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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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급정보 사고 파는 ‘루머 비즈니스’ 아시나요

언론에 보도되지 않는 ‘1급 뜬소문’ 제공업체 속속 등장… 비밀 많은 한국사회상 반영

  • < 허만섭 기자 mshue@donga.com >

    입력2005-02-21 13: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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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급정보 사고 파는 ‘루머 비즈니스’ 아시나요
    민주당 김성호 의원이 미국방문 때 한 여성과 성 관계를 맺은 사실이 최근 보도되면서 국회의원들의 ‘여성 관계’가 화제가 됐다. 수주일 뒤 의원들의 은밀한 사생활을 ‘총정리’했다는 ‘실명 루머’가 이-메일로, 팩스로 서울시내 대기업에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A의원: 같은 대학-과 10년 아래 여자후배에게 매달 생활비 대주고 있음, B의원: 내연의 여자와의 문제로 경찰서에 고발된 상태, C의원: 여직원과의 스캔들, D의원: 부인의 ‘사이버 외도’ 문제로 진통….’

    대중은 매스컴이 매일 홍수처럼 쏟아내는 뉴스를 접한다. 그러나 서울시내 한쪽에선 이와는 다른 성격의 정보들이 유통되고 있다. 증권가에서 이른바 ‘정보지’ ‘찌라시’로 불리는 ‘각계 동향정보’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런 것들은 청와대`-`정치권`-`관가`-`금융권`-`국내 주요 공기업 및 대기업`-`신흥 벤처기업`-`언론사에서 벌어진 비공개 사건들, 중요한 정책-인사과정의 뒷이야기, 술자리의 사담, ‘VIP’들의 얽히고 설킨 사생활을 담고 있다. 일종의 ‘현대판 구중궁궐 속 야사들’로, 사회의 소수 정보독점계층 사이에서만 유통되고 있다. 정보생산자들은 “신문, TV뉴스는 모두 ‘껍데기’다. 모든 현상에는 ‘내막’이 있는 법이다. 한국사회가 돌아가는 진짜 모습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말한다. 이중엔 ‘특종’이 될 만한 아이템이 많다. 그러나 대부분 사실 확인이 어렵다. 거짓으로 밝혀지는 경우도 잦다. 이때문에 사회에 만연된 ‘음모론’의 진원지로 지목되기도 한다.

    이런 정보들이 최근 합법적 유통시스템을 통한 ‘상업화’의 길로 접어들고 있어 여러 모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서울에서 본격적으로 ‘정보거래시장’이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고급정보 사고 파는 ‘루머 비즈니스’ 아시나요
    ‘CIB커뮤니케이션’(02-3141-6939)은 ‘비밀정보은행’(Confiden-tial Information Bank)이라는 설립취지를 회사 이름으로 쓰고 있다. 회장은 ‘국가정보원’ 소속 전직 정보요원이었던 홍성환씨다. CIB의 서비스는 국내 정치, 경제, 금융, 관가-사회, 증권-벤처업, 언론계 동향정보를 신속하게 제공하는 일이다. ‘대중매체에 보도되지 않은 것이어야 한다, 관련자는 실명을 그대로 박는다, 공개됐을 경우 사회적 파괴력이 큰 내용이어야 한다’는 게 동향정보의 조건이라고 한다.

    운영시스템은 언론사와 유사하다. 3월15일 오후 기자가 방문했을 때 서울 서교동 사무실은 텅 비어 있었다. 대부분 전직 기자 출신인 상근 직원 12명은 모두 외근 중이었다. 이들은 하루 평균 1건의 ‘영양가’ 있는 정보를 물고 밤 늦게 회사로 들어온다. 이 외 현직 기자, 대기업 정보수집팀, 정치-경제 관련 연구소 연구원 등 13명의 ‘프리랜서’가 별도의 정보를 제공한다. 3개 정도의 ‘정보지’도 참조한다고 한다. CIB는 심야 편집회의에서 30여건의 정보를 최종 가공한 뒤 유료 회원들에게 이-메일로 쏘아준다. 다음날 아침 회원들은 조간신문을 펼쳐보듯 CIB사이트(www.cibdaily.co.kr)에 뜬 정보를 체크한다.



    기자는 CIB모니터를 직접 열람해 봤다. 여권의 판교 신도시 건설 백지화-재추진, 사직동팀 해체, 현대건설자금난, 검찰의 벤처기업 주가조작 수사, 옥션 매각 등을 지난해 ‘특종’으로 소개하고 있었다. “우리는 루머도 올린다. 루머도 정보이기 때문이다. 정보지와 다른 점은 사실과 루머를 명확히 구분한 뒤 루머는 가능한 부분까지 확인을 해서 그 신뢰도를 함께 실어주는 데 있다.” 특이한 사실은 특정인과 관련된 ‘조금 심한 내용’의 경우 오전 한두 시간 정도 띄워놓은 뒤 삭제한다는 점이다. 명예훼손관련 소송을 피하면서 정보의 질적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도입한 ‘게릴라’식 방법이다.

