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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인사동의 오늘

인사동엔 ‘인사동’이 없다

퓨전 레스토랑·패스트푸드점에 밀려 옛 모습 잃어… 뒷골목 전통 맛집 찻집만 명맥

인사동엔 ‘인사동’이 없다

인사동엔 ‘인사동’이 없다
‘디귿’(ㄷ)자로 낮게 앉은 한옥집과 거대한 철골조의 유리공간. 한정식과 파스타. 잇꽃으로 붉게 염색한 고무신과 SF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하이힐. 바삭한 찹쌀 한과와 부드러운 쉬폰 케이크. 지금 서울 인사동에서 어렵지 않게 함께 만날 수 있는 것들이다. 그것은 과거와 미래의 섞임이기도 하고 동양과 서양의 퓨전이기도 하다.

지난해 말 서울시가 한시적으로 인사동 일대의 신규 건축을 불허한다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변화의 속도는 다소 느려진 듯 보인다. 땅주인이 바뀌면서 위기를 맞았던 인사동 길(안국동에서 종로2가에 이르는 길) 가운데 있는 ‘열 두 가게’도 일단 한숨을 돌린 상태다. 땅주인과 세입자들의 싸움에서 서울시가 세입자들의 손을 들어준 것은 물론 인사동을 상업적 개발논리에서 지켜내려는 시민단체들의 적극적인 활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울시의 발표가 나오자마자 인사동에는 사유재산권을 주장하는 주민들의 플래카드가 나붙고 종로2가쪽 입구는 새 단장을 위한 가로 공사가 한창이다. 어쩌면 느려진 것은 차량의 흐름뿐이다.

“서울시에선 건축허가를 내주지 않는다고 했지만 땅주인 마음이죠. 불안하고 답답할 뿐이에요.”

‘열 두 가게’ 중 하나로 20년 역사를 가진 영빈가든 주인 최갑희씨(66)가 난로를 지키며 한숨을 쉬고 있다.



인사동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곳은 길 중간쯤에 있는 ‘아트사이드넷’과 4월초 개관예정으로 짓고 있는 복합문화공간 ‘인사아트센터’다. ‘화랑 재벌’로 불리는 가나아트센터 소유인 두 건물은 세계적 건축가인 장 미셸 빌모트가 설계한 것. ‘튀지 않으려는’ 설계자의 마음씨가 엿보이긴 하지만 건물의 덩어리가 워낙 큰 데다 ‘개발’을 주도하는 사람이 인사동 전통문화‘보존’회 회장인 이호재 가나아트센터대표라는 점 때문에 따가운 시선을 받고 있다.

인사동이 바뀌고 있는 것은 빠르게 늘어나는 퓨전 레스토랑과 스파게티 전문점들에서도 나타난다. 인도 티베트 등의 음식과 문화를 들여온 작은 가게들과 달리 이들은 강남의 유행을 따른다. ‘아지오’ 이후 지난해 문을 연 ‘뽀모도로’ ‘오또 에 메조’ ‘사람과 나무’ 같은 레스토랑들이 시인 박중식씨가 운영하는 부추 된장찌개집 ‘툇마루집’ 앞에서 성업 중이다. 압구정동에서 이름을 날린 ‘일 마레’도 지난해 말 문을 열었다. “이곳은 새로운 문화적 욕구를 느끼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니까요.” 이곳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일 마레’ 김태완이사는 그렇게 말했다. 그 옆 관훈빌딩 민영환선생 자결터 옆에 거대한 맥도날드 로고가 보무도 당당하게 서있다.

물론 여전히 인사동의 성격을 규정짓는 것은 시간의 두께를 간직한 골목들과 장소들이다. 안국동쪽 초입에 자리한 고서점 ‘통문관’이 66년째 그 자리를 지키고 있고, 인사동 고미술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켰던 학고재화랑에선 오늘도 전시가 열리고 있다. 학고재를 끼고 돌면 대안공안으로 탈바꿈한 옛 사루비아다방과 문인들이 즐겨 모이는 이모집 등 한정식집들의 간판이 보인다. 인사동 골목들은 대로에서 결코 들여다보이는 법 없이 슬쩍 휘어져 있다. 들어가면 없었던 골목이 나타나고 또 다른 길로 이어진다.

그 끝에 있는 ‘지리산’은 정재계 인사들과 예술인들 사이에선 유명한 한식집으로 국선도원에서 직접 운영한다. 선원에서 농사지은 국산 콩으로 만든 요리를 ‘수자’들이 대접한다.

또다른 골목에 갑신정변의 주역 박영효의 집이었던 경인미술관이 널찍한 정원을 품고 있다. 본채가 ‘보존을 위해’ 남산한옥골로 옮겨가고 남은 꼴로 다소 기형적이다. 동서표구에서 보원요까지 이르는 유서깊은 서화용구점들을 지나면 골동품점 ‘토인’이 있다. 가게는 작지만 딱지에서 장롱, 공중전화 간판까지 없는 것이 없다. 그 안쪽에 유명한 ‘평화만들기’가 있다. 어느 날엔 손님 모두가 TV에서 얼굴을 본 사람들과 기자들로 채워지는 곳이기도 하다.

