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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비밀문서로 본 한국 현대사<9>|군사분계선 표식판 보수 작전(하)

미 군부, 한반도 긴장조성 노렸다?

카터 주한미군 철수계획에 반발…표식판 보수는 ‘정치적인 작전’

미 군부, 한반도 긴장조성 노렸다?

미 군부, 한반도 긴장조성 노렸다?
군사분계선 표식 보수 작전은 단순한 말뚝 고치기가 아니었다. 미 군부 입장에서 보면, 공산주의 국가와 대치하고 있는 최전선을 건드리는 일이었다. 미군이 내세운 작전의 목적은 단순한 표식판 보수였지만, 군사분계선과 관련이 있는 북한이나 중국 등 공산 진영의 입장에서는 얼마든지 달리 해석할 수 있는 민감한 사안이었다. 미 군부 작전의 궁극적인 의도가 무엇인지 얼마든지 의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워싱턴에서도 이 보수 작전은 극비리에 진행되었다. 해럴드 브라운 국방장관이 주축이 되었다. 이 군사 작전에서 국무부가 맡은 역할은 조연이었다. 브라운 장관이 브레진스키에게 보낸 2장짜리 공문(1979년 2월27일), 역시 브라운 장관이 카터 대통령 앞으로 제출한 2장짜리 대통령 비망록(1979년 5월7일) 등 한국의 군사분계선 표식 보수 작전에 관련된 문서의 대부분은 1급 비밀(Top Secret)이다.

브라운 장관이 브레진스키 앞으로 보낸 1979년 2월27일자 1급 비밀문서에는 미군의 표식판 보수 작전 수립의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지난번 회동에서 본인이 언급했듯이, 표식판은 지난 10년 이상 보수된 적이 없어 상태가 좋지 않기 때문에 군사분계선 상에서 부주의나 실수로 인한 주요 사고의 발생 가능성이 아주 높음. 보수하지 않을 경우 표식판은 계속 부식될 것이고, 사고 발생의 가능성은 더 커질 수밖에 없음. 우리측과 북한측은 정기적으로 순찰대를 비무장지대 안으로 들여보내고 있으며, 군 사례 규정(SOP)에 따르면, 군사분계선을 벗어나는 자에게는 자동으로 사격을 가하게 되어 있음.

우리측 지휘관들은 단순히 표식판의 정확한 위치를 인식하지 못해 발생할 수 있는 심각한 사고에 대해 우려를 표한 바 있음. 베시 장군(유엔사 사령관 겸 미8군 사령관)은 정전협정에 의거, 표식판 보수에 대한 유엔사 사령관의 명백한 책임을 이행함으로써 그 부담에서 벗어나길 원하고 있음.’



유엔사령관 베시를 비롯한 미군 수뇌부는 하루 빨리 보수 작전을 시행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1978년 말에 최초 입안된 이 군사분계선 표식판 보수 작전은 3년 연기 끝에 끝내 무산되고 말았다. 1979년 말, 지난호에 소개한 국방차관보실의 보수 작전 세부 계획서(1급 비밀)는 작전 실시일에 대한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작전 추진에 관련된 모든 사항은, 덩샤오핑의 미국 방문 예정 및 최근 공개된 북한의 전투 서열(order of battle) 평가라는 두 가지 사항을 고려해 결정해야 함.

- 덩샤오핑의 방문:한국 문제는 카터 대통령과 덩샤오핑 회담의 주요 의제가 될 것임. 덩샤오핑에게 우리의 의도를 시사하지 않은 채 덩의 방미에 앞서 작전을 실시하거나 방미 직후 실시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고 사료됨. 이와 관련, 다음과 같이 세 가지 대안을 제안함.

(1) 평양이 우리의 계획에 강하게 반발할 경우, 덩샤오핑의 방미 나흘이나 닷새 전에 중국 대표가 참석하는 군사정전위원회에 우리의 계획을 통보함.

(2) 한국 문제에 대한 광범위한 안건을 토의하는 중에 덩샤오핑에게 표식판 보수 계획을 사실상 통보함.

(3) 미중 관계 정상화가 서울과 평양의 향후 관계에 대해 어떤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지 그 의미가 충분히 전달될 때까지 수개월 이 현안을 연기함.

- 북한의 전투 서열:최근 공개된 북한의 전투 서열이 언론의 주목 대상이 되고 있음. 표식판 보수 계획이 자칫 대통령의 미군 철수 계획을 둔화시키거나 폐기시키려는 목적에서 부당하게 사고를 유발시키려는 것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상황이 조성되지 않도록 각별한 주의가 요망됨.’

