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17

2000.01.13

‘위대한 개츠비’의 초라한 옷잔치

트레이드 마크 ‘분홍색 수트’ 조연들의 화려한 의상에 빛바래…“여자들 옷만 튀었다”

  • 입력2006-06-09 12: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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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대한 개츠비’의 초라한 옷잔치
    ‘위대한 개츠비’는 비극으로 끝난 아메리칸 드림, 혹은 제어할 수 없는 욕망이 불러온 파국에 관한 이야기다. 가난 때문에 애인을 잃은 제이 개츠비는 절치부심 끝에 엄청난 부를 축적한다. 그리고 이미 결혼한 애인 데이지에게 다시 접근한다. 데이지와 8년만에 해후하는 순간, 크림색 장미꽃다발을 바라보며 “내가 제일 좋아하는 색깔”이라고 말하는 데이지의 눈앞에 똑같은 크림색의 수트를 입은 개츠비가 나타난다.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을 각색한 1974년의 영화 ‘위대한 개츠비’를 본 사람이라면 개츠비가 던진 색색의 드레스 셔츠들이 온 방안을 메우는 장면을 잊지 못할 것이다. “가난뱅이 청년에게 시집가기는 싫다”던 데이지는 이 셔츠들이 상징하는 개츠비의 부유함에 다시금 매혹되고 만다. ‘위대한 개츠비’ 이후로 미국 남자들은 흰 드레스 셔츠를 벗고 파스텔 색조의 셔츠를 입기 시작했다. 그리고 개츠비의 의상을 디자인한 신참 디자이너 랄프 로렌은 이 영화를 통해 패션계를 리드하는 일급 디자이너가 되었다.

    색색의 셔츠는 온데간데 없고…

    피츠제럴드의 원작에서도, 그리고 1974년의 영화에서도 개츠비를 묘사하는 가장 중요한 매개체는 ‘의상’이다. 예를 들면, 개츠비가 즐겨 입는 분홍색 수트는 벼락부자라는 그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보통의 부유층 남자라면 굳이 이처럼 야한 색조의 의상으로 자신을 과시하지 않을 것이다. 랄프 로렌의 설명에 따르면 “개츠비는 지극히 모호한, 수수께끼 같은 남자”이며 의상을 통해 자신의 성격을 드러낸다. 때문에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가 밀레니엄을 기념해 제작한 존 하비슨의 신작 오페라 ‘위대한 개츠비’에서도 관객들의 시선은 음악 못지 않게 의상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12월20일에 개막된 ‘위대한 개츠비’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가 무려 8년만에 도전하는 신작 오페라다. 세기말 미국의 오페라 극장들은 다음 세기가 오기 전까지 미국적인 오페라를 한 편쯤 선보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쫓겼다.



    1998년 샌프란시스코 오페라가 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을 대본삼아 제작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선보인 데 이어 지난 10월에는 시카고 리릭 오페라가 아서 밀러의 희곡을 각색한 ‘다리 위에서 본 조망’을 무대에 올렸다. 그리고 드디어 초연 작품에 인색하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가 ‘위대한 개츠비’ 공연에 도전한 것이다. 주역인 제이 개츠비와 데이지 뷰캐넌 역은 미국 가수들인 테너 제리 해글 리와 소프라노 돈 업쇼가 맡았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가 랄프 로렌에게 오페라 ‘위대한 개츠비’의 의상디자인을 의뢰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제작진은 영화 의상으로는 이례적으로 ‘타임’과 ‘뉴스위크’의 커버스토리에 등장했던 1974년의 대성공이 오페라 무대에서 또한번 이루어지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로렌은 이미 신출내기 디자이너가 아니었다. 그는 “나는 영화에서 한 번 ‘개츠비’를 해보았다”는 이유로 무려 150벌의 의상을 제작해야 하는 번거로운 작업을 사양했다. 결국 오페라 ‘위대한 개츠비’의 의상디자인은 영국의 여성디자이너 제인 그린우드의 몫이 됐다.

    영화에 선보였던 최고급 의상들을 다시 한번 보기 원한 사람이라면 오페라 무대에 등장한 의상에 약간의 실망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영화와 오페라의 의상디자인은 근본적으로 맥을 달리한다는 것이 그린우드의 생각이었다. 영화의 카메라는 진주 귀고리나 파티용 드레스에 촘촘히 박힌 인조보석 등을 클로즈업할 수 있지만 오페라 관객의 눈에는 그러한 디테일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린우드는 정교한 장식을 생략하는 대신 대담한 색조와 벨벳, 새틴 등의 대조적인 텍스처를 사용하고 원작의 배경인 1925년의 유행을 재현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당시 인기를 끌던 랑방의 디자인이 무대에 등장하기도 한다.

    오페라 ‘위대한 개츠비’에서 특히 인상적인 것은 여자들의 의상이다. 데이지 역을 맡은 돈 업쇼는 기모노를 연상시키는 소매에 형광빛의 푸른색 리본을 단 재킷을 입고 나온다. 가슴이 평평해 보이는 플래퍼 스타일의 드레스는 1920년대의 여성복에 유행했던 남성풍 실루엣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개츠비의 저택에서 벌어지는 파티 장면은 번쩍거리는 오렌지색이나 새파란 색깔, 또는 샛노란 색깔 등 원색의 드레스들로 채워진다. 밝은 파스텔 색상으로 전체적인 조화를 강조했던 영화 속의 의상들과는 딴판이다. 이번 오페라 공연의 의상 자문을 맡은 로렌 역시 “여자들의 의상이 아름다웠다”고 평가했다.

    뉴욕의 비평가들도 대부분 로렌의 평가에 동의하고 있다. 파티 장면에 사용된 의상들은 벼락부자의 파티라는 화려하고도 천박한 상황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반면, 주인공인 개츠비의 의상은 그리 도드라지지 못했다. 원작과 영화에서 강조되었던 개츠비의 분홍색 수트는 오페라에서도 어김없이 등장하지만 개츠비를 맡은 제리 해글리는 조연들의 번쩍거리는 의상에 가려 무대에서 잘 보이지도 않았다.

    영화 속에서 개츠비로 등장하는 로버트 레드퍼드는 색색깔의 셔츠를 한 방에 가득 찰 만큼 던지고 또 던진다. 그러나 오페라 무대의 개츠비는 음악의 흐름에 맞추느라 단 한 번 셔츠를 던지고 말뿐이다. 무대 위에 흩어진 셔츠들은 뉴요커들이라면 누구나 입고 다니는 평범한 것들이다. 영화가 제작된 70년대에는 일종의 파격이었던 대담한 스트라이프 무늬나 인디언 블루의 셔츠들은 더 이상 새롭지도 놀랍지도 않았다. 관객들은 대체 왜 데이지가 그 장면을 보고 다시금 개츠비에게 반하는지, 그전에 이 작품에서 ‘색색가지 셔츠’가 무슨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 끝내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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