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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 잘못됐다”… 목소리 키우는 재계

기업규제 완화 위한 ‘기선 제압용’인 듯… 정권 말기 ‘집단행동’ 개운치 않은 뒷맛

  • < 윤영호 기자 yyoungho@donga.com >

“정책 잘못됐다”… 목소리 키우는 재계

“정책 잘못됐다”… 목소리 키우는 재계
최근 들어 재계가 정부의 재벌정책을 잇달아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어 그 배경을 둘러싸고 여러 해석이 나오고 있다.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재벌 개혁 바람에 고개 숙이던 재벌이 정권 말기에 접어들면서 목소리를 높이는 것 아니냐는 게 일차적인 반응. 이런 가운데 재벌정책을 둘러싼 공방이 정치권으로까지 번져 한나라당이 재벌 주장에 공감하는 듯한 모습을 보임으로써 정부와 재계 사이에 형성된 전선도 ‘정부-여당 vs 재벌-한나라당’으로 확대되고 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해 이번 ‘대결’은 싱겁게 끝날 것으로 보인다. 재벌이 전선 확대에 부담을 느낀데다 정부가 재벌의 합리적인 요구는 받아들일 입장을 보이기 때문. 청와대 관계자는 “김대중 대통령은 현 정부 출범 초기부터 줄기차게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는 얘기를 해왔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고 전제, “기업 활동에 장애가 되는 규제는 당연히 완화할 방침이지만 재벌 개혁의 원칙을 허무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정부의 재벌 정책에 대해 목소리를 높인 듯하던 재벌이 꼬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은 지난 5월10일 전경련 회장단 회의. 김각중 전경련 회장 주재로 서울 힐튼호텔에서 열린 이날 회의 후 발표한 자료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날 발표문은 재계가 정부 정책에 반발하는 것으로 비친 것이 부담스러운 듯 “지금은 정부와 재계가 서로 협력해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전경련 회장단 회의 결과는 재계 인사들이 최근 정부의 재벌정책에 대해 잇달아 포문을 연 것과 비교하면 상당히 완화한 내용이다. 이와 관련, 전경련 주변에서는 “전경련 산하 한국경제연구원과 대한상의, 자유기업원 등 재계를 대표하는 단체 및 연구기관들이 나서 출자총액 제한, 30대 기업집단 지정, 적대적 인수합병 허용 등 정부의 재벌 정책을 비판, 재계의 뜻을 충분히 전달되하였다고 판단한 데 따른 태도 변화로 보인다”는 해석이 나온다.

정부의 재벌정책에 가장 먼저 포문을 연 사람은 자유기업원 민병균 원장. 민원장은 지난 5월2일 각계에 보낸 이메일을 통해 “정부가 참여연대, 민노총 등과 합세해 한국 사회를 국정파탄의 궁지로 몰아가고 있다”며 정책의 좌경화에 대항하는 국민 궐기 필요성을 주장하고 나섰다.



민원장은 나중에 “평소의 소신을 밝힌 것일 뿐”이라고 해명했지만 파문이 확산되면서 가장 곤혹스러운 반응을 보인 곳은 전경련이었다. 전경련은 지난 5월7일 “자유기업원은 1997년 4월 전경련 부설 ‘자유기업센터’로 출범했으나 99년 11월 분리 독립을 의결해 2000년 1월 사무실을 마포로 이전하면서 완전히 분리 독립했다”고 밝혀 민 원장의 주장이 전경련과는 무관함을 강조하는 등 해명에 진땀을 흘려야 했다.

민원장에 이어 박용성 대한상의 회장과 좌승희 한국경제연구원장도 지난 5월7일 각각 기자 간담회를 갖고 “출자총액이 순자산의 25%를 넘는 30대 그룹 소속기업에 대해 정부가 신규 출자를 제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거나 “한국 경제는 자본주의 체제이나 정부정책은 경쟁을 제한하는 요소가 많고, 정부가 시민단체 등의 반발을 지나치게 의식해 기업 의욕을 저해하는 정책을 양산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두 사람의 주장은 사실 새로울 것도 없는 내용. 출자총액 한도와 30대 기업집단 지정 제도 폐지는 김대중 정부 이전부터 재계가 주장한 것이고, 획일적인 부채비율(200%) 적용, 사외이사 의무 비율 역시 김대중 정부가 이 제도를 추진할 때부터 문제를 제기해 왔기 때문. 그런 점에서 전경련이 지난 5월10일 회장단 회의를 통해 “정부와 경제계가 서로 충돌하는 것처럼 언론에 보도된 데 대해 우려를 표명한” 것은 단순한 ‘치고 빠지기’식 전략만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전경련 관계자도 이와 관련, “박용성 회장이나 좌승희 원장의 발언은 재계의 숙원을 언급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임에도 민병균 원장의 ‘튀는’ 발언 때문에 부각된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자유기업원은 전경련이 통제할 수 있는 조직이 아니다”면서 “민원장의 주장은 ‘우익 마케팅’ 차원으로 보인다”고 나름대로 분석했다. 전경련이 자금을 지원할 수 없는 상황에 자생력을 갖춰야 하는 자유기업원으로서는 ‘우익’쪽 입장을 적극 대변, 이들의 지원을 이끌어내려는 목적이 있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다.

