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71

2001.02.15

독일은 지금 ‘프로이센’ 열풍

건국 3백돌 옛 명성 ‘시간여행’ 다양한 행사… “군국주의 망령 살아나나” 우려 목소리 높아

  • 입력2005-03-18 13: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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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은 지금 ‘프로이센’ 열풍
    정확성, 근면, 청결, 군국주의, 또 한편으로는 근대적 개혁, 민주주의…. 이러한 다양한 얼굴로 부지중에 독일인의 민족적 특성을 빚어온 역사 속의 프로이센이 다시 떠오르고 있다. 브란덴부르크 선제후(先帝候) 프리드리히 3세가 일개 공국에 지나지 않았던 프로이센을 왕국으로 만들어 스스로 첫번째 왕으로 등극한 지 300년이 되는 2001년 1월18일을 기해 프로이센의 본거지였던 베를린과 브란덴부르크 주에서는 옛 제국의 명성을 되돌아보는 작업이 한창이다.

    독일의 시사주간지 ‘슈피겔’은 독일에서 일고 있는 프로이센 붐을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독일인들이 제국에 대한 향수와 반감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다고 전했다.

    먼저 프로이센 붐을 실감나게 만드는 것은 베를린 중심가 운터 덴 린덴 가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프리드리히 대왕의 거대한 동상이다. 한편에서는 무려 1700만 마르크를 들여 베를린 성을 개축하고 있으며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빌헬름 2세를 영웅으로 그려낸 다큐멘터리 영화가 제작됐다. 또한 베를린 시장과 브란덴부르크 주총리의 연설을 시작으로 다양한 전시회, 영화, 토론회 등 프로이 센을 조명하는 갖가 지 행사가 열릴 예정이다. 이 ‘프로이센의 해’는 독일인들을 향수에 젖게 하고 있으며 그들은 때맞춰 이른바 ‘프로이센적 미덕’을 곳곳에서 기리고 있다. 프로이센의 이야기를 싣지 않은 잡지가 없으며 기념행사가 열리지 않은 밤이 없을 정도다.

    또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프로이센 향우회, 학우회와 같은 단체들이 갑자기 무더기로 그 존재를 드러내고 있으며, 수년 전 아무런 성과없이 끝났던 이른바 프로이센 논쟁이 다시 벌어지고 있다.

    독일은 지금 ‘프로이센’ 열풍
    그러나 프로이센으로 되돌아가는 독일인들의 ‘시간여행’에 대한 유럽의 시각은 대체로 부정적이며 자국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연방대통령 요하네스 라우는 프로이센 역사를 되돌아보는 데 냉정을 유지할 것을 호소했다. 프로이센적 성향과 그 역사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쉽사리 도구화될 수 있음을 우려한 것이다. 그는 재통일 후 처음으로 맞이한 ‘프로이센의 해’에는 관용과 개혁능력, 겸손 등의 긍정적인 전통을 부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역사학자 한스-울리히 벨러의 경우 프로이센의 업적과 미덕을 기리는 축제를 통해 프로이센의 긍정적인 면만을 강조할 경우 자칫 프로이센이 지녔던 어두운 부분들을 망각할 우려가 있음을 지적한다. 오히려 이러한 축제는 군국주의와 권력 추구라는 독일 역사의 부정적인 면을 반성하고 그것을 종식할 기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프로이센을 유럽사 속의 정상적인 국가로 보고자 하는 시도는 자칫 세 가지의 중요한 측면을 놓치는 것이 된다. 즉, 전무후무하게 군대의 힘을 부상시켰던 군국주의의 문제점, 그리고 귀족사회에서 현대사회로 넘어가는 과정에 있어 프로이센이 보여준 극히 부정적인 행태, 또 하나는 전통적 권력 엘리트와 장교단, 광범위한 계층의 관료와 프로테스탄트 성직자가 연합했던 역사다. 그들은 대대적으로 결탁해 프로이센의 체제를 견고히 하고 역사 속에서 국가의 위치를 지키고자 했다. 벨러 교수는 “프로이센 역사의 그늘진 부분이 결코 은폐되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물론 프로이센은 바이마르 시대라는 민주적 역사도 지니고 있지만 바이마르 공화국은 극히 단기간의 현상에 불과했으며 너무나 깊고 짙은 몰락의 그림자를 안고 있었기 때문에 이 시기의 업적은 상대적으로 사라져버렸다. 이처럼 프로이센의 어두운 면을 결코 잊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 왕권의 상징으로서 베를린 성이 부활되는 것을 부정적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처럼 부인할 수 없는 어두운 역사의 한 장이 됐음에도 은근히 독일인들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프로이센은 어떤 국가인가. 영어 명칭으로 프러시아라 불리는 프로이센은 독일 발트해 남쪽 연안의 비슬레강과 니멘강에 이르는 프로이센 지방에서 성립되고 발전해 독일제국의 중심을 이룬 프로이센 공국과 왕국으로 발전했다. 1701년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가 국왕 프리드리히 1세로 즉위함으로써 세워진 프로이센 왕국은 영토가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어 각 지역마다 개별적인 법률과 신분제 의회를 갖고 있었는데 풍부한 자원과 중앙집권화를 통해 관료제를 정비하고 군사력을 증강했으며 절대주의 국가체제를 확립해 나갔다.

