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32

2000.05.04

속내 숨긴 축하 ‘두 얼굴의 미국’

“회담 성사 역사적인 일” 환영 속 주한미군 위상 등 득실 계산 분주

  • 입력2005-10-14 13:28: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속내 숨긴 축하 ‘두 얼굴의 미국’
    남북정상회담 발표가 있은 직후 일주일간 한국과 미국은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16대 총선의 아수라장 속에서 남북정상회담은 잠시 한국에서 사라졌다. 남북 정상의 만남에 따른 의전, 정상회담 성사까지의 뒷얘기 등 부차적인 문제들만 잔뜩 화젯거리로 등장하는가 싶더니 그나마 총선에 묻혀버렸다

    한국에서 국회의원 선거가 있던 날, 미 국방부에서는 정례 기자 브리핑이 있었다. 이날의 초점은 미국의 미사일 방어망이었다. 미사일 방어 체계의 작동 여부와 이의 대응책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북한이라는 이름만 거론이 되지 않았을 뿐, 미국의 미사일 방어망 계획이 북한을 비롯한 미사일 개발국을 염두에 두고 있음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대북 정책에 관한 한 강경론 일색인 펜타곤에서는 남북정상회담에 따른 화해 분위기 같은 것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11일만 해도 국방부 탄도미사일 방어국의 카디시 중장이 의회에 출석해 북한 중국 등의 미사일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미사일 방어망 구축을 역설했고, ‘워싱턴포스트’ 등 미 언론도 남북정상회담 개최 사실에는 비중을 두되, 섣부른 낙관론은 경계하는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일관했다. 4월14일자 ‘워싱턴 타임스’의 사설 한 부분에서 이러한 분위기를 대변한다. ‘한국은 햇볕정책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라도 신중할 필요가 있고, 김대중대통령은 이번 기회를 조심스럽게 포착해야 할 것이다. 너무 빨리, 너무 많이 햇볕을 받았을 때 북한이 어떻게 나올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이 없다.’

    클린턴 행정부는 달랐다. 안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표정 관리를 해야 할 정도였다. 클린턴 대통령은 “남북한 당사자의 직접 대화는 미국이 오랫동안 지지해 온 것이며, 한반도 문제 해결의 기초”라고 박수를 쳤다. 올브라이트 국무장관도 “역사상 중요한 첫걸음”이라고 환영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주한 미군 문제, 핵 무기 개발과 미사일 등 북한의 대량 살상 무기 문제 등 껄끄러운 난제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했다.

    대신, 10일 국무부 브리핑 자리에서 기자들이 질문 공세를 폈다. 주한 미군의 위상에는 변화가 없는지, 북 고위관리의 방미는 어떻게 되는 건지, 북한 핵 및 미사일 문제가 남북정상회담 의제에 포함되는 것인지 등을 따져물었다. 21세기 미국 동북아 안보 정책의 핵심적인 현안들이었다. 제임스 루빈 국무부 대변인이 가장 자신있게 대답한 것은 “주한 미군의 위상 변화는 없다”였다.



    클린턴 행정부가 남북정상회담을 반기는 것은 사실이다. 클린턴의 대북 포용 정책을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던 공화당 주도의 의회에 할 말이 생겼기 때문이고, 대북 정책 조정관인 페리 전 국방장관의 이른바 ‘페리 프로세스’가 먹혀들고 있다는 징후가 보였기 때문이다. 포용 정책이라는 전략적 판단의 판정승이었다. 의회가 조용한 것만 봐도 일단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 정책은 남북정상회담 개최에서 힘을 얻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미국 내 보수세력은 여전히 매서운 눈초리를 풀지 않고 있다. 북한은 여전히 불량국(Rogue state)이며 테러 지원국 명단에 포함되어 있고, 미국이 가장 경계하는 핵이라는 전략 무기를 개발할 가능성이 있는 국가다. 장거리 미사일은 코앞의 불이다. 입만 열었다 하면 북한의 위협을 빼놓지 않고 강조하는 펜타곤과 CIA의 입장이 바뀌었다는 징후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불과 한달 전까지만 해도 미 태평양사령관, 주한미군사령관, 조지 테넷 CIA국장 등이 미 의회에서 북한의 군사력 증강을 두드려댔다.

