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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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문화재도 통일의 그날 기다린다

현화사 석등·금동 반가사유상 등 국보급문화재 북녘고향 떠나 유랑 신세

  • < 소종섭 기자 ssjm@donga.com >

    입력2005-02-21 13: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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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산문화재도 통일의 그날 기다린다
    남북으로 갈라져 애태우고 있는 것은 이산가족만이 아니다. 생물은 아니지만 ‘민족의 혼’이라는 문화재도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들이 있다. 이른바 ‘이산문화재’(離散文化財)다. 문화재도 직접이든 간접이든 분단의 아픔을 겪고 있는 것.

    분단의 아픔을 가장 절절하게 느끼고 있는 문화재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있는 ‘현화사 석등’이다. 고려 현종 2년인 1011년 개성시 장풍군 월고리(현재는 개성시 방직동)에 세워진 현화사는 고아로 자란 현종이 장성해 왕이 된 뒤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은 절. 현화사가 없어진 빈 터에 지금은 탑 돌다리 비석 등만 남아 있다. 이 가운데 탑은 북한의 국보급 문화재 41호로 지정돼 보호되고 있다.

    현화사의 불교문화재 가운데 왜 유독 석등만 남쪽으로 왔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 소재구 연구관은 “일제시대 때 남쪽으로 옮겨졌다는 것만 알 뿐 정확한 경위는 모른다”고 말했다. 문화재 전문가들은 일본 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약탈당해 남쪽으로 옮겨진 것이 아닌지 추측하고 있다.

    ‘가족과 헤어진’ 현화사 석등은 광복 이후 경복궁 내 지금의 민속박물관 주변에 전시돼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자연재해(한 문화재 전문가는 ‘지진’이라고 설명했으나 분명치 않음) 때문에 넘어진 뒤 해체돼 수장고에 들어갔다는 것. 사람으로 치면 늙고 병들어 북에 있는 형제 자매들 만날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신세라고나 할까. 소연구관은 “2003년 용산에 새 국립박물관이 만들어지면 수리-복원해 전시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이산문화재도 통일의 그날 기다린다
    국보 118호 ‘금동 반가사유상’(1964.3.30 국보지정)도 분단의 아픔을 몸으로 체험하고 있다. 높이 17cm로 미륵보살이 연꽃잎의 좌대 위에 반가(한쪽 발을 다른 쪽 허벅지에 올려놓고 앉은 자세)하고 있는 이 불상은 힘있는 눈과 꽉 다문 입에서 고구려인의 웅혼한 기상을 느끼게 하는 문화재다. 광복 직후 시가가 당시 기와집 250채 값에 달했을 정도로 상상할 수 없는 가치를 갖고 있는 문화재라는 게 전문가들의 평이다.



    이 불상은 1940년쯤 평양 평천리에 있던 일본 병기창의 우물에서 출토돼 골동상 김동현씨가 당시 기와집 세 채 값이던 6000원을 주고 입수했고, 광복 이후 등짐에 넣고 월남하면서 이산문화재가 됐다. 북한 어딘가에 있을 자신의 광배(부처의 뒤에 만든, 깨달은 자를 상징하는 둥근 모양의 장식)를 애타게 찾고 있는 중이다.

    출토 당시 이 불상은 광배꽂이는 달려 있었으나 광배는 없었다. 현재 대동풍수지리연구원을 운영하고 있는 고제희 전 호암미술관 소장품관리팀장은 “김동현씨는 월남한 뒤 ‘불상이 나온 우물에서 광배가 발견됐다’는 말을 듣고 부인을 보내 짝이 맞는지 알아보기도 했다. 또 북한에서 발행된 ‘조선학보’에 실린 규격대로 광배를 만들어 맞춰보았으나 불상의 광배꽂이와 맞지 않았다”고 전했다. 영강 7년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어 장수왕 6년, 즉 서기 418년에 만든 것으로 확인된 이 광배는 현재 평양역사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이호관 전 문화재관리국장은 “통일이 되면 북한에 있는 광배와 맞춰볼 필요가 있다”며 평양에 있는 광배가 이 불상의 광배일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았다. 소장자였던 김동현씨는 애지중지하던 이 국보 불상을 1990년초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에게 넘겨 지금은 호암미술관 소장품이 됐다.

