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61

2004.11.25

0에서 출발 억대 연봉 세일즈 신화를 쓴다

맨주먹으로 일군 5인의 성공 스토리 … “최고의 세일즈는 제품보다 마음을 파는 것”

  • 이나리 기자 byeme@donga.com 최영철 기자 ftdog@donga.com

    입력2004-11-18 16: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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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먹고살기 힘든 세상이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다. 젊은이는 취직이 안 돼서,
    • 직장인은 구조조정에 대한 걱정으로, 자영업자는 바닥을 치는 매출 탓에 잠이 달아나고 가슴이 답답하다.
    • 이런 그들에게 억대 연봉은 꿈속에서나 가능한 일. 그러나 그 ‘꿈속 환상’을 현실로 만든 이들이 있다.
    • 돈도, 학벌도, 배경도 없는 상황에서 맨주먹으로 불끈 일어나 ‘세일즈 영웅’이 된 사람들.
    • 그들이 피와 땀으로 일구어낸 감동의 성공 스토리를 만난다.
    • - 편집자 주
    0에서 출발 억대 연봉 세일즈 신화를 쓴다
    메르세데스-벤츠 딜러 김상균

    “기본은 좋은 사람, 착한 사람이 되는 것 … 스스로에게 채찍질”



    메르세데스-벤츠. 대당 가격이 5000만~1억7000만원에 이르는 이 차를 지난해 100대나 팔아치운 사람이 있다. 한성자동차(메르세데스-벤츠 공식 딜러) 김상균 과장(35). 분기별로 수여하는 ‘최고 영업사원’ 상을 2002년부터 올 3·4분기까지 한 번도 놓치지 않았다. 지난해 그가 가져간 순수익은 약 2억1500만원. “난 정말 잘난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며 손사래를 치지만, 이 정도면 “도대체 비결이 뭐냐”고 묻지 않을 수 없다.

    김과장은 컴퓨터 프로그래머 출신이다. 가정형편도 어렵고 공부에도 취미가 없었던 그는 전문대학에 진학했다. 졸업 후 작은 IT(정보기술) 기업에서 일했지만 상황은 열악했다. 한 달 급여 20만원.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거든요. 집안이 풍비박산 났죠. 어머니 혼자 힘으로 누나와 절 키우시느라 고생이 참 많으셨어요. 이제 성인이 됐으니 어머니를 잘 모셔야 할 텐데 중소기업 월급쟁이 생활로는 답이 안 보입니다.”

    고민 끝에 ‘노력한 만큼 벌 수 있다’는 영업직에 도전키로 했다. 1994년 6월 쌍용자동차 영업직 신입사원이 돼 6개월간 혹독한 트레이닝을 거쳤다. 남대문시장에서 시작해 청계천, 동대문을 돌아 다시 남대문으로 돌아오는 먼 길을 전단지 수백장을 뿌려가며 걷고 또 걸었다. 달변도 아니고 활달한 편도 아니어서 처음 만난 사람 앞에선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최선을 다했다. 어렵게 결심한 만큼 잔꾀 부리지 않고 우직하게 견뎌내는 것만이 살 길이다 싶었다.

    입사 2개월 만에 처음으로 차 한 대를 팔았다. 이듬해에는 사내 ‘신인왕’에도 뽑혔다. 능수능란함과는 거리가 먼 앳되고 순한 인상, 과장 없는 솔직함이 오히려 고객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듯했다. 98년 삼성자동차로 직장을 옮겼고, 2년 뒤 다시 쌍용자동차를 인수한 대우자동차에 입사했다. 시류를 좇아간 것이 아니라 외환위기 이후 업계 지도가 크게 바뀌면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가장 고생을 많이 한 건 대우차 시절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대우차를 곧장 찾는 사람이 적었거든요. 낯선 빌딩을 구석구석 누비다 보면 힘도 들고 인간적인 모멸을 느낄 때도 있었지만 어떻게든 이겨냈습니다. 고생을 고생으로 생각하면 버텨낼 수가 없거든요.”

    2000년 김과장은 수입차 시장에 눈을 돌렸다. 최고 품질의 차를 팔아보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다. 한성자동차의 한 임원을 찾아가 무조건 이력서를 내밀었다. 따로 추천자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몇 달을 기다린 끝에 겨우 입사에 성공할 수 있었다. 고객층이 전혀 다른 까닭에 수입차 시장에서 국내차 영업 경력은 별 의미가 없었다.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만 했다.

