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61

2004.11.25

대기업들 “구멍가게 장사도 힘드네”

의류·음식점 브랜드 등 앞다퉈 수입 ‘수익은 별로’ … ‘푼돈’ 벌려다 이미지만 추락 ‘비난도’

  • 김민경 기자 holden@donga.com

    입력2004-11-18 17: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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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새로운 해외 패션 브랜드가 국내에 상륙하면서 런칭 쇼를 열었을 때의 일이다. 패션 브랜드 런칭이야 거의 매일 벌어지는 일이긴 하지만, 이날의 분위기는 다소 ‘이상’했다. 일반적으로 런칭 쇼는 국내 언론과 고객들을 처음 만나는 자리인 만큼 해당 브랜드는 파격적인 이벤트를 마련하기 위해 골몰하고, 패션 트렌드를 움직이는 트렌드 세터들과 비평가들을 한 명이라도 더 끌어오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한다. 그러므로 객석은 스타들을 포함하여 패션 감각을 자랑하는 멋쟁이 여성들과 남성들로 북적댄다.

    그러나 이날은 나이 지긋한 중년 남성들이 점잖게 분위기를 잡았고, 행사장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몇몇 주요 패션 관계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쇼 또한 전혀 새롭지 않았다.

    알고 보니 ‘넥타이 남성’들은 해당 브랜드를 수입해온 국내 대기업에 돈을 빌려준 채권은행단 관계자들이었다. 돈을 꿔간 기업이 옷을 팔아 돈벌 수 있을지 ‘감시’하러 나온 셈이다. 패션쇼 후의 식사도 이 대기업이 운영하고 있는 레스토랑에서 열렸다. 한 패션 전문가는 “대기업들이 뭘 모르고 옷 장사에 나서니 이런 일이 벌어진다”고 꼬집었다. ‘사업 다각화’를 위해 대기업들이 외국 옷을 수입해 팔고, 음식점을 직접 운영하는 ‘구멍가게’ 장사에 경쟁적으로 참여하고 있지만, 거대한 조직을 움직여 손님들 하나하나의 까다로운 눈높이를 맞추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돈만 되면 무엇이든 만들어 파는 것이 기업의 속성이지만, 지난해부터 가속도가 붙은 대기업들의 패션 사업과 고급 레스토랑(fine dining) 운영은 공장을 돌려 만든 상품을 파는 것이 아니다. 해외 고가 상품을 소량씩 수입해 직접 팔고, 주방장이 있는 소규모 고급 식당을 운영한다는 점에서 정확히 ‘개인사업’을 하고 있는 셈이다. 외환위기 이후 대기업들이 마련한 ‘사업 다각화’가 VIP를 대상으로 한 소매업이었던 것이다.



    대기업들 “구멍가게 장사도 힘드네”

    신세계 인터내셔널이 운영하는 명품패션편집숍 ‘분더 숍’(맨 위) 현대종합상사의 ‘욥!’과 ‘레 카라테레’(가운데 오른쪽).

    VIP 대상으로 한 명품 수입이 주류

    대기업 중 최초로 VIP 마케팅의 가능성에 주목하고, 해외 명품 수입에 나선 것은 신세계와 코오롱이었다. 이명희 회장(이병철 전 삼성 회장의 딸)이 주도하는 신세계는 1996년에 아르마니·캘빈 클라인 등을 수입하는 신세계 인터내셔널을 설립했고, 2000년에는 해외 유명 디자이너들의 옷을 수입해 파는 편집매장(분더 숍)을 처음 들여왔다. 소수 마니아들을 위한 매장이란 점에선 비관적인 시선이 압도적이었으나 분더 숍은 다른 대기업들이 VIP 마케팅에 나서도록 자극했고, 신세계는 분더 숍에 고가 해외 브랜드를 계속 수입하여 반응이 좋으면 국내 독점판매권을 따내 런칭하는 방식으로 짭짤한 수익을 내고 있다. 또한 신세계는 분더 숍 옆에 청담동에서 미식 붐을 일으킨 A 이탈리안 레스토랑 운영에도 참여했다. 두 가게의 손님들이 일치했으니, 신세계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외국 상류층 수준의 옷과 음식을 판 기업인 셈이었다.

