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17

2000.01.13

불안…공포…‘피말린 0시’

본지기자 Y2K위험 속 비행기 탑승… 침묵 속 긴장의 연속 “결국 기우로”

  • 입력2006-06-09 13: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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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안…공포…‘피말린 0시’
    당신은 지난 1월1일 2000년의 첫 태양을 어디서 맞았는가. 태양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을 찾아 사람들은 너도나도 길을 떠났다. 정동진행 열차를 탔고, 지리산 천왕봉에 올랐다. 서울에서 강릉 가는 길은 말 그대로 주차장이었다. 날짜 변경선 근처에 위치한 덕에 2000년 1월1일 0시를 가장 먼저 맞이한다는 남태평양의 피지에는 몇 달 전부터 지구촌의 온갖 인종들이 진을 쳤고, 새해 첫 일출의 장관이 벌어진다는 뉴질랜드 기즈번의 호텔 숙박비는 열배나 뛰어 올랐다. 그러나 아쉽게도 40억 지구인들의 공간 개념은 수평선상에만 머물러 있었다. 2000년의 첫 태양을 구경할 줄만 알았지 앞장서 맞이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주간동아’는 아예 2000년의 첫 번째 태양을 향해 남보다 앞서 날아오르기로 했다. 호들갑스럽게 먼길을 달리지 않고 하늘에서 첫 태양을 맞이하는 감흥을 ‘주간동아’ 독자들에게 생생하게 전하기로 한 것이다.

    ‘주간동아’는 이같은 계획에 따라 12월31일 김포공항을 출발해 날짜 변경선을 지나는 국제선 노선에 기자를 탑승시키기로 했다. Y2K 문제가 우려되는 상황에서 과연 항공기는 안전할지, 위험을 무릅쓰고 비행기를 탄 승객들의 표정은 어떠할지 등이 ‘주간동아’의 또 하나의 관심사였다.

    그러나 위험이 따랐다. 1999년 1년 내내 전세계인들을 괴롭혀 온 Y2K 문제. 금융기관이나 가정에서 발생하는 Y2K 문제와 달리 항공 운항에서 Y2K 문제가 발생하게 되면 이는 여지없이 대형 참사로 이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항공 운항에서 Y2K 문제는 공상과학 영화에나 나올 법한 ‘소설 같은’ 일이 아니었다. 실제로 2000년 1월1일 상공을 날고 있어야 하는 항공기에 대한 예약률이 예년에 비해 급감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한항공은 12월31일 서울을 출발하기로 되어 있던 국제선 여객기 39편중 14편을 취소하고 7편의 운항 시간을 재조정했다. 유럽노선은 모두 취소해 버렸고 휴가 수요가 많은 동남아 노선도 9편 중 4편을 취소했다. 결국 남은 것은 Y2K에 가장 철저하게 대비해 왔다는 미주노선 14개와 호주 뉴질랜드 등 대양주 노선 4개 등 18개 노선뿐이었다.



    이런 상황은 비단 우리나라뿐만이 아니었다. 미국 최대 항공사인 유나이티드에어라인(UA)은 하루 평균 2400편의 운항 일정 중 31일에는 30% 가까운 727편을 취소했고, 1월1일에도 342편을 감축했다. 그러나 막상 연말이 다가오자 예정대로 운항하는 노선에도 승객 숫자가 눈에 띄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운항을 취소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덩달아 항공사측도 혼란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은 2000년 1월1일을 코앞에 둔 시점까지도 계속됐다.

    아니나 다를까. 12월29일 출발을 이틀 앞둔 서울-오클랜드 노선이 전격 취소됐다. ‘Y2K 100% 자체 해결’을 선언한지 5개월이나 지난 뒤였다. 게다가 대양주는 Y2K가 모두 해결되어 아무 이상없다고 가장 자신하던 지역이었다. 100명 가까운 예약 손님들의 항의가 빗발칠 것이 뻔한데도 이런 결정을 내린 이유는 ‘만에 하나 벌어질지도 모를’ 사고 가능성을 없애기 위한 것이었다. 이 노선은 애당초 기자가 탑승키로 했던 노선이었다.

    이때부터 남들이 모두 피하는 ‘1월1일 0시’의 비행기를 찾아내는 희극 아닌 희극이 벌어졌다. 결국 선택한 것은 12월31일 저녁 7시30분 서울을 출발하는 호놀룰루행 KE051편. 그러나 이 노선 역시 384석 정원 중 129명만이 탑승했을 뿐이었다. 절반에도 훨씬 못미치는 형편없는 예약률이었다. 1년 내내 시달렸던 Y2K 문제에 사람들이 얼마나 세뇌당했는지 짐작할 만했다.

