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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콩글리시’ 가르치는 영어교과서

영어 때문에 이민 간다고… 오 노!

재미 황용길 박사의 경고… “말보다 머리 채우기가 중요, 한국 부모들 영어욕심 지나쳐”

  • < 황용길 미국 루이지애나대 교수 · 교육학 yhwang56@hotmail.com>

영어 때문에 이민 간다고… 오 노!

영어 때문에 이민 간다고… 오 노!
첫째 딸애와 그 밑으로 아들이 둘, 나는 세 아이를 키운다. 모두 미국에서 출생하고 자라 영어를 본토발음으로 유창하게 잘하지만 한국인을 부모로 두었으니 당연히 한국말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에 집에서는 한국말을 하도록 강조하는 한편,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부터 하나씩 붙잡고 한국어 읽기를 가르쳤다. 한국에서 초등학교 국어교과서를 구해 “가갸거겨…”를 가르치고 바둑이와 고양이를 설명하며 진땀을 뺀 덕분인지 이제는 한국말을 곧잘 한다. 특히 고등학교에 재학중인 첫째는 신통하리만큼 한국말에 능통하다.

하지만 내 아이들의 한국어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밥 먹고, 친구 만나고, 빵집 가는 데 필요한 일상표현은 막힘 없이 구사하는데 한국의 중학교 수준 이상의 책을 들이대면 깜깜 절벽이다. ‘조국광복을 위해 3·1 만세운동 때 일제에 항거해 싸우다 돌아가신 유관순 의사’와 같은 문장들이 튀어나오는데 아이들은 대책 없이 눈만 깜박인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문장에 포함된 단어를 알아야 한다. 조국광복, 3·1 만세운동, 일제, 항거, 그리고 유관순 의사와 같은 각 단어의 뜻을 우선적으로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근세역사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 각 단어가 지닌 작은 뜻을 모으고 배경과 연결해 큰 그림을 그려낼 수 있다.

하지만 내 아이들은 미국에 살면서 이런 내용들을 배울 기회가 없었으니 책을 읽기는 하되 무엇을 읽는지 모른다. 단어의 소리만 읽어낼 뿐 뜻을 가려내지 못한다. 이 경험은 내게 귀중한 가르침을 주었다. 뜻을 깨우쳐 기본적인 개념이 머릿속에 먼저 형성돼야 무엇이든 이해할 수 있고 창의력도 생긴다는 귀중한 깨우침이다. 기초를 먼저 쌓아야 공부고 무엇이고 가능하다는 말이다.

인간의 지식은 이미 있었던 역사적 사실이나 과학적 발견 또는 인간이 과거에 겪었던 경험의 기록을 바탕으로 성립된다. 따라서 새로운 지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지식의 배경을 이루는 지식을 먼저 알아야 한다. ‘기초가 있어야 공부를 한다’는 말이 그래서 생겼다. 그러나 나는 한글을 가르친답시고 글자 읽는 법만 떠들어대며 아이들에게 정작 필요한 기본개념의 형성에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 그랬으니 내 아이들이 읽을 줄은 알아도 읽는 글의 내용은 몰랐던 것이다.



내 아이들이 한글을 배우며 겪었던 문제는 사실 학교를 다녀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경험한 일이다. 미국이든 한국이든 기초 없이는 아무리 노력해도 공부의 진전이 없다.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하기다.

박사과정의 학생들로부터 중-고등학생까지 많은 수의 한국유학생들이 미국에 와 있고 그들 대부분은 신통하게도 공부를 잘한다. 실습 나간 교생들과 수습교사들을 감독하기 위해 방문한 고등학교에서도 저마다 한국학생 칭송이고, 동료 미국 교수들도 한국학생 칭찬에 침이 마른다. 하나같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공부를 잘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나 또한 우쭐해진다. 그런데 한국학생들이 어쩌면 이렇게 공부를 잘할까. 어설프고 엉성한 영어회화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모두들 1등을 휩쓸고 있는가. 기초가 튼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아이들을 포함한 미국의 아이들이 모르는 사항을 꿰차고 앉았기에 일단 영어단어를 한국어로 번역만 해내면 누구보다 이해가 빠르다. 미국에 오기 전 한국 학교에서 죽기 살기로 공부한 덕분에 생긴 기초지식의 바탕이 한국학생들의 학업에 결정적인 도움이 된다는 얘기다. 그래서 수학과 과학은 무조건 1등이고 마침내 골칫거리던 영어문제도 몇 년 내에 대부분 해결한다.

믿기지 않으리라. 그러나 미국의 역사를 미국아이들보다 한국유학생들이 더 잘 안다. 또한 같은 지식을 똑같이 가르치면 언어의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한국학생들이 빨리 배운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학교교육의 질적 차이다. 망가졌느니 무너졌느니 아우성을 치지만 그래도 한국에서 기본교육을 충실히 시켰기에 아이들의 소양이 아직까지는 전체적으로 충실하다는 사실이다. 병적으로 영어회화에 집착하는 나라 한국. 대학과 중-고등학교는 막론하고 초등학교에서도 영어로 수업을 하고 영어로만 말하는 영어 전용구역을 설치하더니 급기야 한국말도 제대로 못하는 코흘리개 아이들까지 영어유치원으로 내몰고 있다. 교실 몇 칸을 영어전용구역으로 지정하고 코흘리개 아이에게 하루에 몇 시간씩 ‘헬로’와 ‘굿모닝’을 가르친다고 과연 무슨 효과가 있을까.

