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17

2000.01.13

아름다운 남자? 강한 여자?

男-귀고리 피부관리 등 가꾸기, 女-자기주장 강하고 터프하게… “性域은 없다”

  • 입력2006-06-09 11: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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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남자? 강한 여자?
    ‘남성=억세고 강함’ ‘여성=아름답고 약함’이라는 이분법이 무너지고 있다. 직업의 선택이나 조직내의 ‘역할수행’에서 ‘금남`-`금녀의 성역’이 무너져내림은 물론, 옷차림이나 외모도 ‘중성화’되는 추세다. 그 두드러진 현상 중 하나가 ‘아름다워지려는 남성이 늘어나는 것’. 여성들의 전유물로 여겨져 온 귀고리, 목걸이를 착용하거나 머리를 길게 기르고 염색한 남성은 이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모습이다. ‘외모 가꾸기’는 이제 일부 신세대들만의 자기표현 방법이 아니라 많은 남성들 사이에 이미 ‘일반화된’ 추세다.

    지난 85년 국내 처음으로 ‘남성전용 피부관리실’을 연 ‘미라&맨풀 코스메틱’의 한은주원장은 “개업 초기엔 연예인 등 특수고객들이 주로 이용했지만 요즘은 중고생부터 50, 60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일반 남성들이 찾아온다”고 전한다. 하루 20명 정도의 고객 가운데는 ‘화장품을 잘못 사용해’ 피부트러블을 일으켜 찾아온 이들이 적잖다는 것.

    남성전용미용실도 성업을 이루고 있다. 지난 98년 6월 문을 연 ‘블루클럽’. 대학가의 젊은층을 상대로 영업을 시작, 한달 고객수가 10%씩 증가하더니 창업 1년 반만에 140개 체인점을 거느리게 되었다. “고객들에게 열가지 헤어스타일을 제시, 마음에 드는 모양을 고르게 하고 담당 헤어디자이너가 한 고객을 지속적으로 관리한다.”(‘블루클럽’ 임상욱기획팀장) 기존 여성 미용실과 유사한 수준의 서비스를 남성들에게 제공한다는 얘기다. 특히 남성들이 ‘이발소‘에서 ‘남성전문 미용실’로 발길을 옮기는 이유 중 하나는 ‘컬러링’(염색 혹은 블리치)을 위한 것. 실제 남성전용 미용실에서 컬러링 매출이 차지하는 비율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고 한다.

    남성 전문화장품 시장의 성장도 만만찮다. 93년 이래 해마다 30~70% 성장률을 기록해온 남성 화장품은 그 품목도 다양해지고 있어 남성전용 화이트닝(미백) 화장품, 마사지팩 등까지 선보이고 있다. ‘비오뗌’ 브랜드 매니저 박남희씨에 따르면 “남성용 아이케어 크림이나 에센스는 특별한 광고를 내보내지 않았는데도 상당히 판매율이 높다”고 한다.

    여성들 사이에서도 ‘치마와 뾰족구두, 화장’으로 대변되던 ‘여성적 아름다움’을 거부하는 움직임이 강하게 일고 있다. 커리어우먼들이 선호하는 활동적인 바지 정장 차림이나 넥타이 차림, ‘편하고 단순한’ 밀리터리 룩의 유행 등이 그것. 15대 국회에 진출한 여성의원들은 등원시 의상 문제가 몇 차례 구설수에 오르자 ‘바지 정장 입기’를 결의하기도 했다.



    패션의 ‘중성화’는 70년대 여권신장운동과 맞물려 붐을 일으킨 ‘유니섹스’ 스타일과는 맥락이 다른 것. ‘남성처럼 보이기 원하는 여성’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성적인 구분을 없앤 ‘젠더리스 룩’(genderless look)이 남녀 모두에게 어필하는 것이다.

    페미니스트 작가 김신명숙씨는 이런 변화를 “남성의 여성화, 여성의 남성화라고 단순화해서 보아선 안된다”고 못박으며, “원래 인간은 남성적인 요소와 여성적인 요소를 동시에 갖고 있지만 기존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두 가지 요소의 공존을 부정하도록 요구했다. 그런데 이제 그런 사회적 편견이 점차 붕괴되어 가면서 개인의 내부에 숨어있던 양성성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이다”고 진단한다.

    신경정신과 전문의 이규환박사는 “남성이 여성적 장신구를 하거나 여성이 남자처럼 보이는 옷을 입는 것은 ‘자기 내부의 또 다른 성’을 되살리고 싶은 욕구에서 빚어지는 행동이다”고 분석한다. 즉 ‘결핍된 반쪽 성향’을 충족시키고 싶은 욕구는 있는데 이것을 실현할 만한 적절한 사회규범이나 역할이 마땅치 않을 경우, 그 충돌과 갈등을 ‘외모 꾸미기’라는 방법으로 해소하려 한다는 것.

