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36

2000.06.01

TK 맹주 “나야 나”

지역내 차세대 지도자 급부상…당 부총재 경선서 정면충돌

  • 입력2005-12-05 10: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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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K 맹주 “나야 나”
    98년 2월 초순. 15대 대선(97년 12월) 패배의 악몽에 시달리고 있던 한나라당이 긴장 속에 야당 전락 후 첫 선거인 ‘4·2재보선’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박정희 전대통령의 장녀인 박근혜씨가 비공개로 공천신청을 했다. 공천 희망지는 재보선이 예정된 4개 선거구 중 경북 문경-예천. 60∼70년대를 권부의 핵심인 청와대에서 ‘영애’(令愛)로, 또는 ‘퍼스트 레이디’로 보낸 그가 20년의 세월을 건너 정치일선에 나서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의 등장은 한나라당에 ‘가뭄에 단비’와 같은 것이었다. ‘박정희 향수’가 유난히 강한 대구-경북(TK)의 한 선거구에 박씨가 출마할 경우 팽팽한 선거구도가 일거에 유리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반형식 전의원 등 5명이 문경-예천에 공개로 공천신청을 한 상태였지만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의 분위기가 금새 달라졌다. 공천심사위는 박근혜씨를 공천자로 내정했다. 중앙당의 현지 실사보고 결과도 좋았다. 박씨가 출마할 경우 유력후보인 신국환씨가 자민련 공천을 받아 나오더라도 승산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 무렵 한나라당 대구시지부장이자 공천심사위원인 강재섭의원은 심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재보선의 한 선거구인 대구 달성 보선에 내세울 마땅한 후보감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달성 출신 중 유력인사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문희갑 대구시장처럼 모두 한 자리씩을 차지하고 있어 후보가 될 수는 없었다. 자천타천으로 거론된 몇몇 인사가 있었지만 여론조사를 해보면 어느 누구도 국민회의 엄삼탁후보를 누르지 못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야당으로 치르는 첫 선거라 꼭 이겨야 하는데….” 고민하던 강의원의 뇌리에 박근혜씨의 얼굴이 스치고 지나갔다. 내친 김에 바로 대구지역 의원과 위원장들의 의견을 물어보니 찬성일색이었다.

    강의원은 박씨가 왜 문경-예천을 지역구로 골랐는지 알아보았다. 박 전대통령이 젊었을 때 잠시 교편생활을 한 곳이라는 점 외에는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강의원의 설득작업이 시작됐다. 박씨에게 이렇게 전화를 했다.

    “경북은 시골로, 도시인 대구와는 다르다. 당신의 고향은 구미가 아닌가. 문경-예천에서 국회의원 한번 하려면 나가도 되지만 고향 사람도 아니어서 다음엔 쉽지 않다. 그러나 대구는 경북 출신이 다 모이는 곳 아니냐. 나도 의성 출신인데 대구에서 의원을 하고 있다. 대구에서 나오면 정치적 생명력을 오래 유지할 수 있다.” 설득이 주효했는지 박씨는 “생각해 보겠다”고 답변했다. 그리고 얼마 후 대구 달성으로 지역구를 옮겼다. ‘4·2재보선’에서 강의원은 박씨의 선거대책본부장으로 일했다. 결과는 박근혜후보 3만4271표 대 엄삼탁후보 2만563표. 기대를 훨씬 뛰어넘은 압승이었다.

    초선의원이 된 박근혜. 그것도 보선으로 금배지를 단 박근혜의원. 어쩌면 정치적으로 크게 주목하지 않아도 될 만한 인물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시작부터 ‘초선 이상’이었다. 그의 위력은 재보선 후 두 달만에 치러진 ‘6·4지방선거’에서 바로 가시화됐다.

    한나라당의 압승으로 끝난 TK지역 지방선거 당선자들 사이에 “박의원이 승리의 원동력이었다” “TK에선 박근혜가 이회창보다 더 득표력이 있다”는 말까지 나왔다.

    실제로 박의원의 지원유세 위력은 대단했다. 그가 나타나면 5000∼1만명의 군중이 모였다. 그는 전국 20여 곳을 돌며 지원유세를 했고 전국 각지에서 쏟아지는 지원유세 요청을 거절하느라 애를 먹었다. 선거 막판에는 하루 700∼800km를 옮겨다니느라 식사를 거르거나 차안에서 도시락으로 때우기 일쑤였지만 강행군을 멈추지 않았다.

    같은 해 11월26일 한나라당 전국위원회에서 이회창총재는 박의원을 여성 몫 부총재로 지명한다. ‘초광속 승진’이었다.