    수입차 영업은 전시장 내방 고객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그는 이전에 배운 대로 직접 고객을 찾아나서기로 했다.

    “아침 일찍 고급 빌라촌을 찾아, 기사가 대기 중인 차 옆에 서 있다 출근하는 분들께 눈도장을 찍는 겁니다. 부지런하기만 하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죠. 호텔 내 기사 대기실을 방문해 우회 공략도 하고요. 인터넷 사이트(www.buybenz.co.kr)도 만들었습니다.”

    수입차 고객은 까다롭다. 연령도 높고 보수적인 편인데 김과장은 그런 특징들이 오히려 자신에겐 플러스 요인이 됐다고 한다.

    “전 전형적인 세일즈맨 스타일이 아닙니다. 머리를 쓸 줄도, 너스레를 떨 줄도 몰라요. 술 마시며 영업하는 쪽은 더더욱 아니고요. 지금도 차 한 대 파는 일이 그저 어렵기만 합니다. 결국 제 자신이건 제품이건 정직하게 보여주는 수밖에 없어요. 우리 차의 단점도 솔직하게 말하고요. 그러기 위해서는 차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해야 합니다.”

    김과장은 “세일즈의 기본은 좋은 사람,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악의가 없고, 긍정적이고, 누구의 마음이라도 다 이해할 수 있는 여유로움을 갖추고 있어야지요. 제 고객들만 해도 다 저보다 훌륭한 분들이거든요. 그 앞에서 괜히 잔머리 굴리다간 금방 속을 들키게 돼요.”

    김과장은 최근, 4년 전 결혼 후 90kg 넘어까지 갔던 체중을 70kg으로 줄였다. 6개월간 하루도 빼놓지 않고 헬스클럽에서 운동을 하고 철저히 채식 위주의 식사를 한 덕분이다. 자칫 나태해질 수도 있는 일상을 다잡기 위한 자기수련 프로그램이었다고 한다. 이런 그의 별명은 ‘독사’. 그의 집요함을 누구보다 잘 아는 동료들이 붙여준 것이다.

    김과장은 매일 아침 7시에 집을 나선다. 7시30분에 회사 도착. 오전에 많은 일을 한 뒤 오후 4시면 대충 마무리를 짓는다. 6시30분쯤 퇴근해 가족들과 식사한 후 다시 헬스클럽으로 향한다. 그는 “세일즈맨들은 대개 현지 퇴근을 많이 하는데 나는 되도록 사무실에 들렀다 간다”고 했다.

    “영업은 혼자 하는 일입니다. 외롭고 컨트롤해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생활이 무질서해지기 쉽죠. 그런 만큼 스스로에 대한 채찍질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누구라도 최고의 세일즈맨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이나리 기자 byeme@donga.com

    0에서 출발 억대 연봉 세일즈 신화를 쓴다
    화장품 ‘백옥생’ 방문판매인 최윤정

    “고객카드·다이어리 활용 … 1일 1고객 만나기 아직도 숙제”


    48살의 세일즈우먼 최윤정씨는 화장품을 판다. 화장품 세일즈라 하면 큰 가방을 둘러메고 집집이 다니며 마사지도 해주고 수다도 떨어주는 ‘아줌마’를 연상하기 십상. 그러나 최씨는 스스로를 피부전문가, 뷰티컨설턴트, 1인 기업인이라 생각한다. 늘 똑 떨어지는 정장에 직접 차를 몰고 다니며 강한 사명감을 갖고 일한다. 연 평균 수입은 1억5000만원 선. 벌써 몇 해째 10만 세일즈우먼이 경쟁하는 화장품 방판(방문 판매) 시장에서 놀라운 실적을 달성해왔다.

    그는 한방화장품 ‘백옥생’으로 유명한 정산생명공학㈜ 남수원지사 원장이다. 방문 판매에 뛰어든 것은 11년 전. 사업을 하던 남편이 주식에 손 대 큰 손해를 보면서 세일즈에 나서게 됐다.

    “그 전만 해도 집을 몇 채씩 가지고 골프까지 배워가며 정말 남부럽지 않게 살았어요. 그 재산 다 없애고 생활비마저 쪼들리자 ‘상황에 끌려가다가는 내리막길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생활 규모를 줄이기보다는 내가 돈을 벌어 뚫린 곳을 메우자는 결심을 했죠. 아이들 교육비 마련도 중요했고요.”