    코오롱은 1987년부터 BMW 수입을 시작하여 2000년을 넘어서면서 폭발적인 성장세를 이뤄냈다. 코오롱은 고급 수입자동차를 팔면서 갖게 된 데이터베이스와 전략을 이용, 2001년 분할한 FnC코오롱과 HBC코오롱을 통해 명품 수입과 판매에 열심이다. FnC코오롱 안에서도 ‘전략사업팀’이 마크 제이콥스, 크리스찬 라크루아, 지미추 등의 해외 디자이너 브랜드를, HBC코오롱은 자동차 BMW와 롤스로이스, 오디오 B&O, 보석 프레드, 심지어 초콜릿 리샤까지 수입해 팔고 있다. 모두 전 세계에서 가장 비싼 급에 속하는 사치품들이다. 올 가을에 들여온 프랑스 보석상 프레드의 청담동 매장은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연 것이다. 한 명품 홍보 관계자는 “코오롱은 옷 제조업을 하는 대기업이 해외 패션 브랜드를 수입하는 수준이 아니라, 총체적 사치품 판매업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코오롱 이웅렬 회장이 LVMH(루이 비통 등이 포함된,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사치품 제조판매 그룹)의 회장과 가까운 사이로 이 회사를 영업 모델로 삼은 것 아니냐는 게 업계의 정설이다.

    대기업들 “구멍가게 장사도 힘드네”

    코오롱이 수입하는 BMW.

    FnC코오롱의 패션상품 판매는 얼마 전까지 큰 재미를 보지 못했으나 마크 제이콥스가 스타 마케팅에 힘입어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면서, 최근 신세계가 수입하는 ‘마르니’와 함께 백화점에서 월 매출 1억원을 훌쩍 넘으며 1, 2위를 경쟁할 만큼 판매가 좋아졌다. 오용현 마케팅 과장은 “위험을 줄이려는 것이 기업 생리다. 외국 브랜드를 들여오는 것은 바로 그런 차원이다. 어차피 대기업이 수입하지 않으면 해외 브랜드들이 직접 판매 법인을 만들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국내 최대 의류업체인 제일모직도 이건희 회장 차녀 서현씨가 부장으로 들어온 뒤 일본 출신의 디자이너 브랜드 이세이 미야케 등을 수입해 2년 만에 연 100억원대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홍보담당자인 이주은씨는 “이세이 미야케는 브랜드의 포트폴리오 차원에서 수입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의류 수입 자제해온 LG도 뛰어들 태세

    삼성의 경쟁사인 LG는 아직까지 의류 수입을 자제해왔다. 그러나 구자경 명예회장의 동생 구자승씨의 큰아들인 본걸씨가 LG산전에서 패션 부사장으로 취임한 데다 이탈리아 패션 시찰을 다녀와 명품에 대한 의지를 밝힌 바 있다. 구 부사장은 “직접 수입해 판매하기보다 노하우를 배우겠다”고 말하고 있으나, 이미 프랑스 명품 브랜드 라푸마와 전략적 제휴관계를 맺어 명품 수입에 뛰어드는 것 아니냐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또한 구자경 명예회장의 둘째 동생 구자학 회장이 이끄는 아워홈은 SK가 운영하던 서울 파이낸스센터 내 비즈니스 레스토랑 이끼이끼와 싱카이, 메짜 루나 등 5개를 60억원에 인수해 2004년부터 운영하기 시작했다. 수석 주방장 등을 포함한 SK 인력을 그대로 넘겨받았지만, 식재 구매와 직원 채용 등은 아워홈의 시스템을 따르고 있다. 인수 당시엔 “SK는 호텔(워커힐)이고 LG는 구내급식(아워홈)이라 제대로 운영하겠냐”는 말이 나오기도 했지만, 구자학 회장이 재계에서도 소문난 미식가로 고급 레스토랑, 특히 일식당 운영에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다고 한다. 여의도와 강남 LG 타워 내 일식당들에 정·재계 손님이 몰리는 것도 이런 영향 때문이다.

    한편 현대종합상사는 패션 브랜드 수입은 물론, 초밥집과 맥줏집까지 열어 본업인 무역은 등한시한 채 ‘푼돈’ 버는 데 지나치게 신경 쓰고 있는 것 아니냐는 말을 들어왔다. 현대종합상사는 독일 브랜드 ‘욥!(JOOP!)’과 이탈리아의 ‘레 카라테레’, 프랑스의 ‘알랭 피가레’ 등을 수입하고 있고 강남에서 고급 회전스시집 ‘미요젠’, 직접 만드는 하우스 맥주 ‘미요센’과 같은 이름의 카페도 운영하고 있다. 모두 2003년 이후 추진된 사업이다.

    현대종합상사가 철강과 자동차라는 전통 무역 분야에서 ‘옷가게와 음식점’으로 바꾼 데에는 법정 관리에서 벗어나려는 고민이 엿보인다. 홍보팀 이은명씨는 “기계나 선박은 해외의 영향을 복합적으로 받는 데다 이익률이 0.01~ 0.03%에 불과한 반면, 고급 옷이나 음식점은 매출 비중은 적어도 경기 영향을 덜 받고 이익도 많이 난다”고 말한다. ‘미요’(‘즐거운 맛’이란 뜻) 레스토랑들은 현대‘답게’ 모두 100평 안팎의 초대형 매장으로 1호점의 경우 월 2억원의 매출을 올린다는 게 업체 측의 설명이다.

