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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 ‘나랏말싸미’의 허와 실

한글 창제 주역으로 그려진 신미의 실체

영화 ‘나랏말싸미’의 허와 실

[사진 제공 · 메가박스]

[사진 제공 · 메가박스]

한글 창제 주역이 세종대왕이 아니라 이름도 낯선 승려라는 영화가 등장했다. 7월 24일 개봉한 송강호, 박해일, 전미선 주연의 ‘나랏말싸미’다. 

이 영화는 개봉 전부터 이래저래 구설에 올랐다. 우선 영화에서 송강호, 박해일과 함께 주연을 맡은 배우 전미선이 6월 29일 극단적 선택으로 숨을 거뒀다. 이어 2014년 12월 ‘훈민정음의 길 : 혜각존자 신미 평전’을 펴낸 출판사 나녹 측에서 7월 2일 조철현 감독과 영화사 두둥, 배급사 메가박스를 상대로 상영금지가처분 소송을 제기했다. 해당 책이 영화의 원안이 됐음을 자막을 통해 명기하기로 한 약속을 위반했다는 이유에서였다. 

형난옥 나녹 출판사 대표는 “원안 자막 표기를 전제로 작가 박해진 씨가 37회나 자문에 응하면서 시나리오 집필을 적극 도왔고 2018년 4월 이를 명기한 원안계약서까지 보내놓고선 일방적으로 파기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조 감독은 “‘훈민정음의 길’은 시나리오를 쓸 때 참고한 여러 자료 가운데 하나일 뿐이며 책 내용과 영화 내용이 확연히 다르기 때문에 원안으로 표기할 의무가 없다”고 반박했다. 법원은 일단 7월 23일 가처분 소송을 기각해 영화사 측 손을 들어준 상태다.


여배우 사망, 저작권 분쟁, 역사왜곡 논란

[사진 제공 · 메가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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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개봉한 뒤 이번엔 역사왜곡 논란이 일고 있다. 세종(송강호 분)이 아니라 신미(박해일 분)라는 승려가 사실상 한글을 창제했고, 정인지의 ‘훈민정음해례’를 대부분 신미가 집필했으나 유학자들의 반대를 막고자 세종이 이를 의도적으로 은폐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서다. 이는 ‘세종어제훈민정음’(世宗御製訓民正音·세종임금이 지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이라는 공인된 역사를 뒤집는 내용이다. 

영화에는 세종이 신하들과 논쟁하면서 “나에게도 역린(용의 턱 아래에 거꾸로 난 비늘로 제왕의 분노를 촉발하는 요소를 뜻함)이란 것이 있다”고 화를 내는 장면이 등장한다. 한글 창제의 주역이 세종이 아니라는 내용은 세종의 역린이 아니더라도 한글을 국보1호로 여기는 대다수 국민의 역린을 건드리는 효과를 발생시킬 수 있다. 영화 제작진도 이를 의식해 영화 시작 전 ‘다양한 훈민정음 창제설 중 하나를 영화적으로 각색했다’는 자막부터 내보내는 안전장치를 마련했다. 하지만 학계의 검증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사실을 성급하게 침소봉대해 극화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특히 신미라는 인물을 천둥벌거숭이처럼 좌충우돌하는 인물로 그리면서 세종을 그런 신미에게 끌려가는 수동적 인물로 형상화한 것이 이런 거부감을 부채질한다. 



영화는 개봉 일주일을 맞은 7월 31일 현재 90만 명 이상 관객이 들었다. 올해 다섯 번째 1000만 관객 영화를 향해 질주하는 ‘라이온 킹’과 이미 네 번째 1000만 관객 영화에 등극한 ‘알라딘’ 두 월트디즈니 영화의 협공 속에서 고군분투 중이라고 할 만하다. 하지만 7월 31일 개봉한 조정석·윤아 주연의 ‘엑시트’와 박서준·안성기 주연의 ‘사자’의 거센 도전까지 감안하면 제작비 130억 원의 손익분기점인 370만 관객 돌파는 쉽지 않아 보인다.


영화적 허구와 역사적 진실

[사진 제공 · 메가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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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제기한 신미의 한글 창제설이 과연 얼마만큼 진실에 부합하느냐는 따져볼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선 먼저 영화 내용 가운데 극적 재미를 위해 창작된 허구부터 가려보자. 

영화에선 신미가 독실한 불교신자인 소헌왕후(전미선 분)의 천거로 세종을 만나는 것으로 그려진다. 사실과 다르다. 세종의 둘째 형이자 당시 조선 불교계 최고 후원자였던 효령대군이 한글 창제로 고심하던 세종에게 천거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 시점은 훈민정음 창제 1년 전인 1442년(세종 24년)으로, 소리글자이자 불경 원전 언어인 범어(산스크리트어)와 티베트어, 파스파문자(원나라 시절 몽골문자)에 정통한 학승이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영화에서 신미의 첫 임무는 조선 2대 왕 정종 때 약속한 대로 팔만대장경 경판을 넘겨달라고 떼를 쓰며 단식투쟁하는 일본 승려들을 퇴치하는 것이다. 팔만대장경이 있는 해인사에 주재하던 신미는 유창한 산스크리트어로 “남의 나라 대장경을 구걸하지 말고 100년이 걸리는 한이 있더라도 스스로의 노력으로 만들라”고 단칼에 그들을 내친다. 

