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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만에 귀국한 ‘파리 망명객’ 이유진

꿈에 그리던 조국땅 밟아… 논란 끝에 준법서약서 쓰지 않고 귀국

  • < 김현미 기자 > khmzip@donga.com

26년 만에 귀국한 ‘파리 망명객’ 이유진

26년 만에 귀국한 ‘파리 망명객’ 이유진
간첩 누명을 쓰고 26년간 조국땅을 밟지 못하던 파리 망명객 이유진씨가 지난 6월13일 인천 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했다. 귀국 목적은 올 봄 출간한 자서전 ‘나는 봄꽃과 다투지 않는 국화를 사랑한다’(동아일보사 펴냄)의 출판기념회를 위한 것. 그러나 지난 해 재일동포 임병택씨에 이어 사실상 준법서약서를 쓰지 않고 귀국한 두 번째 해외 반체제 인사로 기록되어 많은 주목을 받았다.

‘또 다른 파리의 택시 운전사’ 이유진씨의 존재가 처음 알려진 것은 2000년 4월 ‘주간동아’를 통해서였다. 또 그 해 6월 ‘MBC스페셜’팀이 현지 취재를 통해 이씨가 간첩으로 몰리게 된 경위(이씨의 서울대 문리대 후배였던 한영길 망명사건의 내막)와 이후 이씨의 삶을 방영함으로써 많은 사람이 그 이름을 기억하게 되었다.

귀국 기자회견에 몰려든 취재진에게 그는 수줍은 표정으로 “파리 묘지에 쓸쓸히 묻힌 이응노 선생님처럼 저 역시 조국땅을 밟지 못하고 죽지나 않을까 염려했다”는 소감을 밝혔다. 실제 지난해 가을 해외 반체제 인사들에게 조건(소명절차) 없는 입국을 허가하자 이씨는 당장 한국 방문의 꿈에 부풀었다. 하지만 올 봄 재독 송두율 교수 사건이 터지면서 정부는 “소명을 강제하진 않지만 희망한다”고 다시 조건을 달았다. 이씨가 프랑스 국적자지만 과거 국가보안법을 어겼기 때문에 귀국 이후 범법 가능성을 고려해 그런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설명이었다. 이에 대해 이씨는 “잘못한 게 없는데 왜 반성문을 쓰느냐”며 귀국 포기의사를 밝혀 한때 귀국이 무산되는 듯했다.

그러나 6월 초 민가협과 천주교·불교·기독교인권위 등의 종교단체가 앞장서 ‘이유진 선생 귀국추진을 위한 모임’을 결성하고 귀국시 이씨의 신분을 보장하고 국내 체류(한 달 일정)를 돕겠다고 나서면서 일은 급진전했다.

“망명이란 항시 외롭고, 쓸쓸하고,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지난 20년간 제 삶은 분노와 슬픔이 뒤엉킨 세월이었습니다. 분노는 버티는 힘을, 슬픔은 저를 순화시키는 힘을 주었습니다. 지루하고 답답한 세월이었지만 고여 있는 것 같아도 세월은 흐르고 그 세월 속에서도 조국의 높은 담장도 저에게는 이렇게 낮아졌습니다.”



“이제 악몽은 끝났다”

그는 귀국 하루 전 작성한 ‘귀국소감문’에서 망명자의 고통을 전하며 아직도 기다림의 세월을 보내는 해외 민주인사들에게 현 정부가 포용력을 발휘해 달라는 부탁도 잊지 않았다.

이씨는 공항을 나선 후 곧장 경기도 퇴계원의 부친 묘소로 향했다. 1983년 돌아가실 때 임종을 지켜드리지 못하고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한 불효자가 처음 인사를 드리는 자리인 만큼 벅차오르는 것은 당연했다. 봉분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끼는 이씨를 지켜보며 동행한 사람도 눈시울을 적셨다. 이어 어머니와의 만남. 9년 전 노모가 직접 장남을 만나기 위해 파리로 날아온 적이 있지만 고국에서의 상봉은 또 다른 감회였다. 그는 어머니를 안고서 “어머니, 이제 악몽은 끝났어요”라며 다시 흐느꼈다.

그러나 이튿날 38년 만에 참석한 경동고 14기 동창회에서 그는 홍조 띤 얼굴로 장난기 많던 고교시절로 돌아갔다. “나 유진이야. 여러분 오랜 만에 만나서 정말 반가워.” 얼굴조차 희미해진 기억을 더듬으며 친구들과 한 명 한 명 반갑게 악수를 나눴다. 이씨의 죽마고우인 김범태씨는 지난 79년 이씨가 간첩으로 몰리자 그 사실을 곧이듣지 않았다. 위협을 무릅쓰고 기어이 파리로 가서 그는 “너 간첩되었냐? 공작원이 뭐냐?”라고 물었다. 싱거운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하는 친구를 보며 그는 간첩 혐의고 뭐고 잊었다고 말한다. 믿음과 우정은 그 후로도 20년이 넘게 지속되었다. 한 달 일정으로 고국을 방문한 이유진씨 이후, 20여 명을 헤아리는 해외 반체제 인사들 역시 소명절차 없이 귀국할 수 있을지 여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주간동아 2001.06.28 290호 (p46~46)

< 김현미 기자 > khmzi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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