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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허준

“유의태-삼적대사는 가상인물”

드라마 허 준과 실제 허 준 사이… 스승 시체 해부도 근거 없어

“유의태-삼적대사는 가상인물”

“유의태-삼적대사는 가상인물”
소설 ‘동의보감’도 그랬지만, TV 드라마 ‘허 준’도 재밌다. 허 준의 성장과 의학 수업, 사랑에 얽힌 극적인 얘기는 다시 봐도 감동적이다. 드라마에서 사용한 에피소드들은 원작보다도 더 감칠맛을 낸다.

33가지 물 중 환자의 치유에 꼭 맞는 물을 길어 정성껏 약을 다린다는 대목은 그 중 하나다. 이는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다. 허 준이 쓴 ‘동의보감’ ‘탕액’ 편의 내용을 꼼꼼히 읽어 작가가 현장감있게 재구성한 것이다. 허 준의 ‘침법’에 대한 부분도 ‘동의보감’의 ‘침구’ 편의 내용을 소화하여 잘 꾸몄다. 나는 의학 에피소드를 허 준의 책에서 찾아 시대적 분위기를 최대한 느끼도록 해주려는 작가의 노력에 찬사를 보낸다.

사실, 시대를 잘 느끼도록 해준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일례로 내의원, 전의감, 혜민서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공부하는 사람은 그저 조선의 의료제도로 내의원이 왕실 진료를, 전의감이 의학 교육과 의약 행정을, 혜민서가 대민 진료를 중심으로 하는 기관이었다고 말하면 된다. 좀더 나가 봤자 인원이 몇 명이었고, 어떻게 선발했고, 그들에게 녹봉을 얼마 주었는지 정도를 제시할 뿐이다. 그런데 작가는 여기서 머무를 수 없다. 그 기관 안에서 어떤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했는지를 ‘이름을 가진’ 등장인물로 생생하게 그려내야 한다.

작가는 상상력으로 그런 내용을 재구성한다. 특히 허 준의 생애와 그의 시대를 그릴 경우에는 그 상상력의 범위가 넓어지고 대담해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의 삶을 알려줄 사료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허 준이 이름을 떨친 이후의 행적에 관한 기록은 그나마 약간 존재하는 편이지만, 이전의 삶에 대한 기록은 너무 적다. 내가 아는 전부를 여기서 말한다면, 그가 ‘양천 허씨로 서출이었다’는 점, ‘경전과 역사, 의학 분야에 걸쳐 두루 책읽기를 좋아했다’는 점, ‘내의원에 들어가기 전에 서울에서 유희춘 같은 대학자의 집을 드나들면서 의료를 시술하고 있었다’는 점 등이 고작이다.

단지 이 몇 가지 사실(史實)만을 가지고 어떻게 허 준의 수업시대를 그려낼 수 있을까? 연구자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작가의 경우는 다르다. “어찌 의학의 대가가 뿌리 없이 생겨날 수 있을까?” 그래서 작가는 상상한다. ‘훌륭한 스승의 존재와 의술의 깨우침을 얻을 때까지의 무수한 담금질의 과정’을. 이윽고 가공의 인물인 스승 유의태나 삼적대사를 등장시킨다. 또 허 준의 깨달음을 드러내 줄 각종 장치를 세심하게 심어놓는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결과물이 바로 우리가 열렬히 시청하고 있는 특집드라마 ‘허 준’이다.



소설 또는 드라마의 내용이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고 해서 비난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소설과 드라마 작가는 역사적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글을 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위해 역사적 자료를 활용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소설의 경우 완전한 창작의 자유를 누리기는 힘든 측면이 있다. ‘역사적 개연성’이 창작의 ‘허구성’을 제약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역사적으로 사실이 아닐지라도,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시대적 개연성에는 부합되어야 한다. 다음에 제시할 두 가지 사례는 모두 역사적 진실과는 다른 것이지만, 하나는 시대적 개연성이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먼저 ‘남자아이 낳는 비방’ 대목에 대해 한마디. ‘동의보감’에 비췄을 때 그 내용은 역사적 진실이 아니다. 드라마의 맥락대로라면 허 준이 결국 남아 낳는 비방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한국의학사상 ‘임신 중 여아를 남아로 바꾸는 처방’을 이 땅에 뿌리내리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이 허 준이다. 그는 조선초 ‘향약집성방’에 담겨 있던 ‘임신 중 남아를 여아로 바꾸는 처방’에 대한 내용을 삭제할 정도로 강고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충실했던 인물이다(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졸저 ‘조선사람의 생로병사’ 참조). 역사적 사실과 다르기는 해도 이 사례는 개연성이 있다. 당시 남아 낳는 비방이 의사 사이에 횡행했으며, 그 가운데 이에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던 인물이 있을 수도 있다.