    그러나 아무리 심리적인 이유라고 했지만 기장부터 말단 승무원까지 ‘뭔가 찜찜하다’는 느낌을 갖는 것은 부정하려야 부정할 수 없는 사실. 24년간 비행기를 타온, 정년을 2년 남겨둔 수석 사무장 유택준씨의 눈에도 기장의 오늘 모습은 평상시와 조금 달라보였다. 유사무장은 “출발 직전 말수가 적어지고 오늘따라 긴장한 빛이 보이더라”고 말했다. 운항 중 기자에게 조종실을 공개한다는 애초의 약속도 더 이상 고집하기 어려웠다. 조종사들이 가질 수 있는 극도의 긴장감으로 인해 사소한 외부 요인으로부터라도 조종사들을 격리해야 한다는 항공사측의 견해에 토를 달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위험성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았던 만큼 털끝만한 오차도 허용할 수는 없었다.

    21세기의 출발을 4시간30분 남겨둔 오후 7시30분. 박종기기장과 이용 부기장은 왼손을 뻗어 조종실 주 컴퓨터인 FMS에 파워를 넣었다. 초기화면에서 바로 눈에 들어온 내용은 ‘99년 12월28일 최신 정보 입력되었음’. 일단 가슴을 쓸어내렸다. 각종 비행정보가 최신 정보로 변경되어 있음을 알리는 메시지였다. FMS는 비행기의 연료잔량부터 세계 각국의 공항 정보까지가 모두 입력된 항공기의 중앙통제장치. 이 컴퓨터가 오작동을 일으키면 항공기는 그야말로 통제불능 상태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지상과의 교신이 두절되는 것은 물론 동시다발적인 오작동 사태가 발생하면 극단적인 경우 공중 충돌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국제민간항공기구(ICAO)와 국제항공운송협회(IATA)를 비롯한 항공업계는 대책을 마련해 왔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비상 항로를 마련하고 운항 간격을 평소보다 늘려 혹시라도 발생할지 모를 비상사태에 대한 대응능력을 높였다. 같은 항로라도 고도를 달리했고, 지나가는 항공기의 충돌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일부 노선에 한해서는 편도 비행만 허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Y2K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가장 큰 문제는 뭐니뭐니 해도 통신 시설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이다. 조종실 컴퓨터에 중대한 이상이 생겼을 경우 조종사들은 지상과의 교신을 포기하고 각 지역별로 부여된 공통 주파수를 이용해 하늘을 나는 항공기간 교신에만 의존해야 한다. 항공기간 교신을 통해 ‘앞차’와‘뒤차’간 속도와 위치를 조절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이외에도 Y2K 문제 발생에 대비하는 방법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문제는 같은 시간대에 세계의 하늘을 나는 수십대의 항공기 중 한대에서만 이런 문제가 발생할 경우 문제될 것이 없으나 여러 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문제가 발생하면 수습할 수 없는 혼란 상태에 빠져들 수 있다는 것이다. ‘Y2K 완전 해결’을 외치면서도 항공사들이 유럽노선을 비롯한 상당수의 노선을 취소한 것은 이런 배경에서다.

    예년의 이맘때쯤이면 관광객들로 꽉꽉 차던 객실은 세 명에 한 명 꼴로 좌석이 차 있을 뿐이어서 한적하기 그지없었다. Y2K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 비행기에 몸을 실은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이들은 막연한 두려움에 떨고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의외였다. 이코노미클라스에서 만난 대부분의 승객들은 ‘사소한 위험이라도 있었으면 항공사가 비행기를 띄웠겠는가’며 별로 개의치 않는다는 반응을 보였다. 한 일본인 승객은 “대한항공이 최근 사고를 자주 냈는데 불안하지 않느냐”고 묻자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듯한 말투로 “사고를 많이 낸 항공사일수록 이럴 때에는 더욱 조심하지 않겠는가”고 되묻기도 했다. 승객들은 Y2K고 새 천년이고 관심없다는 듯 저녁식사가 끝나자마자 빈 좌석에 모로 누워 코를 골아대는 사람이 늘어났다. 하와이에만 30년을 산 한국계 밀러씨 부부도 하와이에 있는 아들들과 밀레니엄 파티를 약속하지 않았더라면 이 비행기를 타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자식들은 Y2K 문제를 우려해 이 비행기를 타지 말라고 극구 말렸다. 그러나 이들은 ‘살면 얼마나 산다고…’하면서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21세기 첫날인 1월1일만은 자식들과 함께 보내고 싶다’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러나 밀러씨 부부 역시 11시가 넘자마자 정신적 불안감보다는 육체적 피곤함에 몸을 맡겼다.

