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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따’ 자민련 ‘방황의 계절’

국회정상화 합의에 JP ”못된 선례 남겼다”…연말 이후 당 와해될 수도

‘왕따’ 자민련 ‘방황의 계절’

‘왕따’ 자민련 ‘방황의 계절’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사이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자민련은 우울해질 수밖에 없다. ‘왕따’ 신세를 면할 수 없으니….”

16대 국회가 들어선 이래 여야 관계가 호전될 때마다 자민련 사람들이 느끼는 심사는 늘 이랬다. 반면 관계가 악화되면 자민련은 내심 미소를 지으며 “원내교섭단체 구성에 성의를 보이라”고 민주당을 압박해왔다.

여야 간의 기류 변화에 따라 자민련은 일희일비(一喜一悲)해왔고, 이런 자민련의 표정은 항상 일반 여론의 요구와는 상반되는 것이었다. 자민련이 뭔가 행동에 나서면 무조건 ‘몽니’로 비칠 수밖에 없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10월5일 국회정상화 합의는 또다시 자민련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자민련이 그동안 모진 ‘수모’를 감수하면서 민주당을 압박해 ‘날치기’라는 무리수까지 두게 해 첫 관문을 넘긴 국회법 개정안이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국회법 개정안은 운영위로 환원하고 이번 회기에 심의하되, 강행 처리도 물리적 저지도 하지 않는다’는 여야 합의는 자민련 입장에선 ‘이제 꿈을 접고 포기하라’는 선고와 다름없다.

자민련은 분노하고 격앙했다. “민주당이 거짓말로 자민련을 농락하고 팔아먹어 버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분노도 잠시, 이내 우울증으로, 히스테리로 발전했다. 한나라당, 나아가 공조 관계에 있다는 민주당도 자민련의 원내교섭단체 구성을 바라지 않는다는 현실 인식이 가슴을 치게 만들었고 이젠 그 허탈감을 보상할 대상을 찾고 있는 듯하다.



자민련은 6일 오후 향후 대응방안을 놓고 의원총회에서 격론을 벌인 뒤 “더 이상 민주당이나 한나라당에 원내교섭단체 구성을 요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철저하게 ‘자민련의 길’을 가겠다고 밝혔다. “앞으로 두고보면 안다”면서….

교섭단체 구성을 ‘더 이상 요구하지 않겠다’면 이를 포기한 것인가. 물론 그건 아니다. 자민련은 교섭단체 구성 문제를 “국민의 심판에 맡기겠다”고 ‘꼬리’를 남겨뒀다. “연연하거나 구걸하지는 않겠다는 것이지 결코 포기하겠다는 것은 아니며 민주당이나 한나라당이 자발적으로 해주겠다고 나서면 그걸 막을 이유가 있느냐”는 것이다.

민주당과의 공조문제 역시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확실하게 독자노선을 걷기 위해선 이한동 국무총리도, 몇몇 장관들도 철수해야 한다는 강경 주장이 비등했지만 이 문제는 김종필 명예총재(JP)에게 결단을 요구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JP는 5일 오후 국회정상화 합의 소식을 전해들은 뒤 “아주 못된 선례를 남겼다. 앞으로 국정 난맥상을 초래할 것이다. 큰 걱정이다”고 격노한 것으로 전해졌다. “합의문의 내용이 결코 자민련에 불리한 것만은 아니다”는 민주당측의 해명에 대해서도 JP는 “아전인수식 사고가 문제”라며 한마디로 일축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JP는 향후 진로에 대해선 입을 굳게 닫고 있다. 당분간, 아니 꽤 긴 시간 침묵할 작정인 듯하다. “민주산악회가 움직이는 것은 YS가 움직이기 때문이다. JP가 움직여야 자민련이 산다”(강창희 부총재) “이제 윗사람이 분명한 의지를 보이고 선택을 할 시간이다”(이완구 의원) 등 JP의 행동을 기대하는 목소리가 드세지만 JP는 말이 없다.

한 고위당직자는 JP의 심기를 이렇게 전했다. “JP로서야 기분이 언짢지 않겠느냐. 그러나 그 양반은 절대로 직접 안 나선다. 그럴 분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지 않느냐. JP는 상황론자다. 김대중 대통령이 영수회담에 앞서 부부동반으로 식사나 같이 하자고 요청해도 꿈쩍도 안한 분이다.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판단이다.”

