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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앞선 ‘아시아 경영자’ 장보고

중국 산둥 지방 신라인 발자취 답사… 제2, 3 신라방 건설 후예들 ‘구슬땀’

  • < 산둥(山東)= 황일도 기자 > shamora@donga.com

시대를 앞선 ‘아시아 경영자’ 장보고

시대를 앞선 ‘아시아 경영자’ 장보고
한사회의 시스템이 구성원의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할 때 그들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한다. 사회의 변혁을 위해 싸우거나 아니면 고향을 떠나거나. 2000년대 우리 사회의 무엇인가에 진력난 사람이 ‘한국 탈출’을 꿈꾸듯, 1200여 년 전에도 좁은 한반도를 벗어나 중국 대륙에 뿌리박은 신라인 사회가 존재했다. 5박6일(6월7~12일) 동안 재단법인 장보고 기념사업회와 동아일보사가 공동으로 주최한 ‘해상왕 장보고 중국 유적지 2차 답사’에 참가해, 9세기 중국 내 신라인 이민사회의 자취를 돌아본 기자의 머릿속에는 조국을 등질 수밖에 없던 당시 사람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지난 6월8일 아침 8시. 인천항에서 출발한 여객선을 탄 지 14시간 만에 답사단을 태운 배는 중국 산둥(山東)성의 끝자락 웨이하이(威海) 항구에 다다랐다. 황해로 깊이 돌출한 산둥 반도는 만주를 제외하고는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중국 땅. 이 지역이 중국과 한반도를 바닷길로 오가는 사람의 관문 역할을 하는 것은 12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전국에서 고루 선발한 67명의 초·중·고 역사 및 사회 담당 교사로 이루어진 답사단은 배에서 내린 뒤 곧바로 룽청(榮成)에 자리잡은 항구 석도진으로 달려갔다. 반도의 끝에 해당하는 이 지역은 9세기경 신라인 마을이 형성되어 있던 곳이다. 석도진의 뒤편 츠샨(赤山)의 안자락에는 중국 내 신라인 사회의 수장이던 장보고가 820년경 창건한 절 법화원(法華院)이 앉아 있다.

“법화원은 당시 신라인 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한 공간입니다. 마치 재미동포 사회에서 교회가 중심 역할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수백 명의 신도와 승려가 모두 신라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기록도 있지요.” 답사단 인솔 교수인 부산외국어대 역사학과 권덕영 교수의 말이다. 844년 당나라 조정의 불교탄압정책에 의해 폐쇄된 법화원을 1988년과 2000년 두 차례에 걸쳐 룽청 시 당국이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시대를 앞선 ‘아시아 경영자’ 장보고
기록에 따르면 당시 절에 딸려 있던 농토에서 나온 소출만 한 해 500석 규모. 산둥성의 환경을 고려할 때 이는 밭 13만 평에 해당하는 엄청난 규모라고 권교수는 설명한다. 한편 법화원의 단아한 뜰 안에서 열린 즉석 강연에서 중국 내 장보고 역사연구회의 장협 부회장은 “당시 인근 주민은 모두 신라인이었을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하기도 했다. 장부회장은 자신 역시 신라인의 후손이라고 말해 답사단 일행의 박수를 받았다.



당시 사람은 왜 신라를 떠나왔을까. 권교수는 크게 세 가지 원인으로 나누어 분석한다. 우선은 흉년.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기근을 피해 당나라에서 자활의 길을 찾은 사람이 한 무리다. 반복되는 신라 왕실의 권력투쟁의 와중에 망명을 선택한 사람도 있었다. 또한 신분의 한계를 극복하고 싶던 사람 역시 당나라로 향했다.

8세기 말 완도 근처 남해안에서 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장보고는 천민 출신이었다. ‘장’이라는 성 역시 당나라에 건너와 중국인 사이에 가장 흔하던 성을 따라 스스로 지어 붙인 것. 뛰어난 리더십과 무예실력이라는 자질에도 골품제의 벽을 넘을 수 없던 장보고는 812년 당나라로 건너가 산둥성의 주력부대인 무령군의 군중소장이라는 관직에 오른다. 당대 중국 최고의 문인이던 두목(杜牧)은 자신의 번천문집(樊川文集)에서 장보고의 활동을 기록하며 “어찌 동이(東夷 : 중국에서 한반도를 일컫던 말)에 인물이 없다 하겠는가”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지방 반란을 진압하는 등 무공을 세우며 승승장구한 그가 관직을 접고 신라로 귀국한 것이 828년. 황해를 무대로 준동한 해적을 소탕하고 청해진을 건설하겠다는 포부를 위해서였다.