    18세기 프리드리히 2세는 절대주의를 강화하는 한편 오스트리아와의 왕위계승전쟁, 7년전쟁 등을 통해 영토를 확장했다. 그러나 경직된 신분제로 인해 국민은 국정에서 완전히 격리된 채 프랑스 혁명기를 맞게 된다. 나폴레옹 시대에 많은 영토를 잃고 국가적 위기를 겪은 프로이센 왕국은 그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국가, 사회의 근대화를 위한 일대 개혁을 단행한다. 그리고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중심적 역할을 담당해 새로운 영토를 획득하고 대국으로서의 지위를 회복하게 된다. 그러나 빈 체제하의 반동시대로 접어들면서 개혁이 정체됐고 관료절대주의로 인해 자유주의적 독일 통일 운동은 억압됐다. 1848년 3월혁명이 실패로 돌아가자 지주 지배체제는 다시 강화됐다. 이 시기 프로이센이 주도한 관세동맹은 독일의 여러 나라들을 경제적으로 규합했으나 통일 문제에 있어서 오스트리아와 분쟁을 겪게 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의 등장으로 군비가 다시 강화됐고 독일 통일이 보수적 입장에서 추진됨으로써 1871년 빌헬름 1세가 황제로 추대된 가운데 독일 제국이 성립된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독일제국이 무너지자 프로이센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일부가 됐으나 실질적으로 2차 세계대전 후 완전히 소멸되었다. 이와 같은 프로이센의 군국주의는 독일사의 가장 잔혹한 악몽이 되고 있는 나치의 등장을 부추기기도 했다. 포츠담대학의 율리우스 쇼푸스 교수는 나치가 “프로이센의 가치관을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왜곡했다”며 “자신감은 오만으로, 질서에 대한 사랑은 규칙과 선례에 대한 맹목적 신봉으로, 의무감은 잔인함으로 바뀌었다”고 평가했다.

    이러한 역사를 볼 때 프로이센의 새로운 등장에 대한 독일인들의 기대와 우려가 이해될 수 있다. 한편으로 정확함과 근면, 업적에의 성실함, 그리고 민주적이고 근대적인 개혁 정신이라는 미덕은 긍정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 프로이센 정신이다. 그러나 철저한 계급 사회, 군국주의 정신은 세계사에서 가장 민주적인 헌법을 만들어냈던 바이마르 공화국의 발전을 저해하고 결국은 히틀러의 파시즘을 등장시킨 한 요소가 되기도 했다.

    거리 복판에 새롭게 복원돼 번쩍이고 있는 프리드리히 대제의 동상을 바라보고 으리으리하게 개축될 베를린 성을 그려보는 독일인들의 마음은 두 갈래다. 한편으로는 안일함과 쾌락을 추구하는 일부 사회적 분위기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 옛 제국에 대한 회상은 위로와 향수를 가져다주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사람들은 그러한 건축물과 조형 앞에서 ‘게르만 민족의 위대성은 웅장한 건축물을 대했을 때 비로소 발현될 수 있다’고 말했던 히틀러의 궤변을 떠올리며 나치의 제3제국에 이은 ‘제4제국’의 출현을 두려워하고 있지 않을까.

    ‘프로이센’ 속에는 계몽과 전쟁, 양심과 침략성, 성실함과 허황된 호사, 현대적 국가와 계급주의 등 상반된 요소들이 담겨 있다. 그렇기 때문에,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진 먼 과거가 되어버린 듯한 프로이센은 지금도 독일인들 마음속에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야누스의 얼굴을 지닌 프로이센은 항상 그들과 함께 있었던 것이며 지금 다시 새롭게 떠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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