이 때문에 정작 가장 곤혹스러운 처지에 놓인 사람은 이한동 총리다. 당장 민주당과의 공조관계를 깨자는 목소리가 거센데 그 ‘연결고리’로 총리직에 앉아 있는 그로선 가시방석일 수밖에 없다. JP가 이를 모를 리 없다. 이총리의 마음 고생에 대해 JP는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다 듣고서 일을 하겠느냐. 모르는 체하면서 흔들림 없이 일하라”는 뜻을 전했다고 한다. 당장은 JP가 민주당과의 파경을 생각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렇다고 JP도 무한정 기다릴 수만은 없다. JP 측근들은 ‘선택의 시기’를 대략 내년 봄 이후로 보고 있다. 내년 봄이면 바야흐로 대선정국이 시작되면서 정계에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전망 아래서다. 특히 JP 측근들은 YS의 활발한 움직임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민산이 됐든 신당이 됐든, 새로운 정계의 움직임은 현상 타개가 필요한 소수세력엔 항상 주목해야 할 상황 변화일 것이기 때문이다.

JP나 자민련 역시 2002년 차기 대선에서의 ‘캐스팅 보트’ 역할을 내다보고 있다. 또 대선정국으로 접어들면 JP와 자민련의 위상은 급격하게 높아질 것이 분명하다. 그때가 되면 자민련의 숙원인 교섭단체 구성문제는 ‘요구하지 않아도’ 해결되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때까지는 어떻게든 당을 온전하게 보전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나아가 그 때까지 버텨낼 수만 있다면 지금의 형국이 나쁘다고 볼 것만은 아니다. 자민련은 4·13 총선 과정에서의 ‘공조파기’ 선언 이후 이한동 총리 추천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공조복원은 아니라고 주장해왔다. 지금까지도 공조인지 아닌지, 모호한 상태로 끌어왔다.

대선 국면에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기 위해선 이런 중립노선이 효과적이다. 특히 이번 합의문을 놓고 자민련이 “민주당에 배신당했다”고 목소리를 높여 ‘민주당 2중대’ 이미지를 불식할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할 수도 있다. 총선 때도 자민련은 똑같은 ‘배신의 논리’로 민주당과의 결별을 선언했었다.

어쨌든 교섭단체 구성 문제의 ‘원점 회귀’를 기화로 자민련은 여야 다수당, 특히 민주당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내며 모든 사안에 대해 사사건건 물고 늘어진다는 각오다. 특히 남북관계, 의약분업 등에 대해 보수 색채를 짙게 하면서 원내에서 각종 법안에 대해 선명한 입장을 밝히고 필요하다면 장외투쟁도 해가며 ‘정체성’을 과시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교섭단체를 구성하지 못한 정당의 원내투쟁엔 분명 한계가 있다. 일례로 당내에선 당장 대북 지원의 국회동의 등을 규정하는 ‘남북관계특별법’을 제정하자고 주장하지만 독자적인 발의조차 불가능하다. 한나라당과 공동 발의하는 방안도 고려할 수 있지만 자민련의 법안에 한나라당이 동조해줄 리가 없다. 한나라당은 이와 유사한 ‘대북지원특별법’을 추진하고 있다. 자민련이 정 하고 싶다면 한나라당 법안에 찬성해주는 도리밖에 없다.

장외투쟁도 마찬가지다. 자민련은 대북 관계에 대한 보수세력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의약분업을 백지화하기 위한 서명운동과 장외집회에 나서자는 계획을 구상하고 있다. 보수세력이 호응해줄 것을 기대하는 눈치다. 하지만 시민들이 이를 순수하게 받아들여줄지 의문이다. 자민련의 ‘분풀이’라는 것을 모를 리 없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자민련의 대외 강경투쟁도 오래가지 못할 것이고 결국에는 당 내부의 문제로 귀결될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이미 자민련 내부에선 국무총리와 당 총재, 국회부의장과 총재대행 겸직 등 비정상적인 지도체제를 문제삼으며 ‘근본 문제’의 해결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다.

JP가 선택을 강요당할 때까지 ‘기다림의 정치’를 고집하는 동안 자민련은 급속한 와해 국면에 빠져들 수도 있다. 소속 의원들 중에는 벌써부터 “마지막 기대를 걸어보는 것도 올 연말까지다. 이후 내 거취나 결정에 대해선 장담할 수 없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주간동아 2000.10.19 255호 (p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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