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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동아 칼럼

잃어버린 ‘낭만’을 찾아서

잃어버린 ‘낭만’을 찾아서

잃어버린 ‘낭만’을 찾아서
지난 2월13일 세종홀 소연회장에서 열린 ‘낭만파 클럽’ 창립식에는 ‘낭만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들 500여명이 모여들었다.

‘따지지 않는다/ 차라리 내가 손해본다/ 항상 긍정적인 생각을 갖는다/ 사랑과 정을 함께 나눈다/ 조건 없이 서로 돕는다/ 나보다는 우리를 생각한다’ 등 20여 가지 강령을 내걸고 출범한 ‘낭만파 클럽’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된 것은 그만큼 이 시대가 낭만에 목말라 있다는 뜻이 아닐까.

낭만이란 시대에 따라 다르게 표현되는 행동양식이지만 그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은 결국 삶에 대한 여유라고 생각한다. “바쁘다, 바빠”를 연발하는 사람은 낭만적인 사고도, 행동도 할 수 없다.

이번에 낭만파 클럽을 만들겠다며 뜻 맞는 사람들과 만남을 갖는 동안 몇몇 사람들에게서 “무슨 배부른 소리냐”는 질책을 들었다. 그러나 20년, 30년 전에 우리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서 낭만을 찾았던가.

나를 질책한 이들은 아마도 ‘낭만’을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나 모르겠다. 어쩌면, 낭만파클럽을 먹고 살 만한 사람들끼리 모여 현실도피적이고 유희적인 삶을 즐겨보자는 모임으로 여길 수도 있겠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낭만이란 것은 힘들고 어려울 때 더욱더 빛이 나고 필요한 것이다.

젊은 시절 미군들이 입던 옷을 수선해 걸치고 구멍 뚫린 양말에 큼지막한 중고 군화를 질질 끌며 차비가 없어 먼 길을 걸어다니면서도 귀동냥으로 들은 오페라 아리아를 흥얼거릴 수 있었던 여유를 되찾자는 것이다. 앞만 바라보고 걷는 것이 아니라 옆의 동료에게, 뒤에 따라오는 후배들에게 한 번쯤 말을 건넬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세상의 변화가 아무리 빨라진다 해도, 각종 문명의 이기가 사람살이를 편하게 해준다 해도 그 중심에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사람 사이에 따뜻한 정이 흘러야 한다. 이왕 사는 인생 ‘살 맛 나게’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나’ 보다는 ‘우리’ 먼저 생각하는 삶의 여유 필요

문득 얼마 전 작고하신 이경재 신부님이 떠오른다. 나병에 걸려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안식처 성 나자로 마을을 꾸리기 위해 온몸을 다 바쳤던 이신부님이 생존해 계시다면 이 모임을 어떻게 평가하셨을지 궁금하다.

개인적으로 성 나자로 마을의 운영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가까이 뵌 신부님이야말로 진정한 낭만파였다. 모두들 외면하는 나환우들을 손수 거두신 신부님은 대한민국 그 누구보다 힘들고 바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당신의 몸을 돌볼 새도 없이 분주한 생활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고, 주위 사람들의 노고를 다독일 줄 알았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여유 있는 모습을 유지했고, ‘나’보다 먼저 ‘우리’를 생각했다.

지금 성 나자로 마을은 제법 그럴듯한 시설을 갖추고 넉넉하지는 않지만 큰 어려움 없이 운영되고 있다. 이경재 신부님의 뜻을 이어받은 봉사자들의 손길이 끊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나’보다는 남을 먼저 생각할 줄 알았던 이경재 신부와 그 뒤를 잇고 있는 많은 자원봉사자들, 그들이야말로 ‘낭만’ 숨결을 유지해온 분들이다.

따지지 않는다/ 나보다 우리를 생각한다/ 차라리 내가 손해를 본다…. 낭만파 클럽에서 새삼스레 강령으로 내걸기 전부터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몸으로 베푸는 삶, 낭만적인 삶을 실천해온 많은 분들의 노고가 세상 사람들에게 확산되어 낭만이 넘치는 사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주간동아 2001.03.01 273호 (p96~96)

  • < 이종덕 세종문화회관 총감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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