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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열기 서양에서 동양으로

학계 연구 활발, 저술가들 집필 잇따라 … 한-중-일 신화 총망라에 팬터지 동화도 등장

  • < 김현미 기자 > khmzip@donga.com

신화열기 서양에서 동양으로

신화열기 서양에서 동양으로
대형서점마다 별도로 ‘신화’ 코너를 마련할 만큼 신화 읽기 붐은 아동, 청소년, 성인을 가리지 않는다.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인기에 힘입어 초등학교 학생들 사이에서 올림푸스 신들의 계보를 외우는 것이 유행이다. 그러나 현재의 신화 붐이 지나치게 서양 중심이어서 편식을 우려하는 이들도 많다. ‘산해경역주’ ‘도교와 문학 그리고 상상력’의 저자인 이화여대 정재서 교수(중문학)는 영화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을 본 후 “중국신화나 도교의 상상세계에는 서양의 것보다 훨씬 풍부한 소재가 널려 있는데도 어린 시절부터 상상력의 내용을 남의 것으로만 채우는 게 안타깝다”고 했다.

동양신화만의 독특한 재미 발산

물론 동양신화를 문학적으로 차용하려는 시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현세의 만화 ‘천국의 신화’(1996년)는 대중만화로는 처음으로 황제와 치우의 설화를 다뤘다. 중국신화에서 황제는 신들의 우두머리로 지상에 내려오면 곤륜산에 머물며 중원을 통치했다. 인간에게 농업을 가르친 염제 신농씨가 황제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자 염제의 후손인 거인족 치우가 복수의 전쟁을 벌이지만 그 역시 패배하고 죽임을 당한다. 그러나 고대신화를 모티프로 한 ‘천국의 신화’가 음란성 시비에 휘말리면서 정작 신화에 대한 관심은 사그라지고 말았다. 독재자 박정희를 미화했다는 이유로 논란이 됐던 이인화의 소설 ‘인간의 길’(1997년)에도 곤과 여희, 치우 등 중국고사를 부분적으로 차용했지만 대중적 인기를 끄는 데는 실패했다.

정재서 교수는 ‘동아시아 이미지의 계보학’이라는 글에서 유교 전통과 근대화에 밀려 동양신화는 점차 우리의 삶에서 멀어지고 그 자리를 서양신화가 대신했다고 설명한다. “근대라는 새로운 신화는 즉각 과거의 신화를 폐기했을 뿐만 아니라 황제를 제우스로, 서왕모를 헤라로, 제강을 뮤즈로, 신선을 요정으로 대체했다. 동아시아의 사라진 신들, 그들의 이미지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 신들은 4세기 도연명과 20세기 황지우의 시 속에, 19세기 루쉰(魯迅)의 ‘광인일기’와 20세기 이문열의 ‘황제를 위하여’에 살아 있다. 다만 광화문을 지키고 있는 해태 석상(시비와 선악을 판단할 줄 아는 동양의 상상 동물)을 보고도 무심히 지나치는 범인들의 눈에 띄지 않을 뿐이다.

국내 신화 열풍의 주역으로 꼽히는 작가 이윤기씨는 지난해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그리스 로마 신화전’을 돌아본 후 “머리에 사자 가죽을 쓰고 손에 뭉둥이를 든 천하장사 헤라클레스 앞에서 역시 머리에 사자 가죽을 쓰고 손에는 벼락을 든 금강역사 돋을새김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서양신화에 대한 지식은 넘쳐나고 동양신화는 기초부터 빈곤한 현실에서 양쪽을 동등하게 비교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 점에서 이윤기씨가 한 신문에 연재하고 있는 ‘한국신화`-`설화기행’은 우리의 신화를 돌아보게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는 이 연재를 통해 신화에 대한 이해 자체가 빈약한 풍토에서 “우리에게도 신화가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줌과 동시에 “독특하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신화도 알고 보면 세계신화의 맥락 속에 들어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동양신화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신화는 그리스 로마 신화만 있는 줄 알았던 사람들도 한국신화, 동양신화, 세계신화로 시야를 넓혀가기 시작했다.



