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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신화 | 우리나라의 거인신들 ④

늘 배고프고 헐벗었던 남자 ‘장길손’

가난한 조상들 풍족한 ‘밥과 옷’ 평생 소원 … 순하고 착한 행동은 민중의 바람 상징

  • 류이/ 문화평론가·연출가 nonil@korea.com

늘 배고프고 헐벗었던 남자 ‘장길손’

늘 배고프고 헐벗었던 남자 ‘장길손’

장길손이 배가 고파서 흙과 나무와 돌 같은 것을 마구 먹다가 배앓이를 하며 토해낸 것이 백두산이 되고, 태백산맥을 이루었다.

우리에게는 아주 독특한 거인신이 하나 있다. 마고와 쉐멩듸, 안가닥과 서해의 개양과는 달리 남성신이다. 이름은 장길손. 어디서 들어본 것 같지 않은가? 아주 친숙하다. 자, 필자와 함께 ‘거인신 장길손’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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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독특한 설정이다. 신이 배가 고프다니?! 거인신이니까 당연히 배가 고플 수밖에 없을까? 그렇지 않다. 거인이든 신이든 ‘먹을 게 없어서’ 늘 배가 고플 것이라는 설정은 정말 새롭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 여기서 하나 확인해두자. 우리 조상들은 ‘먹을 게 없어서 늘 배가 고팠다’는 사실 말이다. 풍요롭다 못해 낭비하는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겪어보지 않아서 늘 배고픈 게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늘 배고픈 거인 이야기가 더욱 신선하게 느껴지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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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만이라도 옷을 입어보고 싶다’는 장길손의 바람은 곧 옷에 대한 민중의 바람을 상징한다. 옷감이 모자라기 때문에 옷을 입어보고 싶다는 바람은 충족될 수 없는 그저 바람일 뿐이다.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신화 속에 살아남아 있는 마디가 ‘밥과 옷’ 이야기라는 것을 잘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 신화의 민중성을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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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면은 사람들이 어떤 이유로 거인신과 멀어지게 되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세상을 창조한 거인들은 워낙 크기 때문에 ‘우주’와 어울려야지, 사람들이 사는 마을에서 함께 살 수 있는 족속들이 아니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제우스가 거인족들과 전쟁을 벌여 거인족들을 사람들 세상에서 몰아낸다. 그래서 일부 살아남은 거인족들은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산다.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그들끼리 사는 것이다. 우리 신화에 나오는 옥황이라는 하늘신은 제우스와 신격이 비슷하다. 단군신화의 환인이나 탐라신화의 천지왕과 같은 신격이다. 여신 마고가 옥황과 다툰 흔적이 남아 있기는 하나 전쟁을 치렀다는 이야기는 남아 있지 않다. 남아 있는 우리 신화에서 거인 장길손은 사람들 세상을 스스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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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설정 재미있는 상상력

참으로 재미있는 상상이 아닐 수 없다. 아픈 배를 부여잡고 뒹굴다가 토하고 설사하는데, 웬 똥덩어리가 멀리 튀어나가 제주도까지 만들었는가 말이다. 물론 제주도가 만들어진 이유까지 설명하려고 상상력을 펼쳤겠지만.

장길손의 똥 이야기는 물론 마고의 똥 이야기가 전승된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마고가 똥오줌을 누는 일도 새 땅과 새 마을을 만드는 일이다.

궂질이라는 땅이름이 생긴 이유를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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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배고프고 헐벗었던 남자 ‘장길손’

탐라신화에 나오는 외눈박이 거인들. 이들은 어부들을 숨겨준 여신 영등을 찢어 죽인다.

그제야 정신이 든 장길손은 자기를 후대한 남쪽 농민들에게 뭔가 보답하고 싶었다. 그는 남쪽 사람들에게 거름이라도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자기가 토해놓은 백두산 위에 서서 남쪽을 향해 오줌을 누었다.