해당 사건은 1424년(세종 6년)에 발생했으며 신미와 전혀 무관하다. 신미가 해인사에 주재한 것은 그보다 한참 후인 세조 때로, 세종을 만날 당시엔 복천사(현 속리산 법주사 내 복천암)에 있었다. 게다가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우리에겐 무용지물이니 내어주는 게 어떠냐”고 말한 이가 세종이었고 “이를 들어주면 버릇만 나빠진다”고 반대한 쪽이 신하들이었다. 

영화 속 신미는 자신이 역적의 아들이라 중이 됐는데 조선에서 중을 개 취급한다며 “개가 절하는 거 봤느냐”면서 임금에게 절조차 하지 않는다. 신미의 아비 김훈(1381~1437)은 1416년 조모상을 치르지 않고 상경해 상왕으로 물러나 있던 정종에게 줄을 대고 기생과 놀아난 불충불효의 죄로 귀양을 갔다. 대역죄를 저지른 것은 아니다. 당시 사대부로선 치욕스러운 죄였기에 맏아들로 성균관 유생이던 신미가 머리를 깎고 중이 됐지만 여섯 살 터울의 동생 김수온은 과거 급제한 집현전 학사였다. 

영화 속 신미는 세종의 한글 창제를 돕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한양 사대문 안에 절 하나 지어달라”고 요구한다. 그래서 세종이 한글 창제 이후 경복궁 안에 내불당을 지어주고 거기서 소헌왕후 천도재를 지내는 날 ‘훈민정음언해’가 배포되는 것으로 그려진다. 실제론 1446년(세종 28년) 3월(이하 음력) 소헌왕후가 숨지고 그해 9월 훈민정음이 반포된다. 내불당이 새로 완공된 시점은 그 2년 뒤인 1448년(세종 30년) 11월이며 소헌왕후 천도재가 치러진 장소는 경기 고양시에 있었던 대자암이다. 또 당시 사대문 안에는 흥천사와 흥덕사라는 절이 있었으며 내불당 역시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1418년(세종 즉위년)에 지었다 폐쇄했던 것을 새로 건립한 것이다.


신미는 누구인가

충남 보은 법주사 복천암에 있는 수암화상탑(신미) 부도와 등곡화상(학조) 부도(왼쪽). 박해진 작가의 ‘훈민정음의 길 : 혜각존자 신미 평전’ [사진 제공 · 나녹]

충남 보은 법주사 복천암에 있는 수암화상탑(신미) 부도와 등곡화상(학조) 부도(왼쪽). 박해진 작가의 ‘훈민정음의 길 : 혜각존자 신미 평전’ [사진 제공 · 나녹]

수암 신미(秀庵 信眉·1403~1480)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사실 한글 창제에서 신미의 숨겨진 역할을 주목한 학자나 소설가는 여럿 있었다. 그 결과물로 박해진 작가의 ‘훈민정음의 길’ 외에도 정찬주 작가의 ‘천강에 비친 달’(2014)이나 정광 고려대 명예교수의 ‘한글의 발명’(2015) 같은 책이 출간됐다. 하지만 신미의 생몰연도를 포함해 관련 사료를 가장 정밀하고 방대하게 집대성한 책이 ‘훈민정음의 길’이라는 점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영화를 4차례나 봤다는 박해진 작가가 “최종 시나리오에서 문제가 될 장면을 빼버려 저작권 침해라고 콕 찍어 말하긴 어려워졌지만 정신이 도둑질당한 기분”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시인이자 고건축 사진가인 박 작가는 2002년 속리산 법주사 대웅보전 중창불사 전 과정을 촬영하다 우연히 복천암(옛 복천사)에 주재하던 승려가 훈민정음 창제에 큰 공을 세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만 해도 신미라는 인물은 일반 역사서에서 흔적조차 발견되지 않을 때였다. 그래서 12년에 걸쳐 신미와 관련된 행정과 사료를 추적해 200자 원고지 1만5000장 분량의 원고를 완성했다. 이를 3분의 1로 압축해 800쪽 분량의 책으로 펴낸 게 ‘훈민정음의 길’이다. 사진과 도판만 150장 이상이고 각주도 1700개가 넘는다. 