    경복궁 내 국립문화재연구소 옆에 있는 ‘남계원(南溪院) 7층 석탑’도 이산문화재 명부에 올라 있다. 고려 충렬왕 9년(1283년)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이 탑은 1962년 12월20일 국보 100호로 지정됐다. 신라시대 석탑의 특징을 잘 반영한 고려시대 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이 탑은 원래 개성시 덕암동에 있는 남계원이라는 사찰 터에 있던 것을 조선총독부가 1915년에 서울로 옮겨온 것이다.

    이산문화재도 통일의 그날 기다린다
    기단부가 탑신과 떨어져 있어 완전한 모습을 갖추지 못한 이 탑이 원래 있던 남계원 터에는 현재 어떤 문화재가 남아 있는지 파악되지 않는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재구 연구관은 “주춧돌이라도 남아 있지 않겠느냐”고 추측하지만, 장담할 일은 못 된다. 이 탑에서 나온 감지은니사경(감색 종이에 은으로 불경을 쓴 것)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이성계 발원 사리구’도 남계원탑과 사정이 비슷하다. 1932년 10월 강원도청 산업과 주관으로 금강산 월출봉에서 방화선을 만드는 공사를 하던 중 우연히 발견된 이 석함(石函)은 1933년 조선총독부에서 사들이면서 남쪽으로 나들이 왔다. 발견 당시 석함에는 백자 사기그릇 6점과 은제 사리구 청동합 등이 들어 있었다.

    이호관 전 문화재관리국장은 “석함이 만들어진 1391년은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기 1년 전으로 그가 장차 왕이 되고자 하는 큰 뜻을 품고 사발과 사리갑을 만들어 부처님 앞에 불공을 드리고 그것을 금강산 월출봉에 묻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직 정확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사리구가 발견된 월출봉 부근에 다른 관련 문화재가 있는지 여부는 명확히 파악되지 않았다.

    국보 85호(1962.12.20 지정) ‘신묘명 금동 무량수 삼존불 입상’도 잃어버린 핏줄을 찾고 있다. 이 불상은 1930년쯤 황해도 곡산에서 나왔다고 알려졌을 뿐 정확한 출토지는 파악되지 않았다. 고구려 평원왕 13년인 서기 571년에 만들어진 이 불상은 광배 뒷면에 “다섯명의 도반(함께 수행하는 동료)이 스승과 부모를 위하여 아미타불을 조성한다”는 내용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시기적으로 1400여 년 전에 만들어졌고 광배 양쪽에도 불상이 조각된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어 일찍부터 학계의 주목을 받아온 문화재다.

    이 불상이 겪은 파란만장한 역사에 대해 고제희 전 호암미술관 소장품관리팀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당시 군수 월급이 70원 정도였는데 출토 신고를 받은 일본 고등계 형사 나카무라 산자부로는 400원을 주고 이 불상을 입수했다.

    나카무라는 산 가격의 두 배인 800원을 받고 골동상 아마이케에게 넘겼고 이것을 당시 도자기 왕이라고 불리던 이토 마키오 동양제과 사장이 3000원에 샀다. 이토가 이 불상을 세키노 다다스(도쿄대 교수로 1904년 ‘한국건축조사보고’를 발표한 건축사학자)에게 보이고 세키노가 그 가치를 인정하면서 값이 뛰기 시작했다. 광복 이후 최대의 골동품 수장가였던 장석구에게 넘어간 이 불상은 다시 당대 최고의 금속유물 전문가였던 골동상 김동현에게 2만5000원에 팔렸다.” 이 불상은 현재 호암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이호관 전 문화재관리국장은 “개성박물관의 소장품 가운데 남쪽으로 내려온 것이 많다. 그러나 이런 것을 다 이산문화재라고 하기는 어렵다”며 “정확한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문화재와 관련한 남북간 교류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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