다음은 소설 원작대로라면 조만간 펼쳐질, ‘허 준의 시체 해부’ 대목. ‘스승 유의태의 시신 해부 당부와 그 해부를 통한 허 준의 큰 의학적 깨달음’을 그린 이 장면은 이 소설의 하이라이트다. 이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개연성이 전혀 없다. 도리어 허 준이 이룩한 의학적 성취를 먹칠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첫째, 조선사회에서 시체 해부는 절대적인 금기에 속했다. 비록 임란 중 전유형이란 인물이 죽은 자의 오장을 관찰했다는 기록이 ‘지봉유설’에 보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강력한 비난의 맥락에 위치해 있다. 굴러다니는 시체에도 그런데 하물며 스승의 몸에 대해서랴!

더 말도 안되는 이유는 의학적 세계관과 관련된다. 서양의학과 달리 한의학은 해부학 중심으로 발달하지 않았다. 몸의 유기체적 통일관을 지향하고 치유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이 의학의 주안점이었다. 허 준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허 준이 위대한 의학자로 추앙받는 것은 그가 해부에 바탕을 둔 새로운 의술을 열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와 반대로 양생(養生)을 기본 정신으로 하여 동아시아 의학 전통의 정수를 추려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해부를 통해서만 의학적 발달이 이루어진다는 가정은 너무 소박하며 위험천만의 생각이다. 그것은 허 준이 이룬 성취를 훼손할 뿐 아니라 조선의 한의학 전통을 크게 왜곡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는 이 드라마를 만든 의도에도 어긋날 일. 제발 다른 부분은 몰라도 이 대목만큼은 필자의 고언을 받아들여 주시길! 작가님, PD님!

“소설로 느끼고, 드라마로 즐깁시다. 소설과 드라마를 역사책으로 착각하지 맙시다.” ‘소설 동의보감’이 베스트셀러가 된 뒤, 우리 의학 문화에 대한 관심이 무척 높아졌다. 그 큰 공은 어떤 이유로도 폄하될 수 없다. 그렇지만 예기치 않은 일이 발생했다. 대중이 역사적 진실과 허구를 구별하지 못한 상태에 빠져버린 것이다. 경남 산청군의 허 준 이벤트가 그 단적인 예다. 산청은 ‘소설 동의보감’에서 허 준이 의술을 수업하던 곳으로, 그곳의 군청에서는 이를 근거로 허 준의 자취를 느끼도록 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학자를 불러 세미나도 하고, 기념물도 만들고…. 역사적 뒷받침 없이 단지 소설 대목에 근거하여 나랏돈으로 이런 일을 벌인다니 쓴 웃음이 절로 나온다.

더 놀랄 만한 일은 너무나도 많은 한국인들이 소설 속의 내용을 사실처럼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유의태를 실존인물인 줄 알고 있고, 허 준이 유의태를 해부한 줄로 안다. 독자의 무지만 탓할 수 없다. 그것을 바로잡아 줄 학계의 노력이 너무 미미했다. 반면에 책을 펴낸 출판사와 방송국은 너무나도 권위있는 곳이다. ‘소설 동의보감’은 좋은 책을 많이 펴낸 창작과비평사에서 찍은 책이며, 드라마 ‘허 준’ 은 국내 굴지의 공공 기관인 MBC에서 내보내는 것이다. 그 ‘권위’ 때문에 허구와 사실의 판단능력이 크게 무뎌진 것이리라.

10%, 아니 1%의 내용도 허 준의 삶과 관계가 없이 어차피 완전한 상상력으로 꾸미는 소설, 드라마였다면, 제목에 ‘허 준’ 또는 ‘동의보감’이라는 실명을 쓰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독자 또는 시청자가 얼토당토않은 착각을 범하지 않았을 것이다. 상업주의 때문에 그렇게 못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그 출판사와 방송국은 자신이 초래한 이 엄청난 비교육적 악영향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결자해지의 원칙에 따라 나는 그들에게 다음 세 가지 사항을 제안한다. 첫째, MBC는 지금이라도 방송중인 ‘허 준’ 드라마에 다음 내용의 자막광고를 낸다. “이 드라마는 실제 허 준의 삶과는 무관합니다.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둘째, 창작과비평사와 MBC는 역사적 실체를 분명하게 할 공론의 분위기를 스스로 만들어 나간다. 셋째, 그와 관련하여 그들은 ‘허 준을 팔아’ 번 돈으로 현재 너무나도 빈약한 수준에 있는 허 준과 ‘동의보감’에 대한 학술적 연구를 지원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주간동아 2000.02.10 221호 (p9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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