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09

2003.11.13

원초적 몸짓 ‘인간의 절망’ 말하다

  • 전원경 기자 winnie@donga.com

    입력2003-11-07 11: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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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초적 몸짓  ‘인간의 절망’ 말하다

    ‘댄스컴퍼니 조박’ 단원들과 함께한 박호빈.

    무용가 박호빈(36)은 흔치 않은 30대 남자무용가, 그것도 ‘전업’ 무용가다. 그의 직함은 ‘댄스컴퍼니 조박 대표’다. 국내에서 대학 강의나 학원 경영 등 다른 방법으로 생계를 꾸리지 않고 오로지 무용만 하는 남자무용가는 한 손에 꼽을 정도다. 그러나 박호빈은 직접 춤을 추고 안무하며 1996년 창단한 ‘댄스컴퍼니 조박’을 여태껏 이끌어왔다. 그래서일까, 한쪽 눈에만 쌍꺼풀이 진 그의 얼굴도 어쩐지 특이해 보인다.

    그런 박호빈이 ‘댄스컴퍼니 조박’의 ‘마지막’ 무대를 준비하고 있다. 11월15일 부천 오정아트홀에서, 18, 19일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서 열리는 ‘오르페우스 신드롬 2003’과 ‘천적증후군’ 공연은 ‘댄스컴퍼니 조박’의 마지막 공연이다. 박호빈은 지난해 그의 오랜 동반자였던 조성주와 결별했다. 이와 함께 두 사람의 공동작업을 담아냈던 ‘댄스컴퍼니 조박’도 발전적 해체를 앞두고 있다.

    박호빈은 사회성 짙은 주제를 무용 무대에 불러들여 독특한 춤을 만들어내곤 한다. 마지막 공연에서 보여줄 ‘오르페우스 신드롬 2003’의 주제 역시 ‘자살’이다. 박호빈은 아내 에우리디케를 찾아 저승으로 가는 오르페우스의 모습을 자살로 해석하고 있다. “오르페우스의 저승행은 가장 사랑하는 상대를 잃은 후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장면으로도 보여집니다. 자살을 선택하는 오르페우스의 심정을 무용과 영상, 음악, 색채 등 다양한 무대요소를 통해 시적으로 표현해보려는 것이 안무 의도죠. 자연의 섭리를 어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는 인간의 절망적 심정을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무표정하고 일견 건조한 춤을 추는조성주와 화려하고도 독특한 테크닉을 보여주는 박호빈의 공동작업은 마치 요철을 맞춘 듯 꼭 들어맞았기에, 무용계 인사들은 그들의 결별을 안타까워한다. 무용평론가 장광열은 ‘댄스컴퍼니 조박’이 거둔 가장 큰 성과를 “무용에 연극성을 도입해서 드라마적인 전개를 보여준 점”이라고 평가했다. 박호빈이 애당초 무용이 아닌 연극(그는 서울예대 연극과 출신이다)을 전공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박호빈이 안무하고 박호빈, 조성주가 듀엣으로 춤춘 ‘녹색 전갈의 비밀’은 1998년 초연 이후 아직도 무용계에서 회자되는 박호빈의 대표작이다. 교미 후 수컷을 잡아먹는 암전갈이 등장하고, 암컷이 알을 낳으면서 막을 내리는 ‘녹색 전갈의 비밀’은 마치 전갈의 무늬처럼 섬뜩한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춤이었다. ‘녹색 전갈의 비밀’은 99년 미국 순회 공연 때도 큰 호평을 받았다. ‘워싱턴 포스트’지는 ‘유연한 몸동작으로 그려낸 한 편의 시(詩)’라고 평했다. 독창적인 상상력을 펼친 안무와 뛰어난 테크닉의 춤이 만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작품이었다.



    박호빈 내년 ‘까두’ 창단 예정

    원초적 몸짓  ‘인간의 절망’ 말하다

    1999년 미국 순회공연 때 큰 호평을 받았던 박호빈의 대표작 ‘녹색 전갈의 비밀’.

    박호빈의 ‘댄스컴퍼니 조박’ 외에 남자 무용가가 이끌고 있는 무용단체는 홍승엽의 ‘댄스 시어터 온’, 제임스 전의 ‘서울발레시어터’ 정도에 불과하다. 그만큼 현대무용단체의 존속은 어렵다. 가정을 이끌어야 하는 남자 무용가에게는 더더욱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폭발적 인기를 끌고 있는 발레에 비해 현대무용 애호가는 여전히 소수에 머물러 있고, 지방자치단체나 문화관광부의 지원은 항상 일회성에 그친다.

    “제가 30대 중반인데 주위를 보면 제 나이까지 버티고 있는 남자 무용가가 정말 드물어요. 또래나 선후배 무용가들이 경제적 문제 때문에 결국 무용을 포기하는 걸 볼 때마다 안타깝습니다. 나까지 포기한다면 후배들이 정말 막막하겠지 하는 생각도 들고요. 그런 생각들 때문에 무용을 계속 붙들고 있게 되는 것 같아요. 아직 우리나라의 현실이 직업적 무용가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그래도 누군가는 직업 무용가로 남아야 해요.”

    그러나 박호빈은 ‘버티고만 있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다고 한다. “나이 들수록 더 새롭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그래서 더욱 실험성을 추구하게 되는 것 같아요. 새로운 게 다 좋은 것은 아니겠지만 한 상태에 고착되는 예술은 생명력을 잃는다고 봅니다. 요즘도 ‘젊은 무용가’라는 말을 들으면 뿌듯해요.”

    그 ‘실험’의 일환으로 박호빈은 내년에 무용단체 ‘까두’를 창단한다. ‘까고 또 까도 나오는’ 양파처럼 새롭고 싶다는 뜻인 ‘까두’는 무용뿐만 아니라 영상, 분장, 무대디자인, 무대의상, 음악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이 모인 총체예술 그룹으로 탄생할 전망이다.

    ‘댄스컴퍼니 조박’의 해체와 ‘까두’의 창단에 대해 박호빈은 ‘언젠가는 오게 될 전환점이 왔을 뿐’이라고 말한다. 길고 긴 마라톤의 중간에서 반환점을 도는 것처럼, 그는 현재 반환점을 막 돌고 있다. 새로운 전환을 맞아 그가 어떤 작업을 보여줄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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