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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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치기 연봉제’에 죽을 맛이오!

쥐꼬리 성과급에 호봉제승급 없애 밑바닥 임금… 4년차 행원 국내은행보다 1600만원 낮아

  • 허만섭 기자 mshue@donga.com

    입력2007-03-09 11: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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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치기 연봉제’에 죽을 맛이오!
    IMF체제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던 98년 국내 은행들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조흥은행의 이해 당기순 이익은 -2조829억원, 한빛은행 -1조6974억원, 외환은행 -9552억원이었다.

    그러나 같은 기간 한국에 진출한 외국계 은행들에 한국금융시장은 ‘딴나라’ 같았다.

    미국계 씨티은행 한국지점은 1109억원의 당기 순이익을 냈다. 홍콩상하이은행은 720억원의 이익을 봤다. 이 해 한국에 진출한 51개 외국계 은행들의 당기 순이익 총액은 7246억원. 은행별로 평균 142억원의 이익을 남긴 셈이다. 올해 외국계 은행들은 더욱 호황이다. 씨티은행 한국지점은 올 상반기에만 당기순이익이 1700억원에 달해 98년 1년치를 이미 넘어섰다.

    그래서 이들 주한 외국은행에서 일하는 한국인 은행원들은 언뜻 ‘선망의 대상’처럼 보인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다.

    초봉도 200만~1천만원 뒤져



    외국계 은행원들은 지금 은행업계 최저임금과 상시해고의 불안에 쫓기고 있다. ‘외국어 유창하고 국제감각 있는 1등은행원’으로 알려진 이미지와는 너무 거리가 멀다. 이들은 “한국속담처럼 우리는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고 자조하고 있다.

    막대한 흑자를 내는 회사에서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해답의 열쇠는 외국계 은행들이 한국에 이식해 놓은 희귀한 형태의 ‘연봉제’에 있다.

    ‘주한 외국금융기관 노조협의회’(외은협·위원장 엄진수)는 11월12일 외국계 은행 연봉제의 특징으로 △호봉승급제 폐지 △말단직원까지 전직원 연봉제 대상 △미미한 성과급 등 세 가지를 제시했다.

    씨티은행의 경우 지난해 이 은행 직원들의 평균연봉인상률은 5.8%. 이 은행 노조는 “호봉제 폐지하에서의 이 정도 인상률은 호봉제를 두고 있는 국내은행의 임금동결과 같다”고 말했다.

    이 은행은 정규직 직원 전원에 대해 연봉제를 실시하면서 성과급 명목의 임금은 전체 연봉의 3% 내외로 뒀다. 또한 은행과 노조가 연봉협상을 벌여, 인상률을 결정하면 150여명 노조원은 일괄적으로 같은 인상률을 적용받게 된다. 이 두 가지 요인 때문에 이 은행에선 연봉제를 실시하면서도 직원들간의 임금 격차는 거의 없게 됐다.

    노조는 “능력에 따른 차등지급도 안되는 연봉제를 회사가 고집하는 이유는 호봉제 폐지로 인건비 절감효과가 크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씨티은행뿐 아니라 도쿄-미쓰비시은행, 상와은행, HSBC, 스탠다드 차타드은행 등 거의 대부분의 외국은행들이 똑같은 방식의 연봉제를 두고 있었다. 호봉승급분을 아예 없애거나 낮게 두고 성과급여도 적게 책정한 뒤 평균 연봉인상률 폭을 작게 하는 식이었다.

    지난해 도쿄-미쓰비시은행의 평균 연봉인상률은 4%. 이 은행은 호봉제를 두고 있지만 호봉승급에 따라 오르는 월 급여는 1300원이라는 ‘상징적’ 액수였다고 한다.

    상와은행은 올해 연봉 1500만원에 정규직 신입사원을 채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HSBC는 신입사원을 채용한 뒤 인턴 기간을 1년으로 두고 있다고 한다. 국내 금융계의 수습기간은 3개월 정도다. “정해진 호봉체계라는 게 없으니 월급이나 수습기간은 회사가 ‘부르는 게 값’이 되는 형편으로 전락했다”고 한 외국계 은행원(33)은 말했다.

