들을 조심하라’고 잔소리하지 않았던 게 딸을 잃은 이유처럼 여겨진다는 것이다. 1월 숨진 채 발견된 부천 초등학생 임모군의 아버지는 “큰아들이 그렇게 된 뒤로 쌍둥이 딸들에게 학교 끝나면 바로 집에 와야 한다고 늘 교육한다”고 말했다. 또 “가끔씩 말도 없이 늦게 돌아올 때면 불안해서 아무것도 못한다”고 덧붙였다.

주체할 수 없는 슬픔 속에서도 이들은 남은 가족들과 잘 살아가려는 노력 또한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천안 여고생 이모양의 아버지도 “언니 잃은 슬픔이 힘겨울 텐데도 내색 않고 부모의 건강을 챙기는 둘째 딸이 고맙다”면서 “평생 아픔을 간직하며 살아야겠지만 남은 자식들 생각해서라도 힘을 낼 것”이라고 말했다. 임군의 아버지는 “쌍둥이를 키워야 하니까 죽은 아들을 가슴에 묻고 아내와 함께 공장에 다시 나가고 있다”면서 “쌍둥이에게 너희가 오빠처럼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줬으면 좋겠다고 말한다”고 했다.

“어머니 산소 옆에 묻은 아들에게 한 달에 두세 번쯤 갑니다. 아내는 아직 못 가고 나 혼자 가요. 사건 현장에도 한 달에 두세 번쯤 가고요. 이제 좀 진정됐지만 이 아픔은 평생 가는 것 아닙니까. 시간이 많이 흐르더라도 경찰이 이 사건에 소홀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사건이 잘 해결돼야 다시는 아이들이 이런 식으로 이유 없이 희생되는 일이 없지 않겠습니까.”





주간동아 2004.12.16 464호 (p16~20)

강지남 기자 layra@donga.com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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