    목소리도 조용조용, 친구들 사이에서 ‘얌전한 윤정이’로 통하던 그는 처음부터 다른 무엇이 아닌 화장품 판매에 관심을 가졌다. 경북 의성 공무원 집안에서 엄한 교육을 받고 자란 그였지만 어려서부터 예쁘게 꾸미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 자신의 취향과 재능을 살리기에 안성맞춤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지사장님마저 ‘윤정씨는 방판 같은 거 못한다’며 말리더라고요. 성격도 그렇고 살아온 배경도 그렇고, 도무지 이렇게 험한 일을 해낼 수 없으리란 거였죠. 하지만 저는 도전해보고 싶었어요. 다른 대안도 없었던 데다, 평소 살림하고 이웃 챙기듯 정성을 다하면 안 될 리 없다고 생각한 거죠.”

    처음에는 공부 잘하고 재주 많은 아이들 둔 덕을 톡톡히 봤다. 자모회나 학부모 모임 사람들이 “한 번이야 못 도와주겠냐”며 손을 잡아준 것. 그렇게 1년쯤이 지나자 꽤 많은 고객을 확보하게 됐다. 얼마간 자신감이 붙은 그는 좀더 공격적인 세일즈에 들어갔다.

    “첫 타깃은 초등학교 교사들이었어요. 오후 2시30분쯤은 선생님들이 좀 한가한 시간이거든요. 먼저 교무주임을 찾아 양해를 구한 뒤 즉석 설명회를 열곤 했죠. 물론 빈손으로는 가지 않았어요. 입이 좀 심심할 시간이니 다과를 주로 준비했죠. 여름에는 차에 시원한 수박을 싣고 가기도 하고요.”

    최원장은 생활이 어려워진 다음에도 타고 다니던 프린스 승용차를 팔지 않았다. 오히려 “좋은 차를 계속 타고 싶고, 그러려면 기름값이 많이 들고, 해결책은 돈을 많이 버는 것밖에 없다”는 식으로 생각했다. 그 차를 타고, 어떤 고객보다 세련되게 꾸미고 다니며 판촉비 또한 아낌없이 썼다.

    “고객에 따라, 장소에 따라 각기 다른 종류의 판촉물을 늘 준비해 다녔어요. 판촉비를 조금 쓰고 물건도 조금 팔 거냐, 아니면 많이 쓰고 많이 팔 거냐 묻는다면 전 후자라 답하겠습니다. 많은 고객은 방판의 생명이거든요.”

    때로는 최원장의 ‘완벽한’ 차림새에 거부감을 느끼는 고객도 있었다.

    “하지만 저랑 얘기를 나눠보면 전혀 그렇지 않거든요. 제 고객 중에는 사방 습기 찬 지하 단칸방에 사시는 분들도 꽤 있으세요. 그분들은 먹고살기 위해 최소한의 화장을 해야 하는 이들이죠. 좋은 인상을 만들어 식당 종업원도 하고 파출부 일도 해야 하니까요. 그런 댁에 가면 물건 팔 생각 대신 샘플 드리고 상담하는 데에 집중합니다. 판촉물도 콩나물, 두부, 라면 같은 걸고 가져가고요. 그런 분들일수록 주변 소개도 많이 해주시고 정말 마음을 나누는 사이가 돼요.”

    초등학교 다음에는 수원에 유난히 많은 고깃집들을 주 타깃으로 삼았다. 역시 여주인이나 ‘왕고참’ 종업원을 설득해 미팅 자리를 마련했다. 요즘에 와서는 수원 지역 상류층 여성들이 주 고객이다.

    최원장은 그동안 쌓은 피부·한방·미용 지식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관련 서적, 잡지는 물론 매일 아침 4개 조간신문 기사까지 꼼꼼히 읽어가며 노력한 결과다. 그는 “고객의 피부만 보면 오장육부 어디가 안 좋은지, 식습관은 어떻고 화장품은 뭘 쓰는지까지 추론 가능하다”고 했다. 운전을 하다가도 사이드 미러로 보이는 뒤차 여성의 피부가 안 좋으면 따라가 즉석 상담 후 고객으로 만들곤 한다. 그의 고객카드와 다이어리에는 고객에 대한 기본 정보 외에 샘플은 언제 제공했는지, 언제 잡티가 났고 이유는 무엇인지까지 기록돼 있다.”

    이런 그이지만 신규 고객 개척은 여전히 어려운 숙제라 한다. 약해지는 자신을 다잡기 위해 만든 규칙이 바로 ‘1일 1고객 만나기’. 이 ‘숙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하루를 마감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원칙이다.