    그러나 이 시각에도 최소한의 긴장을 풀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대한항공 84번팀에 소속한 15명의 객실승무원들. 특히 기혼자가 한 명도 없는 여승무원들은 몇 달 전부터 ‘근사한’ 밀레니엄 이벤트를 위해 연말휴가를 신청했다가 11월말 비행계획표를 받아보고는 하나같이 한숨을 내쉬었다. 여승무원 중 최고참격인 박연정씨는 “그나마 21세기를 하와이처럼 근사한 장소에서 맞을 수 있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고 말했다.

    서울을 떠난지 4시간59분. 서울 한복판 광화문에서는, 변산반도의 마지막 낙조를 거두어 만든 우주 시계의 횃불이 꺼지고 광화문이 정적으로 빠져든 시각. 승무원들은 대부분의 승객들이 잠에 빠져들어 정적만이 남은 기내에서 조용히 뉴밀레니엄 파티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특별히 준비한 동 페리뇽 샴페인을 수석 사무장 유택준씨가 들었고 태평양 하늘에서 새 천년 태양을 맞기 위해 잠을 등진 승객들 몇 명이 대표로 잔을 들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마음 속으로만 주문을 외우듯이 카운트다운을 시작한다. 다섯, 넷, 셋, 둘, 하나… 조종실에서는 비행 경력 25년의 박종기기장이 ‘새 천년을 축하한다’는 내용으로 서울과 교신하는 데 성공했고 조종실 바로 뒤편 2층 객실에서 샴페인을 터뜨린 사람들은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 악수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었다. Y2K라는 괴물과 맞닥뜨려 1년 내내 씨름했던 피곤한 소모전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KE051은 이 소모전을 사뿐하게 뛰어넘어 고도 1만1000m가 넘는 태평양 상공에서 태평양만큼이나 조용하고 경건하게 2000년과 조우하는 데 이렇게 성공했다.

    새 천년의 감격이 가슴 속으로 서서히 잦아들 즈음 KE051의 오른쪽 창밖으로는 21세기의 첫 태양이 ‘원격조종하는’ 장관이 시작되고 있었다. 뿌옇게 겨우 눈을 뜬 구름 위로는 미명의 녹두빛에서 새벽의 코발트빛으로, 그리고 아침 나절의 선홍색으로 변해 가는 태평양의 하늘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지상의 사람들에게 아직 모습을 내보이지 않은 21세기의 첫 태양은 서울에서부터 이미 6시간 동안 KE051을 완강하게 엄호하던 어둠을 제압해 버린 것이다. 21세기는 이렇게 어둠을 밀어내고 다가드는 빛으로 태평양을 맞이한 것이다.

    하와이 섬의 남쪽 해안과 나란히 달리는 호놀룰루 국제공항 활주로. 시각은 12월31일 오전 8시10분. 기자가 ‘목숨을 걸고’ 탄 KE051편은 사뿐히 호놀룰루 공항에 내려앉았다. 비행 경력 25년의 박종기기장은 비행을 모두 끝낸 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봐야 알겠지만”이란 전제를 달면서도 “그동안 우려했던 Y2K 문제는 전혀 발생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하와이에 도착하니 서울과는 계절이 정반대로 뒤바뀌어 있었다. 그러나 바뀐 것은 계절만이 아니었다. Y2K라는 괴물과 한판승부를 벌인 KE051은 날짜변경선을 넘어 과거로 여행했기 때문에 이곳은 아직도 20세기였던 것이다. 서울은 이미 새로운 즈믄해를 맞이한 감격으로 하루종일 술렁거리다가 잠든 깜깜한 밤중이었다. 승무원과 승객들은 기내에서 맞은 21세기를 이곳 하와이에서 한 번 더 만나는 행운을 누리게 된 셈이다.

    하와이는 남태평양의 피지와 가장 가까이에 있는 미국 영토이다. 피지가 가장 먼저 21세기의 첫태양을 맞는 반면 하와이는 가장 늦게 21세기의 태양을 보게 되는 것이다. 승무원과 승객들은 오늘 저녁 태평양 한복판에서 맞이할 또 한번의 새 천년의 설레는 꿈을 꾸기 위해 숙소로 향했다. 듣도 보도 못한, ‘밀레니엄 버그’에서 ‘ Y2K’로 이름까지 바꿔가면서 21세기에 들어서기도 전에 21세기를 괴롭혀왔던 기계문명의 도전은 이렇게 싱거운 판정패로 끝났다. 천년만에 벌어진 인간과 기계의 싸움에서 승자는 인간의 몫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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