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80

2019.03.15

어른들을 위한 리뷰

대한민국 건국에 숨은 맹목과 광기의 폭력을 응시하다

원작 드라마의 진가를 응축한 뮤지컬 ‘여명의 눈동자’

  •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입력2019-03-20 11: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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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작뮤지컬 ‘여명의 눈동자’ 포스터(상자 안)와 극중 해방의 감격을 노래하는 장면. [수키컴퍼니]

    창작뮤지컬 ‘여명의 눈동자’ 포스터(상자 안)와 극중 해방의 감격을 노래하는 장면. [수키컴퍼니]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민족과 애국을 강조하는 뮤지컬이 잇따라 무대에 오르고 있다. 그 가운데 40대 이상 한국인의 추억 속에 고이 간직된 제목의 뮤지컬이 눈에 띈다. 한 세대 전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다. 

    1991~92년 방영된 ‘여명의 눈동자’는 ‘모래시계’(1995)로 정점을 찍게 되는 김종학-송지나 콤비의 명성에 날개를 달아준 명작이다. 윤여옥 역의 채시라, 최대치 역의 최재성, 장하림 역의 박상원을 스타 반열에 올려놓기도 했다. 최고 시청률 58.4%, 드라마 OST 40만 장 판매라는 경이적 기록은 이 작품을 보지 못한 세대에게 그 반향을 더듬어보라고 터뜨려주는 조명탄에 불과하다. 

    한 세대 전 방영된 이 드라마는 시청자의 뇌리와 귓가에 더 애틋하게 남아 있는지 모른다. ‘다시 보기’는 화질이 너무 떨어지는 데다 후시녹음이 많아 추억의 반추를 방해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4월 14일까지 서울 신도림동 디큐브아트센터에서 공연되는 뮤지컬 ‘여명의 눈동자’(지인우 대본·작사, J.ACO 작·편곡, 노우성 연출)는 관객의 추억을 파고드는 전략을 택했다. 드라마에 대한 아련한 향수에 기대면서 여옥(김지현·문혜원 분), 대치(박민성·김보현 분), 하림(이경수·테이 분)의 삼각관계 중심으로 극을 응축했다. 그 과정에서 드라마에서 고현정이 맡았던 이중스파이 안명지 같은 배역은 사라졌다.

    플래시백으로 추억을 파고들다

    최대치 역의 박민성, 장하림 역의 이경수, 윤여옥 역의 김지현 [수키컴퍼니]

    최대치 역의 박민성, 장하림 역의 이경수, 윤여옥 역의 김지현 [수키컴퍼니]

    10권 분량의 김성종 원작소설을 다시 36부작 대하드라마로 바꿨는데, 이를 다시 150분의 뮤지컬로 압축하려면 자연스러운 선택이다. 뮤지컬의 시대적 배경은 1943~53년. 10년의 세월이라지만 태평양전쟁과 해방공간에서 좌우투쟁, 제주 4·3사건, 6·25전쟁, 빨치산 토벌전 같은 굵직한 현대사를 관통한다. 그러면서 얽히고설킨 인연의 실타래를 풀어내며 진한 감정까지 살려내는 게 어디 쉬운 일이랴. 



    이때 가장 많이 도움을 주는 장치가 음악이다. 드라마 OST가 워낙 인기 있었던 만큼 귓가에 익숙한 테마 곡을 활용한다면 금상첨화일 터. 하지만 문제가 있다. 할리우드 영화 ‘드레스드 투 킬’의 사운드트랙 표절로 판정 난 ‘여옥의 테마’를 비롯해 상당수 곡이 저작권 문제로 쓸 수 없었다. 유일하게 건진 곡은 ‘메인 테마’. 오프닝과 엔딩 장면뿐 아니라 중간 중간 그 곡의 다양한 변주가 울려 퍼진다. 

    이를 보완하는 것이 2막 서울에서 결혼을 약속하는 여옥과 하림 앞에 죽은 줄 알았던 대치가 나타나는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삼중창이다. 3명의 엇갈린 심정이 절절하게 담긴 절창이다. 특히 하림 역을 맡은 배우 이경수의 절창이 돋보인다. 