    그러나 한 레스토랑 컨설턴트는 “강남에서 고급 초밥나 하우스 맥주나 먼저 개인이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곳이 있었다. 웬만한 사람들은 어딘지 다 안다. 그런데 장사 잘된다고 따라하다니 대기업답지 않다”고 말한다.

    대기업들 “구멍가게 장사도 힘드네”
    오너 2, 3세 결정으로 졸속 추진 경우도

    역시 채권단 관리를 받고 있는 SK 네트웍스는 파이낸스센터 식당을 운영하기 위해 워커힐호텔과 함께 세운 회사인 베넥스 인터내셔널과 의류생산업체 세계물산의 지분을 팔았다. 해외쇼핑대행몰 ‘위즈위드’도 내놓은 대신 미국의 타미 힐피거를 2003년에 런칭했다. SK 네트웍스는 고가품을 수입하는 ‘프리스티지 사업본부’를 두고 크라이슬러 자동차와 타미 힐피거를 팔고 있는데 태스크포스팀에서 고가의 해외 브랜드들을 수입, 판매한다는 계획이다.

    메가박스와 베니건스 등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벌이고 있는 오리온도 최근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중국집 ‘미스터 차우’를 들여와 운영하고 있다. 미스터 차우는 1국 1점을 원칙으로 하고 있어 국내 영업권을 놓고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는데, 이화경 사장이 특별한 애정을 갖고 이를 따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기업들 “구멍가게 장사도 힘드네”

    회전초밥집 ‘미요젠’(왼쪽)과 코오롱이 수입하는 명품 초콜릿 ‘리샤’.

    고가의 브랜드를 수입하고, 고급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대기업들은 한결같이 ‘잘된다’고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수업료를 비싸게 치르고 있다’는 게 사업에 직·간접적으로 관계한 사람들의 말이다.

    우선 대기업은 패션이나 레스토랑 사업이 공장에서 만든 물건이 아니라 ‘이미지’를 조작해 파는 일임을 이해하지 못한다. 고가의 명품을 수입하는 대기업들이 처음에 재미를 보지 못하자 최근에야 허둥지둥 패션 전문가를 영입해 홍보와 마케팅을 맡기기 시작했으며 그 뒤로 매출이 늘고 있는 것이 좋은 증거다. 대기업 홍보 담당자들은 산업 담당 기자들을 만나지만, 패션 전문 홍보자들은 트렌드 세터들을 만난다. 외국계 업체에서 대기업으로 스카우트된 한 담당자는 “외국계 회사에서 브랜드란 직원들에게 ‘종교’다. 그런데 여기선 한 ‘부서’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대기업과 함께 일을 했던 모 홍보대행사 대표는 “당시 그 회사 팀장이 자신이 잘 아는 업체와 패션쇼를 하라고 했다. 브랜드와 격이 맞지 않는 업체여서 거부했더니 선수끼리 왜 이러냐, 돈만 받아가면 되지 않느냐고 했다. 패션이 무엇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고 말한다.

    고가의 라이프스타일 사업이 기업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 아니라 해외 유학에서 돌아온 기업 소유주의 2세나 3세의 결정으로 추진되면 이런 문제는 더 커진다. 이들은 제조업으로 성공한 아버지 세대와 달리, 생산 투자를 꺼리는 대신 마케팅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한 레스토랑 컨설턴트는 “대개는 오너가 외국에서 먹고 입던 것이 아쉬워 식당도 내고 옷도 수입한다. 무조건 시작은 해도 담당 직원이 오너의 지시보다 발전된 안을 수용하기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한국 음식의 세계화 같은 건 애초부터 관심 밖이고 오너의 애정이 식으면 식당 유지도 어렵다는 것이다.

    대기업의 레스토랑에 파견 나와 있는 한 대기업 직원은 “시스템 없이 기업이 비싼 주방장 두고 이사급, 부장급 파견해 고급 레스토랑 한두 개 운영하는 건 적자 보겠다는 거다. 적자 보는 사업을 기업이 하는 건 오너의 의지 외엔 설명이 안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런 종류의 사업은 대부분 ‘태스크포스’팀에 속해 있고, 때로는 경영기획팀의 ‘극비’ 사업으로 진행되기도 한다. 요즘 인기 있는 한 에스닉 레스토랑도 오너의 지시를 받아 모 대기업이 운영하지만 회사 내 직원들에게도 비밀로 부쳐져 있을 정도다. 이 대기업 직원은 “이것을 미래의 회사 사업으로 끌어가는가, 오너의 식당으로 끝내는가가 문제가 될 것이다. 대기업들이 부끄럽게도 개인들과 경쟁하려면 명분은 지켜야 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한국의 대표적인 굴뚝 기업들이 수십 년 동안 국민 기업으로 쌓은 이미지를 하루아침에 외국의 옷 가게 혹은 초콜릿 브랜드와 바꾸는, 진짜 위험스런 모험을 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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