    그렇다고 박부총재가 ‘이총재의 화초’였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박부총재는 이총재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독자행보로 여러 차례 주목받았다. 명실상부한 지도자의 길을 걷기 위해 꾸준히 정치적 이미지 구축에 힘쓴 것이다.

    1년 반의 시간이 지난 4월, 강의원과 박의원은 ‘4·13 총선’에서 나란히 당선됐다. 강의원이 4선, 박의원이 재선. 그리고 두 사람은 김윤환 이수성 김중권씨 등이 낙마한 TK지역에서 차세대지도자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총선 직후 실시된 지역신문의 여론조사 결과도 이를 뒷받침했다. 향후 TK를 대표할 정치인으로 강재섭의원이 1위, 박근혜의원이 2위로 지목된 것이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두 사람의 ‘정면충돌’을 예상한 이는 많지 않았다. 5월31일 치러질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둘 다 당 지도부 진입을 노리겠지만 강의원은 경선으로, 박의원은 지명케이스로 부총재가 되지 않겠느냐는 게 일반적 관측이었던 것. 하지만 박의원은 “일할 수 있는 부총재가 되고 싶다”며 힘없는 지명 부총재 자리를 거부하고 경선 출마를 선언했다.

    이에 따라 TK정가에 비상이 걸렸다. 그리고 두 사람이 후보단일화를 이뤄내야 한다는 여론이 강하게 일었다. 대략 이런 논리에서였다.

    ‘1인2표식 부총재 경선에서 TK후보가 무난히 당선되려면 후보는 단 2명(대구 1명, 경북 1명)으로 압축돼야 한다. 다행히 경북은 이상득의원으로 조율이 됐다. 그러나 대구에서 강-박 두 후보가 다 나오면 한 명은 대구후보 한 명은 경북후보를 찍는 구도가 완전히 깨진다.’

    하지만 후보단일화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TK의원들은 5월9일 한나라당 천안연수원에서 열린 당선자 연찬회와 5월17일 서울 오찬회동을 통해 나름의 해법을 찾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두 사람 역시 5월9일 천안연수원에서 따로 대면했지만 상대의 양보를 기대하는 게 어렵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뿐이다. 현재는 두 사람이 단일화를 아예 포기한 듯한 분위기다.

    강의원은 “박의원을 지명 부총재 케이스로 생각했다. 직접 출마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떤 공직선거라도 본인이 원하면 나갈 수 있는 것 아니냐. 말릴 수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박의원은 “솔직히 강의원이 지난번(98년 전당대회)에 총재 경선 출마 선언을 했기 때문에 이번에도 총재 경선에 나갈 것으로 알았다”며 양보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두 후보진영은 아직 자신감에 넘쳐 있다. 차기 또는 차차기를 꿈꾸는 입장인 만큼 턱걸이당선’은 있을 수 없다며 다득표를 목표로 뛰고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을 ‘마주보고 달리는 열차’에 비유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정면으로 맞부딪칠 경우 적어도 한 사람은 크게 다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강의원의 부담이 더 클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다. 그의 당초 전략은 가능성이 희박한 총재 경선에 도전하느니 ‘부총재 1위’를 발판으로 향후 대권행보에 나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박부총재라는 복병의 등장으로 경선 항해가 순탄치 않을 전망이다. 강의원이 순위에서 크게 밀리거나 자칫 낙마하기라도 하면 치유하기 힘든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그는 “몇 등을 하든지 당선만 되면 신경을 안쓴다”며 한걸음 물러서 있다.

    박의원의 부담은 상대적으로 덜한 편이다. 이기면 TK맹주 자리를 넘볼 수도 있다. 최악의 경우 낙선하더라도 ‘여성 정치인의 위대한 도전’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

    이렇게 부담의 강도가 달라서일까. 막강한 진용을 갖춘 이회창총재에 대한 두 사람의 자세가 다른 점이 눈에 띈다.

    강의원은 5월17일 서울에서 가진 대구지역 지구당위원장들과의 오찬회동에서 “경선에서 당선되면 총재 당선자를 중심으로 다음 정권 창출에 밑거름이 되겠다”고 말했다. 이총재 진영의 표를 의식한 발언이었다.

    반면 박부총재의 자세는 당차다. 그는 총선 직후부터 “당 안팎에 (이총재의) 사당화에 대한 비판이 있다”고 각을 세워왔다. 최근엔 경선이 불공정하게 흐르고 있다며 당 지도부를 비판하고 있다.

    한나라당 대의원들은 누구의 손을 더 높이 들어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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