인사동 사거리로 내려오면 옛 것을 모으는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전통을 다시 만들고 있는 가게가 있다. 원래 순수미술을 했던 이나경씨가 만드는 전통 한복집 ‘아라가야’와 최근 우리 도자기에 대한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킨 ‘광주요’가 그곳이다. 이씨는 “인사동에 생활한복집이 많이 생기긴 했지만 요즘 전통적인 한복에 대한 관심이 다시 커져 자리를 지킨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한다.

과거와 현재, 동서가 융합하는 인사동의 특성을 가장 실험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 새로 생긴 신발가게 ‘니마’다. 작가 최정화씨가 꾸민 ‘니마’의 천장은 한국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상징한다. 한옥의 처마 한쪽이 그대로 살아 있는가 하면, 일부는 칠로 ‘석고화’했고 갑자기 솟아오른 유리지붕으로 인사동의 하늘이 디귿자 한옥 마당에 선 듯 네모나게 보인다. 입구는 전통 자개를 미니멀하게 연출했지만 내부는 시멘트 뼈대가 드러나 쓸쓸한 느낌이다. “강남이 정맥과 동맥만 있는 도시라면 강북은 정맥과 동맥, 실핏줄이 있는 도시”라고 말하는 그는 “‘니마’가 전통은 새로운 것을 창조함으로써 이어진다 는 것을 보여준 예”라며 “5월에 인사동 한옥을 ‘리노베이션’한 전시장을 열 것”이라고 자랑했다. “강북의 꾸질꾸질함”의 예찬자인 그는 박정희정권이 인사동 한가운데에 세운 낙원아파트에서 산다.

젊은 작가들이 데뷔전을 치르는 공간이었다는 점에서도 인사동의 의미는 크게 위축됐다.

화랑들은 줄었고 컬렉터들은 사간동과 평창동으로 떠났다. 보다갤러리, 풀, 사루비아다방, 덕원갤러리, 관훈미술관, 나무화랑 등이 그나마 젊은 작가들의 공간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차없는 거리 이후 전시장은 더 썰렁해져서 저 스스로 정이 떨어지기 시작했어요.”(보다갤러리 큐레이터 박민정)

차없는 거리 이후 계속돼 온 인사동의 전통문화 보존 방식―외부에서 돈을 끌어오고 외부 문화로 이벤트를 벌이는 방식―에 대해 인사동 사람들은 대단히 부정적이다.

“전통이 아니라 가짜 물건들만 넘쳐난다”고 혹평하는 한 화랑 주인은 일요일엔 아예 문을 닫는다고 했다. 한 젊은 큐레이터는 “황토흙 바르고 서까래 얹는 것이 전통인가” 반문한다. 실제로 나무로 실내장식을 하고 감탄형의 시구로 제목을 단 비슷비슷한 ‘전통찻집’들 대부분이 한 사람의 솜씨다.

이같은 가짜들은 그것의 미적-공간적 가치를 떠나 ‘인사동의 힘’을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황토흙 바르고 서까래를 얹은’ 찻집들이나 옛날 영화포스터가 붙은 고색창연한 삼겹살가게가 알고 보면 엊그제 개업한 집인 것도 인사동에 대한 ‘예의’에서 비롯한 것이다.

인사동의 고민은 이곳이 옛 것으로 채워져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쌓이는 삶의 더께를 통해서 생명력을 얻어 왔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사동은 늘 위기에 처해 있는 셈이다.

“무분별한 삽질 안될 말”

인사동, 사유지라도 전체 경관 존중해 개발을


“인사동은 처음으로 도시 설계에 주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사례가 될 것입니다.”지난해 겨울 ‘작은 가게 살리기 운동’을 벌여 인사동 일대의 신규 건축허가를 금지한다는 서울시의 결정을 얻어낸 ‘걷고싶은 도시 만들기 시민연대’ 최정한사무총장은 “인사동의 절대 보존을 주장하는 게 아니라 인사동의 이미지를 연결하고 전체 경관을 존중하면서 개발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개인의 재산권은 다른 방식으로 벌충해 주더라도 인사동이라는 독특한 역사적 사회적 배경으로 인해 발생한 이익을 마음대로 사유화해서는 안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인사동에 6층짜리 큰 건물과 호텔이 들어서면 인사동의 구부러진 골목들이 만들어내는 공간조직이 완전히 허물어집니다. 건물들 사이로 소방도로가 뚫리고 다른 상업공간과 똑같이 개발된다면 집세는 폭등할 것이고, 책방이나 화랑은 살아남을 수가 없죠.”

그는 인사동의 잡상인들이나 전통 문화에 편승해 급속하게 늘고 있는 ‘유발 업종’조차 인사동을 살아 있게 하는 요소라고 말한다. 그보다는 오히려 인사동에 대리석을 깔아 파리나 로마처럼 ‘멋지게’ 꾸미려는 시와 구청의 욕심이 걱정스럽다는 이야기다.

“인사동은 다른 도시들이 잃어버린 지속성과 다양성을 그나마 간직한 곳입니다. 행정당국과 주민, 그리고 이곳을 찾는 내외국인들이 머리를 합쳐 인사동을 살려야 합니다.”




주간동아 2000.02.10 221호 (p90~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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