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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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와 장소에 맞는 처신 ‘눈치’‘융통성’은 기본

  • 입력2005-05-26 12: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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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버몬트에 온 지 얼마 안 되어 미국인 동료들과 점심시간을 즈음해 모임이 있었다. 동료들이 하나 둘씩 자리로 모여드는데 각자 점심을 식당에서 가져오는 것이 아닌가. 내 딴에는 회의를 한 후에 식사를 같이 할 줄로만 알았다. 어리둥절하는데 한 여자동료가 선뜻 묻는다. “Mr.Park! May I bring some for you?” 나는 미안한 마음이 들어 머뭇머뭇하면서 죽어가는 소리로 “That’s O.K”라고 답했다. 그날 나는 미국에서 처음으로 점심을 굶었다. 인간미란 하나도 없는 잔인한 인간들로 보였다. 재차 권하지도 않는 미국인들이.

    독일 뮌헨에서의 일이다. 새로 이사와 짐들을 차에서 옮기고 있을 때였다. 주위에 도와줄 사람이 없어 힘들게 하나 둘씩 나르는데 집주인이 도와주겠노라고 말을 하는 것 같다. 나는 선뜻 도와달라고 하기가 쑥스러워 “글쎄요, 괜찮은데요”라고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날 나는 근육통이 도질 정도로 혼자서 짐을 다 날랐다. 뒤도 안 돌아보고 들어가는 주인의 뒷모습을 보면서 독일인에 대한 인상을 고정해 버렸다. 인간도 아니다.

    서울에 처음 온 캐나다 비즈니스맨 부부가 한국인 파트너의 집에 초대받아 갔다. 초대자의 부인은 정성스럽게 한국 고유의 음식들을 준비했다. 한국인 부부는 새로운 음식이 나올 때마다 캐나다 부부에게 먹어볼 것을 권했다. 돌아오는 길에 그 캐나다인 부부는 한국인 부부의 강요(?)에 먹은 음식마저 체할 지경이었다. 한번도 아니고 여러 번 권하는 한국 사람들을 상대방 생각은 좀처럼 하지 않는 ‘밀어붙이기형’이라고 판에 박아버렸다.

    중국인들과의 거래협상이 끝나고 베이징시내의 중국음식점에서 회식이 있었다. 새로운 음식이 나올 때마다 직급이 가장 높은 중국사람이 직접 음식을 퍼주는 것이 아닌가. 한술 더 떠 독주(毒酒)를 권하는데 잔을 비우라고 성화다. 자신이 마신 빈 잔을 우리에게 확인해주면서. 그날 우리 팀은 인사불성이 되어 호텔 방에서 뻗었다.

    한 나라의 좋은 매너가 다른 나라에서는 무례나 건방짐으로 둔갑한다. 더 나아가 인간관계 형성에 직접적인 장애가 되기도 한다. ‘좋은 매너는 훌륭한 분별력을 만든다’는 서양속담이 있다. 다시 말해 때와 장소 그리고 경우에 맞도록 처신할 수 있는 눈치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어느 곳에서든 환영받으려면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려서부터 눈치나 융통성은 공공에 해로운(?) 것으로 부정적인 관점에서 인식해 왔기 때문에(눈치를 살피다, 융통성을 부리다 등) 세계인들과의 접촉에서 단번에 현지의 관행대로 맞출 수 있는 신속함과 유연함을 갖추기 어렵다. 이제는 더 이상 지구의 한쪽 저편에서 한국식 체면이나 정 때문에 굶거나 취하거나 외로워지는 한국인들이 없었으면 좋겠다. 가끔은 카멜레온이 되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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