요즘 한국에서는 아이들에게 확실히 영어 배울 기회를 (미리부터) 주기 위해 아예 온가족이 보따리를 싸는 ‘조기 영어교육 이민’까지 성행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영어문화권에 완전히 빠져야 제대로 영어를 배울 수 있다는 이머전(immersion)이론의 눈물어린 실천이다. 그러나 한국의 부모들은 또다시 어리석은 실수를 범하고 있다.

당장 몇 마디 미국말을 한다고 해서 아이는 결코 똑똑해지지 않는다. 머릿속을 먼저 채워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대할 때 쉽고 빨리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이 훨씬 현명한 방법이다. 우리말을 우선적으로 가르쳐 아이로 하여금 풍부한 기초지식을 습득토록 해야 한다. 영어 잘하는 사람들은 세계에 널리고 깔렸다. 하지만 세상을 바꾸는 발견과 발명을 하는 인물은 드물다. 세계의 모든 나라는 그러한 두뇌를 더욱 필요로 한다. 영어를 말할 수 있는 입은 몇 개로 족하다.

쉰이 넘은 나이로 미국에 온 아인슈타인은 영어를 못했다. 죽을 때까지 버리지 못한 강한 액센트와 어눌한 말투로 그의 강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그는 세기의 천재로 지금까지 미국인들의 추앙을 받는다. 이탈리아 출신의 과학자로 세계최초의 핵반응실험에 성공하고 연이어 수소폭탄의 원리를 발견한 페르미는 어떤가. 그 역시 영어 설움을 흠씬 겪은 사람이다.

영어와 영어회화가 문제가 아니다. 먼저 아이들에게 책을 읽혀 지식의 토대를 쌓게 하자. 그러면 수학도 잘하고 과학도 잘하며 영어도 따라온다. 기본이 있는 아이는 응용도 잘하는 법이다. 길게 보고 넓게 키워야 한다.

그래도 이꼴저꼴 다 보기 싫어 기어코 이민을 감행하겠다는 분들에게는 비행기에 오르기 전, 새로 개항한 인천국제공항의 쓰레기통에 버리고 올 사항들이 있다.

첫째, 미국에는 시험지옥이 없다는 환상. 미국도 대학엘 가야 사람 취급을 받으며 명문대학을 나와야 출세가 쉽다. 미국의 대입 역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수능시험과 학교성적이며 다른 분야의 특출한 능력으로 명문대학에 입학하는 아이들은 극소수일 뿐이다.

둘째, 미국의 학교에는 경쟁도 과외도 없다는 환상. 사람 사는 세상 치고 경쟁 없는 곳은 없으며 일류 명문대학 따지지 않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다. 미국의 족집게 과외는 한국보다 더 비싸 수능시험(SAT) 대비 특수과외의 경우 시간당 400달러를 호가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하류대학에 간다면 과외 걱정은 안 해도 되고 직장이 워낙 풍부하므로 졸업 후 취업도 용이하다. 이것이 한국과 미국의 다른 점이며 많은 분들이 미국이민을 결정하는 이유다. 대충 공부하고 취직해서 대강 살기는 미국이 쉽다. 그러나 먹고 살기 위해 사는 인생이 아니라면 깊이 생각해야 한다. 올라갈수록 경쟁은 심해진다.

셋째, 아이가 영어라도 건지리라는 기대. 미국에서 영어를 잘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로 전혀 기특하지도 특별히 칭찬할 일도 아니다. 모두가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므로 못 하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 따라서 “헬로”를 잘한다고 미국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경우는 드물고 영어를 잘하는 것보다도 기본 학과실력을 착실히 쌓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공부 못 하는 아이는 어디를 가도 고생이며 한국에서 꼴찌가 미국 온다고 갑자기 1등 하는 기적은 없다.

넷째, 아이를 다시 한국으로 귀국시켜 영어로 한몫 하게 하겠다는 야무진 꿈도 버려야 한다. 몇 년 미국에서 살고 나면 대부분의 아이들은 한국생활에 다시 적응하기 힘들다. 빈약한 학과실력으로 한국의 학교에서 생존할 수가 없으며 미국식 생활방식에 젖은 아이는 영어를 아무리 잘해도 왕따 되기 십상이다.

다섯째, 한국의 경제사정이 호전되면, 또는 가족이 자리를 잡는 대로 홀로 돌아오겠다는 비장한 계획. 이렇게 퇴로를 미리 마련하는 사람들은 양쪽 다 놓치기 쉽다. 또한 생이별 뒤, 아이들이 무엇을 배우고 어떤 인간이 되는지는 더 이상 당신이 관여할 사항이 아니다. 당신은 다만 돈 보내는 기계로서만 존재하며 아이들은 아예 잃었다고 생각하는 편이 심신건강에 유익하다.



주간동아 2001.03.29 277호 (p36~37)

< 황용길 미국 루이지애나대 교수 · 교육학 yhwang56@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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