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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가족의 반란

가족, 헤쳐 모여!

‘한지붕 한핏줄 한식구’ 급속히 붕괴… 21세기 한국의 가족은 어디로

가족, 헤쳐 모여!

가족, 헤쳐 모여!
회사원 이석연씨(34)는 이번 설에 고향을 찾지 않을 계획이다. 해마다 명절 때면 교통체증에 시달려가며 솔가해서 귀향하곤 했던 그지만, 이번 설만은 사정이 여의치 않다. “설 휴가도 주말에 몰려 짧은 데다, 회사일이 놓아주지 않을 것 같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런 표면적인 이유 외에 맞벌이인 부인이 명절 귀향을 반기지 않는다는 점도 작용했다는 게 그의 고백이다. 지난번 추석 때도 고향에 다녀와서 대판 싸웠다. 하루를 자고 오려던 계획을 부모님이 너무 서운해해 하루 더 늘린 게 화근이었다. 서울에서 늘 쫓기듯 사는 생활에 익숙하던 아내가 하염없이 늘어지는 시골 어른들 위주의 생활을 견디지 못해 했던 것.

“가족이 서울에서 겪어야 하는 현실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그 템포가 아닌 걸요.” 그러나 그는 시골에서 자식들만을 기다리고 계실 어른들을 떠올리면 마음이 영 편치 않다고 말한다.

명절. 뿔뿔이 흩어졌던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는 시간이다. 그러나 고향도 변했고 가족도 예전 같지 않다. 귀향하지 않는 가족들도 갈수록 느는 추세다.

격동의 현대사를 살아온 한국사회에서 ‘가족’만큼 세대별로 다른 뜻으로 받아들여지는 단어도 흔치 않다. 어른 세대는 전통적 가족상에 집착하는 반면 젊은 세대는 서양식 개인주의 시대를 살아간다. 그리고 명절은 두 개의 서로 다른 가족관이 부딪치는 현장이기도 하다.



이나미 신경정신과 의원 원장은 “최근 몇 년 사이 젊은 주부들이 겪는 명절 스트레스가 사회 여론화됐지만, 명절에 즈음해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것은 어머니 세대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특히 자제들이 명절을 쇠러 오기 전에 손수 일을 다 해놓고는 손해본 듯한 느낌을 토로하거나, 왔다가도 금방 돌아가는 자제들의 뒷모습을 보면 허전하고 속상하다는 어머니 세대의 고백이 적지 않다”는 얘기다.

입장을 바꿔 지금의 젊은 세대가 노인이 됐을 때는? 이석연씨는 “지금은 어른들에게 죄송한 생각에 괴롭지만, 요즘 자라나는 아이들을 보면 우리 세대는 나중에 더 크게 당할 것이란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세대간의 사고방식이나 감각 차이는 사실 지금의 부모세대와 청소년 세대 사이에 더욱 심각한 듯하다. 청소년보호위원회 나원형위원(40)은 10대들을 상대로 상담해보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요즘 아이들과 부모세대는 딴 세상을 살고 있다고 해야 할 겁니다. 아이들이 사는 세계가 ‘사이버 세상’이라면 우리가 사는 세계는 ‘현실세계’로 구분할 수 있겠죠.” 아침에 일어나면 컴퓨터부터 켜고, 친구들과 운동장에서 뛰노는 대신 통신망에서 익명의 친구들과 채팅을 즐기며, 가장 갖고 싶어하는 물건 1위가 휴대폰이고, 펜으로 글씨를 쓰는 것보다 컴퓨터로 찍는 게 더 편하다는 세대. 일방적으로 들여다보는 TV보다 쌍방향 소통이 가능한 컴퓨터가 좋다는 세대. 장래 희망 1위는 ‘백댄서’이고 웬만한 아이들의 장래목표는 연예인, 공부 좀 잘하는 아이들은 방송사 PD를 꿈꾼다는 세대. 지난 수년간 ‘좋은 아버지가 되려는 사람들의 모임’을 이끌기도 했던 나씨는, “이들과 대화를 시도해본 부모세대일수록 그 어려움에 막막함을 토로한다. 그러나 결국은 어른들의 노력이 더 필요한 일 아니겠는가”고 결론짓는다.