    “세일즈는 철저히 나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재능 문제가 아니라 의지와 자세의 문제인 거죠. 해내고야 말겠다는 강철 같은 결심, 고객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걱정하는 마음이 있으면 누구나 최고의 세일즈맨이 될 수 있습니다.”

    이나리 기자 byeme@donga.com



    0에서 출발 억대 연봉 세일즈 신화를 쓴다
    동부생명 울산지점장 최민호

    업계 신기록 잇따라 수립 … 고객 마음 열고 난 후 계약 성사



    동부생명 울산지점 최민호 지점장의 나이는 불과 31살이다. 26살 때인 1999년 4월 보험설계사로 출발한 지 20개월 만에 억대 연봉 고지에 오른 뒤 2002년에는 월급이 3000만원을 넘어섰다. 국내 생명보험사 소속 20대 보험설계사 중 유일하게 억대 연봉 신화를 이룬 최씨는 2002년 초 한 팀의 리더가 돼 그해 바로 이 팀을 실적 1위로 만들었다. 회사는 2003년 4월 30살인 그에게 울산지점을 새롭게 만들어줬다. 200평의 사무실은 회사가 마련해줬지만 직원은 지점장 자신뿐. 하지만 1년 뒤 울산지점은 팀장을 비롯한 보험설계사를 포함해 30명의 직원을 거느린 중위권 지점으로 발돋움했다. 국내 생명보험 업계에서 최연소 지점장이 탄생되는 순간. 그것도 관리직 출신이 아닌 입사 5년차의 보험설계사가 지점장이 된 것이다.

    ‘최연소 억대 연봉 보험설계사’, ‘보험업계 최연소 지점장’….

    최씨는 현재 생명보험 업계에서 잇따라 신기록을 수립해가고 있는 ‘무서운 아이’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시작은 다른 보험설계사와 다를 바 없었다. 극심한 취업난 속에서 더욱이 지방대 출신(울산대 영문학과)인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대기업에 취업한 적도 있지만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입사가 취소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그는 결국 99년 보험설계사라는 직업을 선택했다. 아무런 편견 없이 노력한 만큼 대가가 돌아오는 몇 안 되는 직업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입사 초기 그의 첫 월급은 각종 수당을 포함해 고작 100만여원. 친구와 친척들을 괴롭히면서 ‘구걸 세일즈’를 벌이던 그는 그러나 99년 10월 종신보험 상품이 등장하면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2년간 310건의 종신보험 계약 실적을 올린 것. 당연히 그의 이런 대박 신화 뒤에는 그만의 비법이 자리잡고 있다. ‘고객의 기호 파악하기’와 완벽한 ‘애프터서비스’ 정신, 그리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신념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실제 고객을 만나면 보험 이야기는 전혀 꺼내지 않는다. 영화면 영화, 음악이면 음악, 미리 파악된 주제를 소재로 상담하면서 고객의 마음을 열고 난 후 계약을 성사시킨다. 누군가를 소개받으면 밤을 새워서라도 대화의 시나리오를 작성한다. 그에게 ‘저격수’라는 별명이 붙은 것도 ‘먹잇감’을 발견하면 절대 서두르지 않는 그의 영업 스타일 때문. 일단 계약이 성립되면 고객에게는 아름답게 편집된 사진과 선물을 배달하고, 일주일에 한 번 고객이 필요로 하는 정보를 서비스한다.

    그는 이를 위해 많은 투자를 했다. 손바닥만한 최첨단 노트북 컴퓨터와 무선 프린터, 인터넷 폰, 개인 비서에다 대형 승용차 2대 등. 고객은 그를 만나면 일단 최첨단 기계들에 사로잡힌다. 지점장이 된 후 이들을 모두 처분했지만 대신 직원들에게 휴대용 빔 프로젝트 등 최신 첨단장비를 구입해주기도 했다. 아무리 좁은 공간도 그와 그의 직원들이 가면 하나의 첨단 장비를 갖춘 회의실로 변한다.

    “세상에는 세일즈맨과 샐러리맨이라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독립의 길이고 하나는 노예의 길이다.”

    비록 존재는 샐러리맨이지만 세일즈맨을 지향하는 최씨는 ‘최연소 영업 부사장의 꿈’을 향해 오늘도 땀방울을 흘리고 있다.

