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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내 ‘왕따’

수군수군… 쉬쉬… “설마 내가 왕따”

따돌리고 온갖 잡일에 바보 취급까지…일부에서 교묘한 해고수단 악용

수군수군… 쉬쉬… “설마 내가 왕따”

수군수군… 쉬쉬… “설마 내가 왕따”
내가 사표를 내면 누가 제일 좋아할까 생각해보니 그만둘 마음이 싹 가시더군요. 은근히 내가 나가기만 기다리는 사람들이 바라는 대로 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올해로 직장생활 9년째. 외국계 회사에 다니는 김안나씨(가명·32)는 요즘 말로만 듣던 ‘왕따’가 무엇인지 톡톡히 체험하고 있다.

발단은 ‘남의 말 하기 좋아하는’ 동료 여직원과 사이가 틀어진 것. 입사 때부터 성격이 맞지 않아 데면데면 지냈는데, 이 여직원이 새로 온 한국인 지사장과 인사담당자의 총애를 받으면서 날로 콧대가 높아졌다.

그 여직원과 업무관계로 크게 싸운 뒤 김씨를 대하는 직원들의 태도가 노골적으로 변했다. 서먹서먹하게 굴고 아예 김씨가 말을 하면 못 들은 척하기도 했다. 그 여직원과의 싸움에 대해서는 모두 “참지 않고 화를 낸 당신이 더 나빴다”는 식으로 말했다. 때로는 대화하는 체하면서 유도심문을 했다. “너는 회사경영이 잘 되고 있다고 생각하느냐”며 질문을 해놓고 김씨의 입에서 비판적인 의견이 나오면, 당장 회사에 대해 나쁘게 말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말 한 마디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스스로 말을 아끼고 가급적 사적인 대화를 하지 않게 됐다.

한달 뒤 직속상사가 부르더니 “너처럼 능력있는 사람이 이 회사 말고 갈 곳이 없겠느냐”고 은근히 나가달라는 뜻을 비쳤다. 우연히 다른 직원들끼리 수군거리는 것을 듣고 자신이 연봉에서도 불이익을 당하고 있음을 알게 됐다.



문제는 김씨가 사람들이 왜 자신을 따돌리는지 정확한 이유를 모른다는 것이다. 다만 윗사람 비위를 잘 맞춰줄 정도로 싹싹한 성격이 아닌 것이 김씨의 흠이라면 흠. 영문도 모른 채 김씨는 외톨이가 됐다.

권영임씨(41)는 여고를 졸업하고 70년대 말 대한중기에 입사해 97년 IMF로 명예퇴직하기까지 20년 가까운 직장생활 중 온갖 종류의 ‘왕따’를 다 경험했다.

“제가 다니던 대한중기가 기아에 합병되면서 처음 왕따라는 것을 경험했어요. 그래서 합병당한 회사 직원들은 대부분 오래 버티지 못하고 그만둡니다. 저는 그때 창원에서 일했는데 블루칼라 노조원들의 파업을 지지했다고 찍혀서 서울로 발령받았어요. 제가 서른 가까운 나이였으니까 당연히 연고도 없는 서울로 발령내면 회사를 그만둘 줄 알았던 거죠. 하지만 저는 서울 사무소로 출근했어요. 그러나 첫인사를 했는데 분위기가 이상했습니다. 과장이 힐끗 쳐다보더니 반갑다는 말 한 마디 하지 않는 겁니다. 그리고 밥 먹으러 갈 틈도 없이 일이 쏟아졌습니다. 미스권 볼펜 하나 가져와, 미스권 복사 좀 해와, 미스권 팩스 좀 보내줘, 미스권 커피 한 잔. 처음에는 원래 바빠서 그러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내게만 유독 심하게 구는 거예요. 제가 오기 전에 과장이 팩스로 경력을 받아보고서 ‘새로 오는 권영임이는 나이가 많고 성깔이 못됐으니 처음부터 길을 잘 들여야 한다’고 했다는 겁니다. 그런 말에 나머지 사원들이 동조한 거죠.”

현재 그는 서울여성노조 조직지원팀장으로 자신과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후배들에게 상담을 해주고 있다. 그가 회사에 다닐 때는 ‘왕따’라는 말조차 없었지만, 후배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 없는 왕따문화에 깜짝 놀랄 정도라고 말한다.

노동부가 정의한 왕따, 즉 집단따돌림은 “사업주, 상급자 또는 근로자들이 집단을 이루어 특정인을 그가 소속한 집단 속에서 소외시켜 구성원으로서의 역할 수행에 제약을 가하거나 인격적으로 무시 혹은 음해하는 정신적, 육체적 가해행위”이다.