집권 이후, 카터 대통령과 미 군부의 알력은 점입가경이었다. 주한미군 철수 공약을 이행하겠다는 의지를 카터는 쉽게 꺾지 않았다. 군 수뇌부가 모두 나서서 카터를 집요하게 설득했음은 물론이다.

위의 비밀문서는 표식판 보수 작전 계획의 숨은 의도가 무엇이냐는 것과 관련, 당시 떠돌던 가상 시나리오를 하나 소개하고 있다. 주한미군 철수 계획에 반대하는 군 수뇌부는 한반도에 긴장을 조성할 필요를 느꼈고, 군사분계선상의 표식판 보수 작업을 핑계로 북한군을 자극, 도발을 유도함으로써 긴장을 조성하고 결과적으로는 주한미군을 계속 주둔하게 만들려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이 문서는 물론 이런 시중의 시나리오를 ‘부당’(unfairly)하다고 평하고 있다. 3년 여에 걸친 작전 계획은 끝내 무산되고 말았다. 브라운 국방장관을 비롯한 군 고위 장성 등 수뇌부는 카터 대통령은 물론 브레진스키, 사이러스 밴스 등 카터 사단의 민간인 핵심 참모들을 상대로 끈질긴 설득을 했다.

위의 문서 끄트머리에는 군부가 이 푯말 보수 작전 수행에 얼마나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알려준다.

‘국가안보회의(NSC)가 이 사안을 구체적으로 검토하고 싶어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음. 장관께서 Zbig(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보좌관)과 Cy(사이러스 밴스 국무장관)를 상대로 어떤 방법이 최선책인지를 논의해 볼 수 있을 것임. 어떤 식으로든 이 문제가 사라지지 않기를 우리는 원하고 있음.’

이런 부분들은 얼마든지 정치적 해석이 가능한 대목이다. 행간에 함축된 의미도 얼마든지 나름대로 해석해낼 수 있다. 군사 작전을 앞두고 군부가 민간인 고위 관리들을 먼저 ‘공략’하는 내부 ‘정치군사’ 전략의 일환으로 비치기에 충분한 요소가 담겨 있는 것이다.

브라운 장관이 브레진스키 앞으로 보낸 1979년 2월27일자 문서의 마지막 부분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 계획에 당신이 반대하지 않는다면, 가능한 한 빠른 시일 안에 대통령께 이 문제를 제의하기를 제안함. 다만 대통령께 제의하기 전에 밴스 국무장관과의 다음 점심 식사 때 우리가 이 문제, 특히 현재 진행중인 남북한 대화를 감안해 계획 수행 날짜를 상의해야 한다고 봄. 대통령의 승인이 있고 나면, 군사정전위원회에서 우리의 계획을 북한측에 공개적으로 통보하기 전에 의회의 몇몇 의원들과도 상의해야 할 것임.’

브라운 장관은 같은 해 5월7일, 카터 대통령에게도 보수 작전 세부 계획서가 첨부된 2장짜리 1급 비밀 비망록을 제출한다.

‘본인은 이 계획이 심사숙고 끝에 입안된 것임을 확신함. 문제가 발생할 만한 어떠한 가능성이라도 발견될 경우 보수 작업을 중단하거나 연기함으로써 위험 부담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조치해 놓았음.

이 문제는 이미 밴스 장관 및 브레진스키 보좌관과 상의를 끝냈으며, 그들은 작업을 추진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음. (중략) 각하의 한국 방문 전에는 절대 추진시키지 않을 것임. 늦가을까지 계획 수행을 연기해놓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사료됨.’

그러나 이 작전 계획은 1979년 늦가을에도 실시되지 못했다. 이듬해인 1980년 4월28일, 글라이스틴 주한 미대사가 워싱턴 국무장관 앞으로 타전한 비밀 전문의 내용 전문(全文)이 백악관 상황실에도 날아들었다. 석장짜리 2급 비밀(Secret) 전문이었다. 군사분계선 표식판 보수 작업 계획이 최종적으로 연기되었다는 사실을 밝히는 내용이었다.

‘다음은 오늘 유엔사령부 및 주한 미사령부에서 워싱턴 합참으로 타전된 메시지의 내용임. 메시지에서 밝혀져 있듯이, 본인은 상황이 호전될 때까지 표식판 보수 작업을 연기해야 한다는 결론에 동의했음.’



주간동아 2000.10.12 254호 (p7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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