    그래도 드라마 속 수많은 에피소드와 장면 중 어떤 것을 택하느냐는 문제가 남는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 역시 추억을 회상하는 플래시백 기법을 적극 활용했다. 남파된 대치를 따라 제주 4·3사건에 관여한 혐의로 재판을 받는 여옥과 그녀의 변론을 돕는 하림이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 중심으로 극이 전개된다. 

    이런 극 전개는 드라마를 시청한 관객의 추억을 차곡차곡 환기하는 효과까지 낳는다. 하지만 이야기가 순차적으로 진행되지 않기 때문에 드라마를 보지 못한 관객에겐 불친절하게 다가올 수도 있다. 

    이를 보완하는 방법은 시간을 넘나들 때 서로 관련된 장면을 연결하는 것이다. 그 핵심적 키워드는 ‘함께 있어주지 못했다’는 죄의식이다.

    광기보다 죄에 초점을 맞추다

    일본군에 끌려가는 조선 청년들을 형상화한 장면. [수키컴퍼니]

    일본군에 끌려가는 조선 청년들을 형상화한 장면. [수키컴퍼니]

    이를 위해 이 드라마의 가장 유명한 장면 가운데 하나인 철조망 키스신도 바뀌었다. 드라마에선 중국 난징에서 미얀마(당시 버마)로 파병되는 대치가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온 여옥에게 작별을 고하는 장면인데, 뮤지컬에선 함께 탈영하려다 여옥만 남겨두고 홀로 떠나는 장면으로 바뀐다. 사지나 다름없는 곳에 사랑하는 여인만 남겨두고 홀로 탈출한 셈이다. 

    이에 따라 드라마 속 버마 밀림에서 악전고투를 거치지 않은 대치는 바로 중국 홍군에 의해 구출된다. 이후 상하이에서 좌익 독립운동을 펼치던 그는 상부의 지시를 받고 우익 지도자를 저격하려다 여옥의 아버지이자 중도파 지도자인 윤홍철을 실수로 살해한다. 드라마에선 대치가 아니라 그를 좌익으로 이끈 김기문의 소행으로 그려진 장면이다. 그렇게 다시 대치는 여옥이 가장 아끼는 아비의 목숨을 앗아간 사람이 된다. 

    마지막으로 대치와 여옥 사이에 태어난 아들 대운이 드라마에선 6·25전쟁 와중에 미군 폭격으로 숨진 것으로 그려지지만, 뮤지컬에선 제주 4·3사건 기간 진압군의 소행으로 바뀐다. 남파공작원으로 제주 4·3사건의 비극에 불쏘시개 역할을 한 대치의 혁명사상으로 피붙이를 모두 잃은 여옥은 다시 북으로 넘어가려는 대치를 따라가지 않는다. 대치는 다시 여옥을 버려두고 홀로 도망친다. 그렇게 대치는 여옥이 그를 가장 필요로 할 때마다 그녀를 버리고 도망간 존재다.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대치는 제국주의 일본이라는 괴물과 맞서 싸우다 스스로 괴물이 돼간다. 뮤지컬은 이를 직접적으로 형상화하기보다 사랑하는 여인에게 견디기 힘든 슬픔만 안기는 존재로 그려냈다. 그렇다면 지리산에서 대치와 여옥의 최후의 순간, 그것에 대한 죄의식을 고백하는 장면이 나올 법한데 그 대목이 빠진 점이 못내 아쉽다. 