그러나 왕따문제가 해결되기 어려운 이유는 실체가 분명치 않다는 데 있다. 노동부의 ‘직장내 집단따돌림 방지대책’을 보면 “별다른 죄의식 없이 재미삼아 시작하는 경우가 많고, 조직구성원들의 묵시적 동조하에 은밀히 이루어지며, 집단 대 개인의 관계로 개인 혼자서 대응하기 어렵고 만약 외부에 도움을 요청하면 조직적응력 부족이나 직무능력 부족으로 오인받아 오히려 불이익을 자초하게 된다”고 돼있다.

평화노무사사무소의 현능섭 노무사는 “상사의 성희롱이나 괴롭힘에 대해 상담하는 전화는 많지만, 막상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하면 꽁무니를 뺀다”고 말한다. 신분이 드러나면 당장 회사로부터 불이익을 당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또 회사와 정면으로 충돌해봤자 이득이 없다는 판단도 직장내 왕따 피해자들이 소극적으로 행동하게 만든다. 결국 왕따 피해자는 회사를 그만두거나 당하면서 참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1년 전 동료들로부터 바보 취급을 당하다 회사를 그만둔 박모씨가 분을 삭이지 못하고 결국 동료직원을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노동부는 직장내 왕따가 위험수위에 이르렀다며 ‘왕따 방지대책’을 내놓고 왕따신고센터를 설치하는 등 부산을 떨었다. 그러나 1년이 지난 지금, 그런 대책이 있었는지조차 기억하는 사람이 드물다. 사실 노동부가 왕따방지대책을 내놓은 것 자체가 왕따 피해자들이 현실적으로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없음을 인정한 셈이다. 그리고 왕따는 여전히 ‘우리사회의 문제’가 아닌 ‘무능력한 개인의 문제’로 치부된다.

PC통신에서 ‘왕따칼럼’을 진행하고 있는 유승호박사(한국문화정책 개발원 책임연구원)는 “왕따는 우리 사회의 가학성이 빚어낸 비극”이라며 개인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사회적 문제로 봐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왕따사냥을 통해 한두 사람을 묶어 집중적으로 욕하면서 함께 즐기고 그 과정에서 이야기하는 사람끼리는 ‘같은 편이 됐다’는 안도감까지 느끼는 가학성이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왕따문제를 인내가 아닌 법으로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LG전자에 근무하던 정국정씨(37)는 왕따 증거자료를 모아 소송과 구제신청에 나섰고, 민주노총과 같은 노동단체에 호소해 지지자를 만들면서 왕따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있다.

정씨는 평소 상사와의 관계가 원만치 못한 데다 부정을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어느날 조직의 비리와 문제점을 감사팀에 요청한 사실이 직속 상사들에게 알려지면서 고통의 나날이 시작됐다. 상사들은 그의 근무평점을 최하로 주어 승진에서 누락시켰고 틈만 나면 모멸감을 느끼게 했다. 한번은 부서 회식 중 상사가 갑자기 큰 소리로 “우리회사의 버러지 같은 사람이 저기 앉아 있다”며 손가락으로 정씨를 가리켰다. 그 후 그 상사는 쌓인 감정을 풀어보자며 두 사람이 따로 만난 자리에서 “너 같은 놈은 죽어버려라”며 폭언과 폭행을 가해 정씨는 전치 4주의 진단을 받기도 했다. 그 후로도 직원들에게, 정씨가 회사 PC를 사용하도록 하거나 비품을 빌려주면 책임을 묻겠다는 내용의 ‘왕따 지침서’를 보내거나 개인사물을 뒤지고 책상을 아예 치워버려 창가에 의자만 놓고 근무하도록 하는 등 괴롭힘은 끝나지 않았다. 오전 10분 휴식, 오후 10분 휴식에 화장실을 다녀올 때도 보고하라는 식의 비인간적인 지시도 있었다. 이로 인한 스트레스로 정씨는 졸도를 했고 정신과 치료까지 받았지만 결국 징계해고 당했다.

정씨는 지금까지 자신이 당한 일들을 녹음하거나 촬영하는 등 왕따 당한 증거를 남겨두었다. 그리고 자신을 폭행한 상사를 고소하고, 왕따로 인한 정신적 피해에 대해서는 산재 신청을, 노동위원회에는 부당노동행위 및 징계해고에 대한 구제신청을 해놓은 상태다.

그의 괴로운 싸움이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이것은 분명 왕따를 ‘무능한 개인의 문제’로 축소 해석하려는 우리의 시각에 큰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와 함께 왕따가 법망을 피해 근로자를 합법적으로 해고시키는 수단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노동관계법의 개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또 사업장 내에서 공인노무사와 같은 전문가를 적극 활용해 사용자와 근로자 사이에 발생하는 갈등을 최소화하려는 현실적인 노력이 따라야 한다. 예방만큼 좋은 왕따 대책은 없기 때문이다.





주간동아 2000.06.01 236호 (p60~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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