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29

2000.04.13

출산휴가 가? 말어! … 블레어 “나 어떡해”

부인 은근한 압력…“아버지도 출산 책임” “총리가 무슨” 언론 시끌시끌

  • 입력2006-05-04 14:19: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출산휴가 가? 말어! … 블레어 “나 어떡해”
    영국 총리 토니 블레어가 과연 산후 ‘아버지 휴가’를 신청할까. 총리가 과연 그래도 될까.

    요즘 영국 언론은 산후 아버지 휴가문제로 논쟁이 뜨겁다. 이 토론에 불을 지핀 것은 5월24일 해산을 앞둔 총리 부인 셰리 블레어. 영향력 있는 노동법 전문 법조인이기도 한 그녀는 지난 3월 20일 런던 킹스칼리지에서 열린 ‘서기 2005년 노동법의 범유럽적 비전’이라는 강연 도중, 1998년에 이어 금년 3월초 두 번째 산후 ‘아버지 휴가’를 신청한 핀란드 총리 파보 리포넨(58)의 예를 들면서 “우리 아이들이 원만하고 균형잡힌 인격체로 성장하기를 원한다면 토니 블레어도 현대적인 아버지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넌지시 남편을 압박했다.

    법으로는 13주 무급휴가 보장

    지난해 12월부터 영국 아버지들은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아기가 태어난 시점부터 5년 동안 어느 시점에서든 13주간의 무급 휴가를 신청할 법적 권리를 갖게 되었다. 총리 부인은 총리 자신이 이 법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모범을 보임으로써 이 법안이 광범위하게 실행되는데 기여해야 한다고 공식석상에서 선언해 버린 것이다.

    셰리 블레어의 이 발언이 불씨가 되어 영국뿐 아니라 전세계 네티즌이 둘로 쪼개져 토론에 열을 올리게 되었다. 토론자들 대부분이 남녀가 동등하게 자녀 양육의 책임과 권리를 갖는다는 법정신에는 기본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심지어 영국 고용주 가운데 5분의 1이 법이 요구하지 않는 ‘유급’ 휴가까지 고려하고 있다는 조사결과도 있다. 그러나 총리라는 특수 상황이 토론을 재미있게 전개시키고 있다.



    아버지 출산휴가 옹호자들은 남자들도 ‘잠시나마’ 일보다 가족을 우선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신호탄을 쏘아달라고 요구한다. 직장일을 핑계로 아버지 일을 포기하는 남자들에게 따끔한 전범이 되어달라는 주문이다. 아무리 일중독자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일이 한 나라를 경영하는 일보다 더 중요하다고 주장할 사람은 드물겠기에, 이들은 총리 직무가 아버지 산후 휴가를 포기하는 절대적 이유가 될 수 없음을 조목조목 들어 반박한다.

    우선 이들은 토니 블레어가 매년 여름휴가를 떠난 기간에도 국정 공백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현재 토니 블레어 가족은 총리관저인 다우닝가 10번지와 노총각 재무상 고든 브라운이 식구 많은 총리 가족을 위해 양보한 재무상 관저 11번지를 함께 사용하고 있다. 그 바로 아래층이 총리 집무실이다. 심각한 비상사태가 터진다면, 토니 블레어가 집무실로 복귀하는 데는 계단을 뛰어내려오는 시간밖에 걸리지 않는다. 또한 그들은 재무상 고든 브라운을 비롯, 실력과 열정으로 뭉친 노동당 내각이 총리 집무를 무리없이 대행할 수 있을 것이니 안심하라고 부추긴다.

    사실, 영국 역사상 강력한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꼽히던 처칠의 경우도 자주 병을 앓아 집무실을 오래 비우는 일이 잦았다. 영국의 한 원로 정치 평론가는 전후의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의 내각이 무리없이 그의 공백을 메울 수 있었다는 점을 들어 토니 블레어의 아버지 출산휴가에 찬성표를 던졌다.