그런데 그것이 장길손의 생각과는 달리 홍수를 이루어 북쪽 사람들은 남쪽으로 밀려 내려오고, 남쪽 사람들은 더 아래로 떠내려가서 그중 살아남은 사람들이 일본 사람의 시조가 되었고, 북쪽에서 떠내려온 사람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은 우리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장길손신화는 마지막까지 거인이 인간과 어울려 살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거인이 인간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거름이 되라고 오줌을 누었는데, 그만 홍수가 져서 인간들이 모두 다 죽어버린 것이다. 이런, 세상에! 어찌 이럴 수 있는가 말이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거인신으로서는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행동이 아닌가? 애걔걔… 신이 그것밖에 안 돼? 그래서 민중들은 그야말로 ‘단순’하고 (단순하기 짝이 없다!) ‘착하디 착한’ (너무 착해서 바보 같다!) 장길손을 이야기하는 재미에 오늘날까지도 계속 이야기해온 것이다. 단순하고 착하디 착한 것! 그것이 민중의 본마음이기 때문일까?

같이 살수 없는 거인 흔적만 남길 뿐

거인 장길손의 이야기 마디들은 참으로 ‘재미있고 웃기는 이야기’로 전해 내려왔다. 장길손의 볼기를 치려다 치지 못하고 지쳐 죽었다는 또 다른 이야기 마디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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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장길손이 웃기는 주체였는데, 여기서는 되레 왕과 하인이 웃기는 주체가 되었다.

거인 장길손은 겉으로는 우습게 보인다. 그러나 좀더 깊이 들여다보면 거인의 시각과 인간의 시각이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거인의 행동은 거인다운 것으로 나타난다. 거인 장길손은 그의 생각대로 행동하고 의외의 결과에 늘 당황한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이미 거인의 시대는 가고 인간의 시대가 온 것이다. 사람 사는 세상에 같이 살 수는 없다. 거인이 인간이 될 수는 없다.

화해할 수 없는 거인과 인간의 관계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홍수다. 결국 거인이 인간을 도와주려고 눈 오줌이 홍수를 몰고 온다. 세상의 종말을 가져온다. 한 세계가 끝나는 것이다. 거인은 인간에게 세상을 창조해주었지만, 또한 세상의 종말을 가져오는 신이기도 하다. 당연히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다. 그것이 신화적 사고다. 거인신이 시작했으므로 거인신이 끝낸다.

그러므로 거인신은 멀리해야 할 신이다. 가까이할 수 없다. 그래서 죽어서 산천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자기가 만든 우주로 돌아가는 것이다. 단지 인간이 사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세계에 그 흔적을 남길 뿐….

우리 신화에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늘을 들고 있는 ‘장군’으로, 혹은 멀리 떨어진 섬에 사는 외눈박이 거인으로 위험한 거인신은 유폐된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땅속 깊은 곳 타르타로스에 가둔다. 중원의 우주거인 반고는 해체된다. 반고의 몸으로 세상을 창조하니, 그 기운은 바람과 구름이, 소리는 우레가, 왼쪽 눈은 해가, 오른쪽 눈은 달이, 팔다리와 몸통은 사방 끝과 오악이, 피는 강이, 힘줄은 지형이, 살은 논밭이, 머리털은 별이, 솜털은 초목이, 이와 뼈는 쇠와 돌이, 정액은 보석이, 땀은 비와 호수가 되었다고 한다. 북유럽 신화의 거인신 위미르의 몸도 해체되어 미드가르드라는 땅이 되고, 피는 바다와 호수, 뼈는 산맥, 이와 부서진 뼈는 바위와 자갈, 뇌수는 구름이 되었다고 한다.

물론 그 끝은 또 다른 시작이다. 인간은 여전히 살아남는다. 그래서 새로운 세상의 시조가 되는 것이다.



주간동아 409호 (p68~70)

류이/ 문화평론가·연출가 nonil@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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