    도쿄-미쓰비시은행의 관계자는 “외국은행들이 서로 합의해 매년 평균연봉인상률을 일정수준으로 통제한다고” 주장한다. 어느 한 은행의 돌출적인 연봉급상승을 억제해 전체 외국은행의 노동시장을 안정화하자는 것.

    이러한 방식의 연봉제는 외국계 은행원의 임금을 국내 은행업계 최저수준으로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고 있다. 12일 외은협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외국은행원의 초봉은 국내 은행보다 200만∼1000만원 뒤졌다. 4년 뒤 외국계 은행원은 국내 모든 은행원보다 임금수준에서 뒤지고 그 격차는 최고 1600만원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 외국은행 인사담당자는 “한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내놓는 임금인상통계를 근거로 인상률을 잡는다”고 말했다. 외은협 엄진수위원장은 “임금의 하향평준화가 목표인 기형적 연봉제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이 좌절감을 준다”고 말했다.

    외국계 은행이 실시하는 연봉제는 국내외에서도 사례를 찾기 힘들다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한국노동 연구원 박우성연구원은 “성과를 많이 낼수록 임금을 더 주며(Merit pay) 생산성 향상을 꾀하는 방식이 전형적 미국식 연봉제라면 주한 외국은행이 실시하는 연봉제는 인건비 총액을 빡빡하게 묶어 놓자는 것이 더 큰 목적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 김환일노동경제연구원은 “미국 은행에선 간부급 이상만 연봉제 대상”이라고 말했다.

    외국은행의 연봉제가 국내기업들에 파급되는 조짐은 이미 나타나고 있다. 씨티은행엔 이 은행의 연봉제를 배우겠다는 기업체의 행렬이 줄을 잇고 있다. 씨티은행 임금지급 업무와 관련된 컨설팅회사로부터 자문받은 신한은행은 전직원을 대상으로 호봉제를 폐지하고 연봉제를 시행할 계획이다. 이 은행 노조 최지연조직부장은 “씨티은행 연봉제와 판박이처럼 똑같다”고 말했다. 이 은행 노조는 연봉제시행방침에 반발, 10월22일 은행 임원실에서 농성을 벌였다.

    요즘 너도나도 연봉제로 고용구조를 바꾸겠다고 달려들고 있다. 주한 외국은행의 ‘국적 없는 연봉제’가 이 바람을 타고 붐을 일으키지나 않을지 노동계가 바짝 긴장하고 있다.

    스톡옵션 붐

    상장사 193곳 도입 … 대부분 간부급만 연봉제


    지난 2년 동안 ‘대량감원바람’과 함께 한국기업문화의 풍토를 바꾼 가장 큰 ‘사건’은 바로 ‘연봉제의 확산’이었다.

    노동부 조사에 따르면 지난 1월 전국 100인 이상 5097개 기업 중 605개소가 연봉제를 도입했다.

    과장급 이상 간부대상 매년계약, 호봉제폐지, 성과급차등지급 등 지난 94년 두산그룹이 도입한 연봉제는 대다수 기업의 모델이 됐다. 삼성이나 LG그룹계열사는 성과급 격차를 더욱 벌렸다. 스톡옵션도 유행을 타고 있다. 지난해말 상장사 544곳 중 193곳이 스톡옵션을 도입했다. 세종증권에 따르면 증권사 영업직원 중엔 약정실적에 따라 받는 수당이 기본급의 10배를 넘는 사람이 허다하다.

    그러나 ‘전사원을 대상으로 한 연봉제’를 실시하는 국내기업은 거의 없다. 한국노동연구원 박우성연구원은 “연봉제 대상 확대 등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아직 없다”고 말했다. 국내에서 연봉제는 ‘완결편’이 아니라 ‘실험 중’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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