    최영철 기자 ftdog@donga.com

    0에서 출발 억대 연봉 세일즈 신화를 쓴다
    웅진닷컴 세일즈우먼 김선미

    “고객의 거절은 당연 … 가려운 곳 긁어주면 계약 저절로”


    2년 3개월 전까지만 해도 웅진닷컴 김선미(35) 7245지역 국장은 지방 소도시의 지극히 평범한 전업주부였다. 오히려 스스로를 ‘일만 벌일 뿐 뭐 하나 제대로 끝낸 것이 없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연봉 1억원이 넘는 프로 세일즈우먼이다. 스스로도 믿어지지 않는 변화다.

    “제가 전남 목포에서 나고 자랐거든요. 전문대에서 임상병리학을 전공한 후 학습지 지도교사 생활을 좀 했어요. 결혼 후에도 죽 목포에서 살다 3년 전 남편 직장을 따라 여수로 왔지요.”

    2002년 7월, 우연히 여수의 한 웅진닷컴 지역국에서 개최한 어머니교실에 참가했다. 3일간의 교육이 끝나자 ‘나도 책 판매에 나서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돈벌이보다는 두 자녀에게 백과사전 등 각종 책과 교육 자료들을 쉬 접하게 해주고픈 마음에서였다. 그런데 막상 일을 시작하고 보니 슬슬 욕심이 났다.

    “처녀 적에도 이래저래 시도한 일은 많았거든요. 하지만 제대로 끝을 본 게 없었어요. 이제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됐으니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줘야겠다 결심했지요.”

    가만히 보니 책 판매 후 일상적인 사후관리는 있었지만 체계적인 애프터서비스는 부족하다 싶었다. 60권짜리 ‘비주얼 박물관’을 판매하면서 각 권의 제목, 내용, 책 읽은 날짜를 기입할 수 있는 표 한 장을 만들어 고객에게 제시했다.

    “정기적으로 들러 책을 읽어주고, 독서 진도도 점검하고, 다 읽은 뒤에는 예쁜 스티커도 붙여주겠다는 약속을 했지요. 그대로 실천했더니 고객 여러분께서 무척 좋아하시더라고요.”

    다른 영업사원들도 했을 법한 사후관리를 김국장은 한 장의 표로 체계화해 확실히 눈에 띄게 만든 것이다.

    처음에는 낯설어하고 불편해하던 주부들도 두 번, 세 번 찾아가 자녀 교육에 대한 대화를 나누다보면 절로 신뢰관계가 형성되곤 했다. 주부들의 궁금증을 해소해주기 위해서는 많은 공부가 필요했다. 우선 자신이 파는 책을 꼼꼼히 읽고 장점을 충분히 숙지했다. 또 시중에 나와 있는 교육 관련 서적을 섭렵하다시피 하며 고객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기 위해 애썼다.

    이런 그의 자세는 곧 높은 실적으로 돌아왔다. 2002년 6개월간 800만원의 순수익을 올린 김국장은 곧바로 팀장으로 승진했다. 2003년 수익은 7000여만원. 팀장이 된 지 6개월 만에 다시 국장이 됐고, 올 예상 수익은 1억원을 훌쩍 넘어선다.

    김국장은 ‘생각하며 일하기’를 중시한다.

    “팀장 때는 팀원 관리와 개인 영업을 함께 하지만 국장이 되면 ‘식구’(영업사원)들 관리하고 내방 고객 상담하는 게 주요 업무거든요. 주부들이 부업 삼아 하는 일이지만 책임감과 프로 의식을 갖도록 자극을 많이 줍니다. 핵심은 목표 설정이에요. 오늘 몇 명의 고객을 만날 것인지, 이달 매출 목표는 얼마인지, 얼마 만에 국장이 되고 싶은지 등을 직접 기록하고 그에 맞춰 활동하도록 유도하는 거지요. 밖에서 일하다 대충 집으로 돌아가지 말고 ‘아침 출근, 저녁 귀소(歸所)’ 원칙을 지키도록 요구하고요.”

    그래서 김국장은 매일 기록하는 것이 많다. 다이어리부터 직원 각 개인별 ‘생산 현황표’까지. 오늘 누가 몇 명의 고객을 만났는지 꼼꼼히 체크해가며 함께 전략을 세우고 타개책을 의논한다.

    김국장은 직원들에게 “고객의 거절은 당연한 것”이라 말한다.

    “저도 과거에는 누가 ‘책 좀 보세요’ 하면 문 안 열어주고 그랬거든요. 처지 바꿔 생각하면 금방 이해되는 일이지요. 거절에 맘 상하기보다는 ‘죄송합니다. 다음에 다시 오겠습니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밝게 외칠 수 있는 자세가 중요한 거죠.”