    그럼에도 뮤지컬은 드라마 방영 당시 열광적 환호에 묻혔던 이 드라마의 진가를 재음미하게 해준다. 드라마의 구조적 뼈대를 무대 위에 뚜렷이 형상화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건국의 여명을 응시하던 눈동자에는 과연 어떤 빛깔, 어떤 감정이 어려 있었던 걸까. 대치의 그것이 핏빛으로 충혈됐다면, 여옥의 그것은 비탄의 눈물로 번져 있고, 하림의 그것에는 회한이 잔뜩 서려 있을 것이다. 결국 대한민국의 여명은 환희와 희망의 빛깔이 아니었다. 그 건국의 기원에는 피와 눈물과 땀이 철철 흐르고 있었다. 28년 전 드라마가 진짜 이야기하고자 했던 핵심 메시지는 바로 이것이 아니었을까. 

    무수한 신화학자와 철학자는 말한다. 모든 국가의 기원에는 초석적 폭력이 숨어 있다고. 대한민국 건국의 기원에 숨겨진 그 초석적 폭력은 무엇인가. 문재인 대통령이 3·1절 100주년 기념사에서 언급한 ‘친일파’와 ‘빨갱이’가 초래한 핏빛 폭력이다. 

    친일파가 현실영합적 맹목에 붙은 이름표였다면 빨갱이는 이상주의에 취한 광기의 다른 이름이었다. 전자의 폭력이 낳은 비극이 4·3사건이라면 후자의 폭력이 초래한 참극은 6·25전쟁이다. 문 대통령은 ‘빨갱이’란 딱지가 초래한 남한 사회의 폭력에만 초점을 맞췄지만 한반도 전체를 아우르는 대한민국의 건국에 스며 있는 공산주의자들의 폭력까지 외면할 순 없다.

    초석적 폭력으로서 ‘친일파’와 ‘빨갱이’

    무대 위로 올린 400석 규모의 ‘나비석’에서 바라본 배우들의 역동적 연기(왼쪽). 극의 처음과 끝을 수미쌍관으로 장식하는 여옥과 대치의 최후 장면. [수키컴퍼니]

    무대 위로 올린 400석 규모의 ‘나비석’에서 바라본 배우들의 역동적 연기(왼쪽). 극의 처음과 끝을 수미쌍관으로 장식하는 여옥과 대치의 최후 장면. [수키컴퍼니]

    미군에게 구조돼 자유 대한의 전사가 된 하림이 친일파의 맹목을 고발한다면, 중국군(드라마에선 소련군)에 구조돼 북조선의 혁명전사가 된 대치는 빨갱이의 광기를 스스로 체현한다. 여옥은 그 두 갈래의 초석적 폭력에 희생된 무고한 생령을 대변한다. ‘여명의 눈동자’는 그 두 갈래의 초석적 폭력을 정면으로 응시하라고 말하지만 귀 기울여 듣는 이는 여전히 많지 않다. 

    이 뮤지컬은 50억 원의 투자비를 약속받고 오디션과 제작에 들어갔지만 지난 연말 투자사 대표가 잠적하는 바람에 공연이 무산될 위기에 놓인 바 있다. 하지만 작품성을 안타깝게 여긴 배우들이 출연료를 스스로 깎고 제작스태프가 상당한 비용을 자비로 부담해 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 무대를 줄이고 영상배경을 활용하며 MR(녹음된 음악)반주에 맞춰 노래를 불러야 했지만, 그 대신 400석 규모의 객석을 무대 위로 올려 배우들의 숨소리와 땀방울을 체감할 수 있게 했다. 티켓 가격 역시 다른 대형뮤지컬의 절반 이하로 책정했다. 

    눈썰미 좋은 관객은 이 뮤지컬의 진가를 알아보고 있다. 원작 드라마 팬은 단단히 응축된 공연을 통해 원작의 심층적 구조를 재발견하고 있다. 뮤지컬 팬은 패기 넘치는 배우들의 가창력과 에너지에 반해 ‘가성비 최고인 뮤지컬’로 꼽고 있다. 상대적으로 아쉬움이 남는 여옥의 넘버를 보강하고 ‘악덕 친일파’ 최두일과 ‘냉혈 빨갱이’ 김기문 같은 주변인물을 입체화하는 발효과정을 좀 더 거친다면 ‘명성황후’나 ‘영웅’ 못지않은 창작뮤지컬이 될 가능성이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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