사회의 기본단위로 일컬어지는 가정. 특히 유교문화가 지배한 한국사회에서는 ‘가정, 가족’은 곧 사람살이의 중심이자 전체에 해당할 정도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러나 21세기를 시작한 시점에서 가정이나 가족의 가치는 예전과는 크게 달라지고 있다.

가족해체는 21세기를 바라보는 전세계의 추세이기도 하다. 학자들은 60년대 이후 서방국가에서 일어난 ‘3대 대붕괴’로 범죄 증가와 가족 파괴, 신뢰의 파괴를 든다. 미국 시카고대 부설 전국 여론조사센터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 성인의 56%만이 결혼을 통해 가정을 꾸리고 있다. 이는 72년의 75%에 비하면 엄청나게 줄어든 수치.

발빠른 산업화 도시화 속에서 급격한 인구구조의 변동을 겪은 한국의 경우는 어떨까.

여성한국사회연구소 이효재소장은 처음 가족학 연구를 시작하던 1958년, 집집이 너댓씩의 자녀를 낳아 기르는 상황에서 ‘미래의 가족은 서구식 핵가족으로 갈 것’이라는 ‘가설’을 세우고 연구를 진행했었다고 회고한다. 그리고 이제 “30년만에 한국의 가족은 핵가족을 넘어 가족해체, 또는 생활의 편의에 따른 가족의 다양화 시대로 넘어갔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국회 여성특별위원회 박숙자정책연구위원은 “그러나 이는 개개인의 문제로 돌릴 일은 아니다”고 지적한다. 사회구조의 변화, 먹고사는 방식의 변화, 생활여건의 변화에 따른 자연스런 추세라는 것. 그는 “한국사회의 세대차 문제는 1차적으로는 고도성장의 후유증”이라 말한다. 선진각국에서 100여년간에 걸쳐 이뤄낸 변화를 우리는 고도성장을 통해 30년만에 이뤄내면서 문화적 적응을 제대로 해낼 수가 없었고, 이는 초등학교에서 1학년 차에서도 세대차를 느낀다는 현상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것. 전문가들은 지금 한국의 세대간 문제는 “한 공간에서 조선시대 사람과 21세기 SF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 같이 살아가는 형국”이라고 표현한다.

아버지들이여! 가정으로 돌아가라

그렇다면 이는 어쩔 수 없는 숙명일까. 동서고금의 학자들이 내려주는 해결책은 ‘대화의 노력’이다. 아나미원장은 “가정에서 세대간의 차이로 부딪히는 부분은 사실은 각 개인간 갈등이라기보다 문화와 방식의 차이”라고 지적한다. “그런 구조적 문제를 빼고 모든 걸 개인의 잘못으로 돌려 ‘이상한 사람’이라거나 ‘못된 며느리’, ‘문제아’라는 식으로 접근하는 건 해결책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길”이라는 것.

그는 특히 젊은 층이 조금 더 시야를 넓혀줄 것을 요구한다. “젊은 사람들의 부모세대에 대한 사고가 대단히 단세포적인 차원에 머문다. 이런 때 역사적 시각을 도입하면 어떨까. 가령 부모세대를 현재의 모습이 아니라 그의 일생 전체로 파악하면 통찰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라는 제안이다.

박숙자위원은 “사회의 기본단위인 가정을 살리려면 세대차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여기서 특히 아버지들의 역할이 중요해질 것”이라 말한다. 과거 고도성장 과정에서 아버지는 일, 어머니는 가족 관리와 양육을 책임졌던 핵가족의 문법이 해체를 맞고 있다면, 이제 가정을 소홀히 했던 아버지들이 가정으로 돌아오는 데서 새 시대 한국가족의 비전을 찾을 수 있다는 얘기다. 과도기에 선 한국의 가족은 어디로 갈 것인가.



주간동아 2000.02.10 221호 (p5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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