    북한을 상대로 한 한국과 미국의 역할 분담은 지금까지 성공작이었다는 평이다. 김대중대통령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었다면, 미국이 맡은 것은 악역이었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문제가 악역을 맡은 미국의 단골 메뉴였다. 햇볕정책에는 이 메뉴가 빠져 있다. 그렇다고 미국이 악동 노릇만 한 것은 아니다. 미국의 대북 계산법에는 악역과 사마리아인이 공존한다.

    페리 구상의 핵심은 북미 관계의 점진적인 관계 정상화다. 차근차근 밟아나가자는 것이다. 페리와 국무부 자문관인 웬디 셔먼 대사가 이 구상의 전도사 노릇을 하고 있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를 유보시킨 것은 북미 관계 정상화로 가는 긴 여정의 첫 발걸음일 뿐이니 서두르지 말고 지켜보자는 것이 이들의 논리다. 또 북한도 나름대로의 논리를 바탕으로 행동하는 만큼 매도만 하지 말고 상대역으로 대우를 해주어야 한다는 말도 빼놓지 않는다.

    북한이 미사일 발사 실험을 중지하면 미국이 대북 경제 제재를 풀겠다고 한 것이 이 논리의 산물이었고, 실제로 그렇게 됐다. 1차적인 성공이었다. 이 페리 프로세스는 남북정상회담 발표 이후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13일 테러리즘 조정관 마이클 시언은 ‘북한이 조건을 만족시킨다면’이라는 단서를 달긴 했지만 테러 지원국 명단에서 북한을 삭제할 가능성을 내비쳤다. 북한 고위 관리의 방미를 논하던 지난달의 북미뉴욕회담 때만 해도 그럴 가능성은 보이지 않았다. 남북정상회담 개최 소식이 몰고 온 변화다.

    미 제너럴 일렉트릭(GE)이 만의 하나 있을지 모르는 북한의 경수로 사고에 대비해 미 정부에 법적 보상금 지불을 요구하고 나선 것도 남북정상회담 개최 소식과 때를 같이하고 있어 주목된다. GE는 북한의 두 개 경수로에 3000만달러어치에 달하는 증기 터빈과 장비를 공급하는 계약 회사다. 민간 차원의 대북 지원과 진출 가능성을 엿보이게 하는 움직임이다. 국무부의 카트만 대북 특사는 GE의 이 요청에 대해 “검토중”이라며 조심스럽게 화답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반대 의견이 나왔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의 칼럼니스트 짐 만이 “카트만 자신도 이런 거래가 비정상적임을 잘 알고 있을 것”이라면서 “위험한 거래”라고 들고나선 것이다.

    ‘아시안 월스트리트 저널’은 사설에서 남북정상회담을 수용한 북한의 변화를 권력 이동으로 풀이했다. 북한 내 국제주의자(Inter-nationalist)와 고립주의자(Isolationist)의 한판 싸움에서 국제주의자에게 힘이 실렸다는 것이다.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 포용정책이 겨냥했던 것이다.

    남북정상회담을 지켜보는 미국의 계산법은 신중하고 치밀하다. 대북 포용정책의 열매를 거둬들이려는 클린턴의 페리 구상과, 공화당을 중심으로 한 보수 진영 싱크탱크들의 견제력이 힘의 균형을 잃는 법이 없다. 온건이든 강경이든, 진보든 보수든, 미국의 국익 앞에서는 초록이 동색이다. 포용정책이든 봉쇄정책이든, 미국의 동북아 전략과 대북한 정책이라는 대전제 앞에서는 같은 답이 나온다. 방법론만 다를 뿐이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