    한편 출산휴가 반대론자들의 목소리는 여러 가지다. 하나씩만 낳아도 만원인 지구에 네 번째 아이를 낳아 기르려는 블레어 가족에게 휴가라는 ‘상’을 줄 필요가 있느냐고 쏘아붙이는 인구론자들, 국가와 사회에서 부담해야 할 몫을 고용주에게 전가시키는 악법이라는 고용주들, 그리고 새로운 놀 구실을 찾지 말고 기존의 휴가제도를 잘 이용해야 할 것이라고 점잖게 충고하는 보수파들이 각기 논쟁의 한 줄기를 이루고 있다. 특히 미심쩍은 병가 신청과 ‘집안의 급한 일’을 우선시하는 영국인들의 잦은 결근 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고용주들은 성난 목소리로 토니 블레어가 아버지 출산휴가를 원한다면 총리직을 먼저 사임해야 된다고 외치며 그동안 쌓인 분노를 터뜨리고 있다.

    이색 의견도 만발하고 있다. 아버지 역할은 아기가 세상에 태어난 첫 다섯 해보다 청소년기에 더 중요하므로 ‘아버지 휴가’는 자식들이 대학이나 학과, 직업선택 등 인생의 중요한 기로에 서 있을 때 곁에 있으면서 실질적 도움을 주는 데 쓰여야 한다는 경험론을 펴는 어느 아버지, 집에서 며칠만 아이를 보면 아버지들이 혼비백산해서 직장으로 도망갈 궁리만 할텐데 아버지 휴가가 과연 실효를 거둘지 모르겠다고 의문을 표시하는 어느 주부 등이 논쟁의 흐름에 합류하고 있다. 빨리 결단을 내리지 않는 것은 직무유기라는 촉구가 있는가 하면, 이길 수 없는 논쟁의 딜레마에 빠진 총리를 동정하는 여론도 있다. ‘아버지 휴가’로 궁지에 몰린 토니 블레어는 앞으로 2, 3주 내에 입장을 밝히겠다고 말했다.

    남편 명성 능가하는 ‘정상급 법조인’

    일 위해 처녀 때 姓 고수… 경호원 없이 해외출장도


    논쟁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셰리 블레어 영국총리 부인은 대표적인 고용법 전문 법조인. 일을 위해서는 셰리 부스라는 처녀시절 성을 고수하며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이름 셰리 블레어와 구분해서 쓰고 있다.

    셰리 블레어는 총리 부인이라는 지위가 따로 필요없을 정도로 실력 있고 영향력 있는 영국의 대표적 지성이다. 영국의 명문 런던 정경대학(LSE)을 우등으로 졸업했고 법률고시 수석 이후 정상의 법조인으로 명성을 누려온 그녀는 언제나 토니 블레어보다 수입이 많았다. 법률사무소 견습시절 만나 인연을 맺은 토니 블레어와 셰리 부스는 똑같이 열성 노동당원이기도 했다. 골수 노동당원이자 저명한 연극배우 토니 부스의 딸인 셰리는 보수당 노선과 거의 구분할 수 없는 토니 블레어와 달리 선명 강경한 좌파다. 이들 부부는 83년 선거에서 똑같이 노동당 후보로 나섰는데 한 사람은 승리하고 한 사람은 고배를 마심으로써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승리한 사람은 정치인 최고의 자리에 올랐고 패배한 사람은 법조인으로 정상의 자리에 우뚝 선 것이다.

    최근 셰리 블레어가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서 제2의 힐러리를 경계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그녀가 “정치인들이 해외 출장에 아내를 끌고다니는 일은 없어져야 한다. 나를 보라. 나이 마흔넷의 임신 7개월짜리 임신부가 남편이 총리라는 이유만으로 러시아에 가서 지겨운 발레를 보아야 한다. 집에는 어린 세 아이를 두고 말이다”고 언론에 불평하는 것을 보면 정치인으로의 꿈은 접어둔지 오래인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지금도 자신의 일과 관련된 해외 출장은 경호원 한 사람 대동하지 않고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해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총리의 아내가 된 뒤 언론에 노출돼 의상비 지출이 늘어난 것이 불만인 셰리 블레어의 취미는 헬스, 그리고 아이들과 즐기는 것이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