    “여성이 남성 못잖게 성적 욕망을 자유롭게 추구하는 시대가 도래하면서 남성에 대한 ‘선택권’이 높아졌기 때문에 남성도 외모를 꾸미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는 흥미로운 견해도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다.

    외모뿐 아니다. 사회적 역할에서도 남녀의 구분은 무너지고 있다. 대학 진학시 의류학과 아동학과 식품영양학과 등을 지원하는 남학생이 늘어나고, 마도로스 항공정비업 지하철 기관사 사관학교 등으로의 여성 진출도 눈에 띈다. 97년 여성에게 문호를 연 사관학교에 여학생들이 대거 지원, 지난 99년 해사 경쟁률이 무려 56.4대 1(남학생 경쟁률은 26.2대 1)을 기록했다. 육사와 해사에서 여학생 지원자가 수석합격을 차지한 것도 화젯거리. 남녀공학 대학의 총학생회장 및 단과대학생장에 여학생 당선이 속출하는 현상 역시 조직의 ‘리더십’이 더 이상 남성만의 전유물이 아님을 증명했다.

    TV드라마에서도 ‘자기주장 강하고 터프한 여성’이 뜨고 있다. 의사 역의 여주인공들이 심심지 않게 등장하고(‘사랑하세요’의 추상미, ‘순풍산부인과’ 이태란. ‘순풍산부인과’는 남자=의사, 여자=간호사라는 등식을 깨고 극중 남자간호사까지 등장시켰다), 스패너와 망치를 들고 척척 자동차를 수리해 내거나 로봇축구 동아리활동을 하는 적극적 여학생(‘카이스트’의 추자연 강성연)의 모습, 빈손으로 자수성가하는 젊은 여성(‘국희’ 김혜수), 맞벌이 부부의 파워게임에서 승기를 쥐는 아내(‘마지막 전쟁’)도 볼 수 있다. ‘카이스트’ 작가 송지나씨는 “이런 여성상이 요즘 드라마에 많이 나오는 것은 그만큼 시청자들이 좋게 봐주기 때문일 것이다. 예전 같으면 이런 여성들의 모습을 보고 ‘싸가지없다’고 했을지도 모른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이렇듯 이른바 ‘남성의 영역’에 여성들이 대거 진출하게 된 것은 여성이 출산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사실을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예전에는 ‘사회적 노동력’의 재생산을 위해 아이를 많이 낳으려는 욕구가 강했던 데 비해 기술문명사회로 접어들면서 노동력의 양적 증대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고, 따라서 여성이 출산과 육아 부담을 상대적으로 작게 받음으로써 사회적 활동이 늘어난 것이다.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98년 현재 20대 여성의 경우 결혼은 ‘필수’라고 말하는 사람(13.5%)에 비해 ‘선택’으로 여기는 사람(42%)이 세 배에 달했다. 또한 남녀 통틀어 절반 이상의 사람(51.2%)이 “맞벌이 부부의 경우 가사는 공평하게 분담해야 한다”고 답했고, 아내가 전업주부인 경우조차 7.3%의 응답자가 “가사를 공평하게 분담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회분위기와 인식의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통계다.

    “게다가 세계가 정보화 사회로 접어들면서 남성들의 주특기였던 ‘근력’보다는 두뇌와 상상력, 감성이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또한 ‘미래 사회에는 직업은 있지만 직장은 없어질 것’이라는 앨빈 토플러의 말처럼 우리 사회에도 소호(SOHO)족 등 재택근무 인구가 늘어나고 있어요. 여성들이 남성 중심적으로 운영되던 ‘직장 문화’로부터 자유롭게 일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돼가는 거지요.” (수원대 이주향교수·철학)

    이미 초등학교 교실에서는 ‘공기놀이를 하는 남학생’과 ‘남자아이를 무릎꿇게 하고 벌주는 여학생’ 의 모습이 심심찮게 발견된다고 한다. 자식을 ‘사내애답게’ ‘계집애답게’ 키우기를 거부하고 타고 난 개성에 맞게 기르려는 ‘깨인 시각의 부모들’이 늘어갈수록 이같은 추세는 가속화될 전망이다. 앞 으로는 더더욱 ‘남성성’이나 ‘여성성’보다 ‘개성’이 중시되고 강조되는 사회가 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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