    김국장은 자신의 성공에 대해 ‘특별한 게 아니라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요즘은 회사 영업 체계나 교육 자료들이 워낙 잘돼 있어 그대로 충실히 따르기만 해도 일정 수준 이상의 수익을 거둘 수 있어요. 성격이 꼭 적극적일 필요도 없고, 낯이 두꺼워야 할 필요도 없죠. 목표 의식만 확실하다면 누구나 억대 연봉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나리 기자 byeme@donga.com

    0에서 출발 억대 연봉 세일즈 신화를 쓴다
    대웅제약 마케팅 상무 백승호

    “자기 사랑해야 진정 고객 사랑… 다시 태어나도 영업 선택”



    ‘영업의 꽃’이라는 제약 영업계에서 대웅제약 백승호 마케팅 상무(43)는 살아 있는 ‘신화’이자 ‘전설’이다. 85년 대웅제약에 제약 영업직으로 입사해 2003년 6월 상무로 진급하기까지 무려 다섯 번이나 특진을 거듭했다. 특진 사례가 거의 없는 제약업계인지라 탁월한 실적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제약업계 전국 최연소 소장, 과장 승진 대상자 중 최연소 등 항상 ‘최연소’를 놓치지 않고 승진가도를 달렸다.

    그가 이끄는 사무소와 지점, 사업부는 무조건 전국 최고 실적을 올렸고 직원의 평균 연봉은 다른 부서보다 월등히 많다. 물론 그의 연봉이 억대를 넘은 것은 벌써 오래 전 일이다. 제약업계에서 영업직이 상무가 되기도 힘들지만 억대 연봉을 받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다.

    “기본급이 높고 수당이나 인센티브가 박한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제약업계 세일즈맨의 평균연봉은 높지만 억대 연봉을 받는 사람은 드뭅니다.”

    백상무는 제약 세일즈를 다른 세일즈와 비교하는 것에 거부감을 표시한다. 약품이라는 전문 상품을, 그것도 전문직 의사와 약사를 상대로 판매한다는 자체가 다른 업종에선 보기 드문 전문지식이 필요하기 때문. 그는 제약업계 세일즈맨의 평균 학력이 다른 직종 세일즈맨보다 높은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위기 상황에 도전해 극적 성공을 이끌어낸 드라마틱 세일즈의 장본인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대웅제약에 입사해 신화적 영업실적을 쌓고 있던 93년 전국 최하위 사무소인 부산 2사무소 소장으로 발령을 받는다. 당시 부산 2사무소는 목표 대비 7%의 절망적인 실적을 기록한 ‘사고’ 사무소.

    하지만 그가 소장으로 간 지 정확히 1년 만에 부산 2사무소는 전국 최우수 사무소로 탈바꿈했다. 전국 최하위 사업부였던 영남사업부도 그의 손을 거치면서 전국 최고 사업부로 부상했다. 그가 제약업계의 ‘미다스의 손’으로 불리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2002년 영남사업부 전 직원의 연봉 평균은 5000만원을 넘어섰다.

    그의 전설적 영업 방식은 ‘셀프 러브(self love)’로 집약된다. 샐러리맨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진정으로 고객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유혹을 뿌리칠 수 있다는 원리다. 이미 수차례의 강연으로 유명해진 ‘셀프 러브론(論)’은 제품에 대한 정확한 지식과 주변부를 공격하는 인간관계, 자신의 미래를 믿는 신념으로 이어진다.

    “약품을 팔려면 간호사와 사무원 등 주변 사람들과 친해져야 합니다. 그래야 약을 구매해줄 의·약사가 무엇을 원하는지 정보를 얻죠.”

    백상무는 특히 비가 오거나 눈이 오는 날, 즉 날씨가 궂은 날 더욱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치기로 유명하다. 비가 오면 세일즈맨들의 발은 묶이는 반면, 병원과 약국은 한가한 경우가 많은 까닭. 또 비나 눈을 맞으며 들어가면 열 중 아홉은 감동을 받는다는 것.

    “영업은 엔도르핀이 들어 있는 마약입니다. 다시 태어나도 영업직을 택할 것입니다. 목표와 마인드만 있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권하고 싶은 직업입니다.”

    백상무는 억대 연봉을 꿈꾸는 세일즈맨 후배들에게 ‘자신을 사랑할 것’을 다시 한번 당부했다.

    최영철 기자 ftdo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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