세종보다 여섯 살 연하인 신미는 영산 김씨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김수성(金守省)으로 열여섯 살 때 조선 최초 왕사였던 무학 자초의 제자 함허 득통(1376~1433)을 등불 삼아 출가한다. 같은 성균관 유생 출신으로 선승과 학승의 풍모를 겸비해 ‘금강경오가해설의’를 집필했던 득통처럼 신미 역시 선승이면서 불경 연구에 조예가 깊었다. 게다가 외할아버지 이행의 영향으로 주역 연구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그런 신미가 한글 창제에 관여했을 개연성을 보여주는 정황 증거는 여럿이다. 세종이 신하들에게 한글 창제 사실을 알린 1443년 12월부터 훈민정음을 반포한 1446년 9월 사이 세종이 눈병 치료를 위해 신미가 주재하던 속리산 복천사에서 가까운 충북 초정약수터로 자주 행차했다. 1445년에는 신미가 한양과 가까운 대자암 주지로 부임했고, 1448년엔 경복궁 내 내불당 초대 주지가 된다. 

게다가 신미는 훈민정음 반포 직후 한글로 집필된 ‘월인석보’(세종이 지은 ‘월인천강지곡’과 훗날 세조가 되는 수양대군이 지은 ‘석보상절’을 합편한 책)의 집필과 인쇄는 물론, 수많은 불경언해 작업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유교경전인 ‘사서삼경’의 언해가 선조 때 이뤄지는 반면 ‘능엄경’ ‘법화경’ ‘금강경’ 같은 불경언해는 그보다 앞선 세조~성종 때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초성·중성·종성의 합자로 구성되는 한글의 구성 원리가 불경 연구에 꼭 필요한 산스크리트어와 티베트어 등의 영향을 받았음이 뚜렷하다는 점도 신미 역할론을 뒷받침한다. 또 ‘훈민정음해례’ 본문 해설 뒤에 그 내용을 칠언고시 형태의 운문으로 요약해놓은 ‘결왈(結曰)’이 불교의 게송(偈頌) 형식을 띤다는 점도 신미 집필설의 근거가 된다.


天地人의 원리가 투영된 영화 미학

[사진 제공 · 메가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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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세종이 죽으면서 신미에게 ‘선교종도총섭(禪敎宗都摠攝) 밀전정법(密傳正法) 비지쌍운(悲智雙運) 우국이세(祐國利世) 원융무애(圓融無礙) 혜각존자(慧覺尊者)’라는 엄청난 존호를 내리라는 유언을 남긴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거의 무명에 가깝던 승려에게 고려시대 국사나 왕사에게나 주어질 법한 존호가 내려진 것이다. 

세종의 맏아들 문종이 이를 관철하려 하자 사간원과 사헌부는 물론, 세종이 세운 집현전 학사 출신들의 반대 상소가 빗발쳤다. 특히 훗날 사육신으로 유명해지는 하위지와 박팽년이 “신미는 요승이고 간승”이라며 그 선봉에 섰다 박팽년은 파직까지 당했다. 결국 ‘나라를 돕고 세상을 이롭게 했다’는 우국이세가 빠지고 혜각존자를 혜각종사로 바꾸는 선에서 존호가 결정됐다. 

신미 역할론을 강조하는 학자들은 특히 ‘우국이세’라는 존호가 한글을 창제한 세종의 뜻과 맞닿아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래서 세종이 직접 쓴 훈민정음어지(서문)의 한자 원문이 54자(108자의 절반)이고 언해문이 108자인 것이 불교의 백팔번뇌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해석한다. 영화에서도 세종이 언해문의 글자 수를 일부러 108에 맞추는 것으로 그린다. 하지만 현존 언해문이 세종이 아니라 세조 때 번역됐다는 점에서 억측이라는 비판이 있다. 이 역시 한글 창제 과정에 참여했던 세조가 신미를 사실상 왕사로 모실만큼 독실한 불교신자라는 점에서 반박이 가능하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신미가 한글 창제에 기여했을 개연성은 충분히 엿보인다. 하지만 영화에서처럼 신미가 한글 창제를 주도했다는 결정적 증좌로는 부족하다. 따라서 한글 창제 주역은 여전히 세종일 수밖에 없다.



[사진 제공 · 메가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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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한글 모음에 적용된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의 원리가 무의식적 영화 미학으로 표출된 점만큼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늘’에 해당하는 세종과 ‘땅’에 해당하는 신미를 연결하는 ‘인간’으로서 소헌왕후가 빚어내는 심층적 삼각구도다. 남편을 성군으로 만들고자 자신의 가문이 통째로 풍비박산 나는 비극을 감내해야 했던 소헌왕후의 죽음과 백성을 위해 세종 자신의 시력과 수명을 바친 만든 훈민정음의 탄생이 맞물려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진한 감동을 길어낸다. 이 영화가 ‘전미선의 영화’로 기억될 이유다.






주간동아 2019.08.02 1200호 (p72~75)

  •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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