지금의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한 후 중국과 일본을 오가는 해상무역을 장악한 장보고가 조공중심이던 무역 패턴을 자유무역으로 바꾸면서 ‘해상왕’이라 불릴 만큼 세력을 확장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 미국 하버드대의 에드윈 라이샤워 명예교수는 자신의 논문에서 청해진 세력을 상업제국(commercial empire)으로, 장보고를 무역왕(merchant prince)으로 지칭했다. 동북아 3국을 네트워크화하며 무역·조선·금융 등의 다양한 사업을 전개해 오늘날의 종합무역상사의 경영자로 성장한 그는 결국 신라 정권의 막후 실력자 자리에 오르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천민 출신이라는 한계로 인해 권력다툼에 밀려 841년 끝내 암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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룽청을 뒤로 하고 달리는 차 안에서 군산대 무역학과 김덕수 교수의 말. “청해진이 동북아시아 해상무역의 중심으로 자리잡을 수 있던 주요 원인은 각국에 흩어진 신라인 사회 덕분이었지요.” 9세기경 중국 내 신라인 사회의 성씨(姓氏)를 분석한 결과는 상당수의 신라인이 장보고처럼 스스로 성을 지은 천민 출신이었음을 입증한다. 석도진 이외에도 산둥성 동쪽 해안의 유산포·해주·영파 등이, 일본에서는 규슈의 하카다·우사가 신라인의 주요 거주지였다.

이튿날 답사단이 찾은 옌타이(煙臺)는 9세기 산둥성 국제무역의 중심지였다. 옌타이의 주요 항구인 등주의 포구에는 7세기 중반부터 신라 상인들의 도시형 촌락 신라방이 존재했으며 신라관이라는 관청을 설치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김덕수 교수는 신라관이 오늘날의 대사관과 무역대표부의 기능을 겸한 것으로 추측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천 년을 훨씬 넘긴 후에야 이곳을 찾은 답사단에게는 이들의 정확한 위치나 자취를 확인할 길이 없었다. 명나라 때 만들어진 수성(水城)만이 웅대한 규모를 자랑하며 많은 중국인 관광객들의 발길을 재촉할 따름이다.

장보고 시대 이전부터 등주항은 고구려와 백제 유민의 생활 터전이었다. 한반도에서 건너간 고구려 출신 장수 이정기가 10만에 이르는 대군을 거느리고 일종의 자치구를 세워 중앙 정부와 대립각을 세운 거점이 바로 이 도시였던 것. 781년 이정기가 병사하고 난 뒤 남은 세력을 정벌한 것이 장보고가 속해 있던 무령군 부대였다. 이후 일대에 뿌리내리고 있던 이정기 세력은 장보고가 산둥 지역에 신라인 사회를 건설하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권덕영 교수는 설명했다.

장보고가 살해된 이후 간신히 세력을 유지하던 청해진과 산둥성의 신라인 사회는 서서히 붕괴되었다. 츠샨의 법화원이 강제로 폐쇄된 것도 큰 타격이었다. 장보고라는 인적 구심점과 법화원이라는 공간적 구심점을 동시에 잃어버린 신라인은 당나라 사회로 동화되어 가며 민족적 정체성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귀족 출신 일부는 신라로 돌아갔지만 천민 출신이던 대부분의 이민은 쓸쓸히 중국인 사이로 흩어졌으리라는 것.

중국 왕래 ‘보따리 무역상’ 만원

시대를 앞선 ‘아시아 경영자’ 장보고
산둥성의 성도(省都)인 지난(濟南)을 거쳐 중국 내에서의 마지막 여정인 칭다오(靑島)에 이르렀다. 새롭게 떠오르는 산둥성 제일의 무역항 칭다오. 눈이 돌아갈 만큼 화려한 거리와 높이 솟은 빌딩들, 다국적기업의 간판들과 할인점들이 거리를 장식한 국제도시다. 이곳에 진출한 우리 기업만 200여 개, 상주하는 한국인만 1만 명을 헤아린다. 곳곳에는 ‘불야성 나이트클럽’ ‘경복궁’ 등 우리 말 간판을 내건 상점들이 성업중이었다. 일정을 마친 답사단이 귀국을 위해 오른 여객선 ‘골든브릿지호’는 인천과 칭다오를 오가며 상품을 나르는 ‘보따리 무역상’으로 만원이었다. 일주일에 2번 이상 중국을 왕래한다는 이들은 주저함 없이 “내 고향은 이 배”라고 말한다.

“이들이야말로 장보고의 후예들 아닐까요. 황해를 앞마당처럼 누비던 장보고 선단의 업적을 그대로 이어받았으니까요.” 답사단에 참여한 인천 인하대부속고 이정록 교사의 말이다. 중국을 오가는 많은 한국인은 산둥성 곳곳에 제2, 제3의 신라방을 건설하며 분투하고 있었다. 다시 1200년이라는 먼 세월을 지나 산둥성 한국인의 발자취를 따라올지 모를 미래의 답사단은 이들이 한국을 떠나온 이유를 어떻게 해석할까. 장보고 선단의 항로를 그대로 따라 한반도를 향해 파도를 헤치는 여객선 갑판에서 바라본 바다는 끝없이 광활해 보였다.





주간동아 2001.06.28 290호 (p52~54)

< 산둥(山東)= 황일도 기자 > shamo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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