신화열기 서양에서 동양으로
특히 중국신화를 소개하는 인문서들이 속속 출간되면서 동양신화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연세대 전인초 교수(중문학)는 “중국의 신화는 그것이 중국에서만 끝나지 않고 동아시아 사유의 원천이라는 점에서 우리 모두가 고유하고 있는 인식의 바탕이 된다”고 말한다.

수천년 동안 한자문화권에 속해 있으면서 중국의 신화는 알게 모르게 우리 삶 깊숙이 자리잡았다. 한 예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사당에 가면 ‘보천욕일’(補天浴日)이라는 글귀가 있는데 중국신화에 나오는 여와와 후예의 전설을 모르고는 이해하기 어렵다. 여신 여와는 진흙을 빚어 인간을 만들었는데 어느 날 하늘에 구멍이 뚫려 인간이 고통을 겪게 되자 오색돌을 녹여 하늘의 구멍을 메워(補天) 인간을 편하게 해준다. 중국신화에서는 사람의 얼굴에 뱀의 형상으로 등장한다. 후예는 요임금 시절 열 개의 태양이 한꺼번에 나타나는 바람에 세상이 타들어가자 화살을 들고 열 개의 태양을 쏘아 떨어뜨린 뒤 그중 하나를 물에 식혀(浴日) 다시 하늘에 걸어주었다고 한다. 즉 ‘보천욕일’이라는 글귀는 충무공의 위대함이 인간을 구해준 여와와 후예의 신화에 맞먹는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지난 2월 출간된 ‘중국신화의 이해’(전인초 외 3인 지음, 아카넷)는 위와 같은 내용을 포함해 중국의 신화 전반과 중국신화, 한국신화, 세계신화를 비교하는 등 그리스 로마 신화에 경도된 우리의 신화관에 균형을 잡아주는 구실을 한다. 또 김재용, 이종주 공저의 ‘왜 우리 신화인가’(동아시아)는 만주족, 몽골족, 시베리아 지역의 여러 민족의 신화를 비교하면서 특히 만주의 창세신화 ‘천궁대전’을 최초로 소개했다는 점에서 놓쳐서는 안 될 책이다. 그 밖에 ‘산해경’과 ‘포박자’ 등 고대 신화와 설화를 모아놓은 책들도 동양신화를 이해하는 데 기초자료를 제공한다.

이처럼 신화연구자들이 동양신화 읽기 붐에 불씨를 만들었다면 기름을 붓는 것은 대중 저술가들의 몫이다. 조선희씨의 ‘고리골’(문학동네)은 도교 팬터지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며 동양신화의 대중화에 기여한 흥미로운 소설이다. ‘고리골’에는 도홍경(제나라 때 관리로 도교를 종교로 완성했다)처럼 실존인물이 나오는가 하면 옥황대제와 그의 아내 서왕모, 천제의 아들 동악대제, 벽하원군, 삼모진군, 북음풍도대제 등 도교의 신들, 귀신 잡아먹는 귀신들의 왕 종규 등 온갖 귀물이 총동원돼 그리스 로마 신화에 버금가는 동양적 팬터지를 완성했다.

국내 최초의 팬터지 동화로 주목받고 있는 김진경씨의 ‘고양이 학교’는 한국, 중국, 일본, 이집트의 전설과 신화를 모티프로 했다. 이 작품을 쓰기 위해 김씨는 7년 동안 신화를 공부하면서 어떻게 하면 아이들에게 신화를 재미있게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고 한다. 그는 다음 작품으로 ‘바리데기 공주’ 설화를 염두에 두고 있다. ‘퇴마록’의 신화를 만들어낸 이우혁씨도 ‘치우전기’를 집필중이어서 동양신화는 작가들에게 새로운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다.

전인초 교수는 “신화적 사유의 근간은 환상성이며, 그 환상성은 곧 상상력이고 이것이 바로 창조력”이라고 말한다. 그동안 우리의 상상력과 창조력이 너무 멀리 떨어진 서구의 신들에게 의존했다면 이제 제우스와 헤라 대신 반고와 여와의 신화에 귀를 기울일 때다.





주간동아 325호 (p64~65)

< 김현미 기자 > khmzi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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