    그렇다면 이런 정보를 사가는 소비자는 어떤 사람들일까. 주로 은행-증권-보험-캐피털 등 금융계, 대기업, 벤처기업 CEO나 임직원들이 경영에 참고하기 위해 이용하고 있다고 한다. 사용료는 월 50만원. “VIP와 관련된 물정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야 사회지도층 카르텔과 대화라도 되지 않겠는가.” 한 대기업 정보팀 직원의 말이다.

    CIB는 회원 수를 500명으로 제한할 예정이다. 여기에 언론사와 정치인은 제외된다. 회원들이 받은 정보는 타인에게 알리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최근 모 은행측은 이를 어겨 회원자격이 박탈됐다. 홍회장은 그 이유에 대해 “정보가 대중화하면 이미 정보로서의 생명은 끝난 거다. 정보는 극소수만이 알고 있을 때 가치가 있다”고 설명했다.

    최근 일간지 ‘내일신문’도 같은 사업에 뛰어들었다. CIB와 유사한 종류의 정보를 ‘CEO리포트’라는 이름으로 유료회원들에게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한 대기업 정보팀 관계자는 CEO리포트를 구해서 읽고 난 뒤 “신문기사라고 할 순 없었다. 그러나 정보지보다는 훨씬 구체적이고 ‘팩트’ 중심이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CEO리포트는 주로 대기업 경영진이 이용하고 있다. 신문사가 이런 일을 한다는 점에서 요즘 서울시내 기업가들 사이에 화제라고 한다. 내일신문 측은 이와 관련, 여러 가지 인터넷 수익사업 중 하나일 뿐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이 신문사 관계자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 CEO리포트에 관한 내용들이 밖으로 소개되지 않았으면 한다. 회원들의 요구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고급정보 사고 파는 ‘루머 비즈니스’ 아시나요
    고급정보에 접근하고자 하는 욕구가 커지고 있는 만큼 이런 류의 사업은 앞으로 더 활성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일례로 미국 수도 워싱턴은 세계적 규모의 고급정보시장이다. ‘제세그룹’이라는 민간 정보회사는 각국 대사관에 미 정부-의회의 정책, 인물관련 정보를 제공하면서 상당한 수입을 올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에서도 몇몇 외국 대사관이 CIB 등 일부 정보회사에 회원가입을 요청하거나 인수를 제의하기도 했다. S그룹 관계자는 “별도의 사내 인력을 동원해 독자적인 정치-경제-사회 정보 수집팀을 운영하는 곳은 국내에서 10대 그룹 정도다. 기업의 입장에선 차라리 정보를 사서 쓰는 것이 더 경제적인 일인지 모른다”고 말했다.

    서울 충정로 ‘와이즈’는 삼성 등 수 개의 국내 재벌 그룹 회장에게 매일 ‘해외정보 보고서’를 올리고 있다. 해외신문, 통신, 전문잡지, 외국 연구소-정부기관-국제기구의 최신보고서, 외국 민간정보업체가 제공하는 유료정보를 취합해 기업경영에 참고가 되는 정보로 ‘가공’하는 것이다. 보고서 분량은 10∼20페이지 정도. “최고급 정보일수록 내용은 명료하고 간단하다.” 와이즈 김종욱 팀장의 말이다. 와이즈는 재벌회장용 보고서를 만들어 주면서 한 회사당 월1000만∼2000만원을 받는다.

    일반인들은 주로 주식시장 주변 증권정보제공회사를 통해 특화된 정보에 접근하고 있다. 국내엔 50여 개 증권정보회사가 휴대용 단말기, 700전화서비스, 인터넷을 통해 기업-정부정책 관련 유료정보를 제공한다. 한경WOW-TV등은 월 10만원 대의 사용료를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연합뉴스’도 유료정보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벤처토피아는 기업체 CEO의 학력 경력 취미 가족관계 주량 친구관계 등 인맥정보를 월 10만원에 판매한다.

    이젠 돈으로 고급정보를 사는 시대다. 이를 보는 시각은 상반돼 있다. 긍정론자들은 정보의 질은 개인과 기업, 국가의 경쟁력과 직결된다고 말한다. 반면 심화되는 계층간 정보격차와 정보독점에 따른 유착이 사회의 ‘공정한 게임의 룰’을 해친다는 우려도 있다. 홍성환 회장은 “그러나 누구도 이 사업을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사회는 흥미진진한 비밀 이야기가 너무나 많은 사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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