재계 일각에서는 민원장 등 최근 재계 인사들의 발언이 궁극적으로 시민단체인 참여연대를 겨냥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기회에 참여연대를 ‘좌경’ 세력으로 규정, 정부와의 고리를 단절해 참여연대의 활동을 위축시키려는 차원이 아니겠느냐는 것. 삼성전자의 지배구조에 대한 문제제기에서 보듯 재벌들은 그동안 참여연대의 활동을 눈엣가시처럼 생각해 왔던 게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재벌 개혁은 아직도 멀었다”는 정부 관계자들의 지적이 설득력을 얻는다고 할 수 있다. 참여연대가 주장하는 내용이 우리 기업의 활동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 기업이 세계를 무대로 뻗어나가기 위한 글로벌 스탠더드와 관련한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들이 하필이면 이 시점에서 정부의 재벌정책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쏟아냈는지다. 청와대 관계자는 “출자총액 제한 문제만 하더라도 이 제도를 다시 도입한 99년 청와대 정-재계 간담회에서 재계측의 문제제기가 있어 충분히 토론한 문제”라면서 “재계가 지금 와서 이 문제를 다시 거론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정권 말기에 접어들었다는 인식과 자신들의 불만을 받아줄 만한 언론이 있다는 판단 아래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 아니겠느냐”고 덧붙였다.

“정책 잘못됐다”… 목소리 키우는 재계
그러나 재계는 이런 해석에 대해 펄쩍 뛰는 분위기. 전경련 고위 관계자는 “재계가 어떻게 정부와 대결할 수 있겠느냐”면서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일축했다. 민주당의 한 중간 당직자도 “현 정부의 재벌 개혁은 사실은 기업 살리기 정책이지만 재벌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가진 것을 ‘빼앗기는’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현 정부에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전제하면서도 “설사 불만이 있다 해도 현재로선 이를 밖으로 표출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점에서 최근 재벌의 ‘집단 행동’은 정부의 기업규제 완화 움직임에 앞서 기선을 제압하기 위한 차원으로 보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는다. 청와대 경제수석실 관계자도 “정부가 수출 지원을 위해 규제 완화 방침을 밝히자 재계가 이 기회에 ‘끼워넣기’ 차원에서 자신들의 숙원도 거론하는 것으로 보인다”면서 “재계의 합리적인 건의는 받아들이겠지만 재벌 개혁은 포기할 수 없는 대원칙”이라고 못박았다.

정부 여당의 이런 방침은 김대중 대통령의 경제 인식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 관계자는 “우리 경제가 현재 어려운 것임은 틀림없지만 일본과 달리 꾸준히 구조조정을 추진하기 때문에 하반기 들어 세계 경제가 좋아지면 내년부터는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김대통령의 인식”이라고 전했다. 내년 경기 회복을 위해서도 재벌 개혁은 필수적이라는 설명이다.

재계도 정부의 이런 방침을 의식한 듯 지난 5월14일 서울 상의클럽에서 재경부 및 규제개혁위원회 관계자들과 가진 간담회 자리에서 전경련 등 경제5단체가 공동으로 취합한 7개 부문의 기업경영 애로사항 33건을 전달했다. 정부도 이미 수출 지원을 위해 일부 규제 완화를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정부와 여당은 종합상사에 대한 부채비율 200% 예외 적용, DA(외상 수출) 네고 한도 증액 등에 대해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당 강운태 제2정조위원장도 “영업이익을 금융비용으로 나눈 이자보상배율이 1 이상인 종합상사에 대해서는 부채비율을 예외적으로 적용하고, DA 한도도 은행 창구 지도 등을 통해 늘릴 방침”이라고 확인했다.

정부의 재벌정책에 반발하는 모습으로 비친 재계의 ‘집단행동’은 결국 정부와 재계가 머리를 맞대고 기업 경영 애로사항을 해소하기로 함으로써 당분간은 잠잠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번 파문 과정에 보인 정부와 재계의 행태는 여러 측면에서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겼다는 반응이다. 스스로 개혁에 나서기보다 정부에 떼를 써서 뭔가를 얻으려는 재벌의 행태나, 지나치게 경직된 자세로 일관하다 재벌 개혁이 기업 활동을 가로막는 규제로 인식하게 만든 정부나 ‘오십보 백보’라는 얘기다.



주간동아 2001.05.24 285호 (p36~38)

< 윤영호 기자 yyoungho@donga.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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